우리 사회에 ‘패러디’라는 예술의 한 기법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초반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유라 사태’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가 ‘이인화’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기폭제였습니다. 매끄러운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던 이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등 온갖 작품을 곳곳에서 짜깁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문학평론가 류철균’의 이름으로 자기 소설을 셀프 비평한 작가가 ‘짜깁기’도 예술의 한 기법이라고 당당하게 밝혀 사람들을 더 놀라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쏟아지는 비판을 향해 “실재와 모방의 경계를 무너뜨린 패스티시(혼성모방)와 패러디 기법으로 쓴 작품”이라며 “문단의 혹평과 힐난은 ‘마녀사냥’과 흡사하다”고 강변했습니다.

패러디라는 개념에 대해 이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졌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내세워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의 가교 역할을 하는 패러디 작품들은 일상에서도 쉽게 접합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명화에 등장하는 비너스 여신의 귀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달아놓고 보석 광고를 하는 식입니다. 제대로 된 패러디 작품은 원 콘텐츠를 차용하면서도 원 콘텐츠와는 다르게 해석되면서 색다른 감동을 줘야 합니다. 패러디도 엄연한 예술 작품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느닷없이 패러디에 꽂힌 이유는 아직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조국 사태’ 와중에 패러디라는 말이 자주 등장해서입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조국 가족의 행태가 TV 드라마 ‘스카이캐슬’과 영화 ‘기생충’의 판박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언론에 보도된 검찰 수사대로라면 조국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딸의 의전원 진학을 위해 총장 표창장을 위조하는 과정은 영화 ‘기생충’의 장면과 진짜 흡사합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가족도 별다른 죄의식 없이 원본을 스캔해 증명서를 위조하면서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갖게 됐다고 여깁니다. 조국 장관 딸의 현란한 스펙 쌓기는 자식의 인생을 완벽하게 설계하는 ‘스카이캐슬’ 사람들의 행태 그대로입니다.

요즘은 조국 장관 가족이 드라마와 영화를 모두 짜깁기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스카이캐슬 속의 기생충’이라는 비아냥도 나돈다고 합니다.

조국 장관 가족의 행태를 보면 사실 영화와 드라마가 현실을 베낀 것인지, 현실이 영화와 드라마를 베낀 것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사람들이 영화와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다면서 연일 새로운 사실이 터져나오는 조국 사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일 겁니다.

조국 장관은 이 와중에 키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유튜브 방송 진행자들이 조 장관 키가 180㎝냐, 185㎝냐를 놓고 시비를 겁니다. 키가 180㎝에 불과한데 185㎝로 얘기하고 다녔다면서 키높이 구두를 입방아에 올립니다. 별 시시콜콜한 걸 다 파헤친다고 할 수 있지만 스타일과 폼을 중시해온 조 장관의 자업자득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립니다.

사실 조국 장관의 인생 자체가 패러디 아니냐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폼과 스타일만 있지 진정성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조 장관도 인생을 건 고민이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미 드러난 그의 위선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듯합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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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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