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北京)시를 동서와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만나는 곳에 지금은 고궁(故宮)이라고 부르는 자금성(紫禁城)이 있고 그 남쪽 광장 한복판에 ‘마오쩌둥(毛澤東)기념관’이 있다. 무료로 입장하는 마오기념관에는 지금도 중국 ‘인민’들이 줄을 서서 입장해 기념관 안에 전시된 마오의 시신을 둘러본다. 밀랍으로 부패방지 처리된 마오의 시신은 기념관 지하에 보관돼 있다가 하루에 한 번씩 ‘일과시간’이 되면 지상으로 올라와 인민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오는 10월 1일로 정부 수립 70주년을 맞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알리던 1949년, 천안문 누대 위에서 전 세계를 향해 “오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성립됐다”고 낭랑한 후난(湖南)성 사투리로 외치던 마오의 시신은 죽은 지 43년이 지나서도 아직 천안문광장에 머물러 있다.

1893년 12월 26일 출생해 1976년 9월 9일 사망할 때까지 83년 가까이 살았던 마오쩌둥은 1958년에서 1960년 사이에 진행된 이른바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3600만명에서 4500만명에 이르는 중국 인민들을 아사시켰다.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경제 피폐화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화대혁명’이라는 미명(美名)으로 포장된 사실상의 정적 제거 정치투쟁을 통해서도 대체로 200만명의 중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마오의 대기근’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수 3600만명은 2008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고급기자였던 양지성(楊繼繩)이 출간한 책에서 추산한 수치이다. 2010년 9월 영국 런던대학의 프랭크 디코터(Dikotter) 교수가 중국의 도시와 농촌의 주민기록을 실사해서 추산한 문화대혁명기 사망자 숫자는 이보다 900만명이 더 많은 4500만명으로 기록돼 있다. 디코터 교수는 대실패로 귀결된 ‘대약진운동(Great Lead Forward)’의 이름을 패러디한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이라는 책에서 이 엄청난 아사자 숫자를 고발했다. 당시 8억 정도였던 중국 인구가 3년간의 대약진운동을 거치면서 20명 가운데 1명꼴로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중고생과 대학생들을 동원한 홍위병 운동으로 다시 400명 가운데 1명꼴인 200만명이 죽음으로 내몰렸다는 것이 그의 추산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사망자가 200만명이라는 것은 중국이 거의 공식적으로 인정한 숫자다. 1980년 11월 관영 신화(新華)통신이 문화대혁명 기간 3만4800명이 ‘박해로 인한 치사’에 이른 것으로 기록했으나, 2000년 3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대체로 200만명 정도가 문화대혁명 기간에 홍위병들에 의해 타살당하거나 자살한 것으로 기록했다.

과학기술과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마오는 이처럼 엄청난 인구를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불구하고 1976년 각종 성인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결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오가 저지른 과오는 그가 사망한 이후인 1978년 겨울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 전체회의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서야 겨우 시인됐다. 덩샤오핑은 1980년 8월 21일 이탈리아 여기자 올리아나 팔라치와 가진 인터뷰에서 마오의 생애를 평가하면서 “마오 주석은 과거 어떤 기간에는 과오를 범했지만, 그가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사람임을 감안해서 공과를 논하자면 과오는 두 번째의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처음으로 마오의 과오를 입에 올렸다. 덩샤오핑이 한 말은 “그래도 과보다는 공이 많다”는 것이었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마오에게 과오가 있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한 것은 덩샤오핑이 처음이었다.

문혁이 없었으면 개혁도 없었다?

1976년 마오보다 8개월 먼저 간암으로 사망한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사망 전에 유언을 통해 “사고 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므로 태워서 그 재를 뿌리고 어떤 기념관도 만들지 말라”고 했고 그 말은 지켜졌다. 마오 사망 이후 20여년간 중국을 개혁개방의 시대로 이끌면서 오늘날 세계 2위 경제대국의 기반을 만들어놓은 덩샤오핑(鄧小平) 역시 1997년 2월 전립선암으로 사망하기 전 “사고 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쓸모가 없는 것이므로 태워서 그 재를 바다에 뿌려라”라고 유언했다. 이 유언에 따라 덩샤오핑의 시신은 베이징 서쪽 화장장인 팔보산 공묘에서 불태워졌고 재는 비행기로 싣고 가 동중국해 일원에 뿌려졌다. 또 유언에 따라 덩샤오핑의 기념관은 지금까지 어떤 것도 세워지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문혁이 없었으면, 개혁도 없었다(沒有文革 沒有改革)”는 말을 즐겨 했다. 마오가 저지른 문화대혁명 기간에 중국인들이 겪었던 고난의 기억 때문에 빠른 경제 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역설적인 패러디다. 중국인들이 겪은 문혁의 고난에 대한 기억이 다시는 문혁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개혁의 성공을 담보해주었다는 말이다.

중국 지식인들은 요즘도 마오가 베이징 한복판의 마오기념관에서 밀랍 부패방지 처리가 된 채 하루에 한 번씩 지상으로 끌어올려져 인민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오가 혁명의 설계자와 관리자임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과학기술과 경제에 대한 무지를 결코 인정하지 않아 8억인의 중국을 사지로 몰아넣은 데 대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중국은 1인당 GDP 세계 100위권 밖의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고 4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386세대의 마오 코스프레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마오와 마오가 이끈 엉터리 혁명을 미화한 책 ‘8억인과의 대화’와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라는 가짜 지식인이 한국에서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영희의 저서를 읽으며 문화대혁명을 잘못 이해한 1980년대 운동권들이 지금 문재인 정권의 주축이 되어 있다. 이들은 마치 마오 코스프레라도 하듯이 극히 비도덕적인 생활 자세를 보여주면서도 결코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과오를 범하고도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마치 냉철한 사회주의자의 본령이라도 되듯이 행동하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내로남불’이라는 국민들의 비아냥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이 이런 비아냥에서 벗어나려면 10억 중국인들에게 경제 발전이라는 축복을 가져다준 ‘주자파(走資派)’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남긴,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회주의자의 면모부터 학습해야 할 것이다.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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