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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7호]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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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디플레이션 위기 한국 경제 일본과 다르다

홍익희  세종대 교수ㆍ‘월가 이야기’ 저자 

▲ 지난 10월 2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출석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올해 경제성장률이 당초 정부 전망치 2.4% 수준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photo 뉴시스
우리 경제 활력이 심각하게 둔화되고 있다. 경제성장률이 2017년 3.2%에서 2018년 2.7%로 둔화되어 2012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 경제성장률 둔화가 급격해지자 2019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기존 전망치에서 0.3%포인트 내린 2.6%로 하향조정했다. 우리 한국은행 역시 민간소비 증가세 둔화, 투자와 수출부진 현상을 지켜보며 지난 7월 올해 우리 경제성장률을 기존 2.5%에서 2.2%로 하향 조정했다.
   
   그런데 한국 경제의 하향세가 국제통화기금과 한국은행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빠지고 있다. 심지어 올해 2019년 1분기 경제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4%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지난 2분기 경제성장률(잠정치) 역시 전 분기 대비 1.0% 성장에 그쳐 6개월째 경기부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올해 2% 성장도 쉽지 않다는 관측이다. 장기불황 경고음이 울리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물가는 올 들어 7개월 연속 0%대 상승률에 그치다 지난 8월에는 드디어 마이너스로 진입했다. 물가가 0.038% 하락한 것이다. 지난 9월 소비자물가는 사상 처음 전년 동월 대비 하락(–0.4%)하는 충격적인 수치가 나왔다. 이른바 디플레이션이다. 경제학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디플레이션이 본격화되면 소비가 더욱 위축되어 ‘저물가→소비감소→더 저물가→더 소비감소’라는 악순환의 늪에 빠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성장과 저물가가 지속되다 보니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해지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를 알기 위해 당시의 일본 상황을 복기해 보기로 하자.
   
   
   한국전쟁 덕 톡톡히 본 일본
   
1945년 이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은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 구실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은 국가체제와 산업 양면에서 여러 모로 덕을 많이 보았다. 1951년 미국은 서둘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대일 강화조약)을 체결해 일본이 전쟁 책임을 거의 지지 않고 독립할 수 있게 해줬으며, 동시에 미·일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미군이 일본에 계속 주둔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후 미국은 일본의 경제 부흥을 한껏 지원했다. 미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전쟁 보급품과 군수품을 생산케 하여 일본 경제는 극적인 호황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전쟁특수가 일어났다. 게다가 미·일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은 일본의 군수산업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이것은 일본 내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미쳐 1950년대 일본은 연평균 10%를 웃도는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제조업 강국으로 탈바꿈하여 이후 195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9년 동안 연평균 실질 GDP 성장률이 9.3%에 달해 미국과 유럽의 성장률을 압도하며 발군의 도약을 이루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일본은 카메라, 오디오, TV 등을 앞세워 놀라운 속도로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일본은 1968년 서독을 제치고 세계 경제대국 2위 자리에 올랐다.
   
   1970년대 오일파동이 터지자 일본 자동차가 다른 나라 자동차보다 연비가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기름 많이 잡아먹는 미국 차 대신 일본의 작은 자동차들이 불티나게 팔려 도요타는 메이저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반면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미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미국은 깊은 경제 불황에 빠졌다. 1980년대 초 레이건 대통령은 수요를 자극하기 위해 개인소득세를 대폭 감면하는 레이거노믹스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어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이 대폭 감소했으며 무역적자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경기가 회복되자 물가도 다시 오르고 무역적자 규모 역시 다시 늘어났다.
   
   1980년대 중반 1차 대전 이후 70여년 동안 유지해온 미국의 경제패권이 일본의 경제력 때문에 위협받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자동차와 전자제품은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며 미국 상품을 시장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일본 상품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10%를 넘어섰다. 무역수지 흑자 역시 대규모로 늘어났다.
   
   제조업 강국 일본은 철강, 자동차뿐 아니라 당시 첨단산업인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미국보다 훨씬 나은 경쟁력을 보였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1985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 달러 정도였는데, 일본은 1만8000달러를 넘어섰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앞지른 것이다.
   
   
   40년 전 한국 GDP 日 기업 하나에도 못 미쳐
   
   또한 일본 정부는 저축장려정책을 펼쳐 이것이 높은 투자 증가율로 이어졌다. 상품 수출 못지않게 일본의 자본수출은 19세기 영국에 비견될 만큼 활발해졌다. 일본 은행들은 자산규모와 시장가치 면에서 세계 정상급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중후반 기준 세계 10대 기업 가운데 일본통신사 NTT가 1위를 차지했고 일본 은행 5개, 일본 증권회사 1개, 도쿄전력 등 무려 8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세계 50대 기업 가운데 3분의 2가 일본 기업들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국내총생산은 2023억달러로, NTT 시가총액의 70% 수준에 불과했다.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한 국가의 GDP가 일본의 한 개 기업 시가총액보다도 못하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자 유럽과 미국은 일본의 돌풍 앞에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을 배우자는 열풍이 불기 시작해 일본의 경영기술을 배우기 위한 프로그램이 유럽과 미국 내에서 유행했다. 기업체들은 물론 관공서까지 이 프로그램에 참가해 세미나를 활발히 열었다. 그 무렵 일본 상품이 진출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었다. 일본은 나라 자체가 무역회사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미국에선 일본을 ‘일본 주식회사’라고 불렀다.
   
   미국의 대일본 무역적자가 극심해지고 일본과 서독의 경제력이 더욱 강해져서 미국의 무역적자가 급속히 늘어났다. 달러화는 위기에 직면했다.
   
   
   비극의 씨앗 ‘자이테크’ 일석삼조 돈놀이
   
   욱일승천의 일본 기업 기세는 내부로부터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수출상품 품질경쟁력으로 승부를 보기보다는 손쉬운 돈벌이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자이테크(재테크)’라는 다양한 자산운용으로 엄청난 영업외 수익을 벌어들였다. 영업 외 수익이 더 크니 자연히 영업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자이테크 투기가 본격화된 것은 일본 기업들이 역외시장인 런던의 유러본드시장에 접근하면서부터였다. 역외시장이란 자국의 각종 규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자금을 운용하거나 조달할 수 있는 금융시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표적인 역외시장으로는 유로통화시장(Euro Currency Market)과 유로채권시장(Euro Bond Market)이 있다.
   
   1981년 일본 대장성은 금융자유화 조치의 하나로 일본 기업들이 유러본드시장에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신주인수권부사채란 채권을 산 사람이 일정 기간 경과 후 일정 가격으로 발행회사의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을 말한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자사 주가가 오를수록 BW 값이 따라 올랐기 때문에 아주 낮은 이자율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엔화 가치의 상승이 지속되는 점을 이용해 달러 표시 BW를 발행한 뒤 스왑시장에서 엔화 표시 채무로 바꾸어 엔화자금을 일본 내로 끌어들였다.
   
   통화스와프(Currency Swap)는 만기에 계약 당시 환율로 원금을 다시 반대 방향으로 매매하는 거래를 말한다. 이에 따라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 대신 가치가 올라가는 엔화를 조달해 만기 시점에 환차익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리고 통화스와프는 통화의 교환 외에 금리의 교환도 수반되어 양국 간의 금리 차이를 계산했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은 자금조달 과정에서 오히려 마이너스 이자를 지급했다. 곧 돈은 돈대로 빌리면서 오히려 이자를 받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조달한 자금을 곧바로 주식시장에 쏟아붓거나 연 8%를 보장하는 증권사 투금계정에 투자해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돈을 빌리면서 되레 이자까지 받고 또 빌린 돈을 예치하고 이자를 받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었다. 더구나 나중에 만기가 되면 엔화를 달러로 바꾸어 갚으니 환차익까지 남았다. 일석삼조였다.
   
   게다가 당시 미국은 두 자릿수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폴 볼커 연준 의장이 19%대의 고금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우대금리 6%보다 3배나 높았다. 일본 투자자 입장에서는 미국 채권에 투자하면 일본에서보다 300% 이상의 높은 투자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 기업가들 사이에선 돈 놓고 돈 먹는 일명 ‘자이테그(재테크)’ 열풍이 불었다.
   
   재테크 수익은 다시 주식시장과 부동산으로 환류되어 활황 장세를 이루었다. 이로써 주식 가격과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버블’이 시작된 것이다. 1987년 일본의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미국을 앞섰다. 땅값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도쿄 땅을 팔면 미국 땅 전체를 살 수 있었다. 1988년이 되자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은행은 모두 일본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버블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는 누구도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일본의 장기 불황은 이렇게 형성된 거품 붕괴에서 시작됐다.
   
   
▲ 이두원 통계청 물가동향과장이 지난 10월 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019년 9월 소비자물가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미국의 일본 견제, 플라자합의의 충격
   
   1980년대 들어 미국은 떠오르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계획을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미국은 그간 자유무역주의를 줄곧 주창해왔으나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진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또 일본과 유럽 주요국으로부터 자국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롭지만 공정하기도 한 무역(free but fair trade)’을 강조하며 보호무역주의를 택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83년 일본과 반도체 협정을 맺어 본격적인 기술규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 정부는 일본이 자국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 수억달러를 줬다며, 반(反)덤핑 혐의로 조사에 나섰고 미국 기업들은 특허 침해를 빌미로 공격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세계 최강의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메모리반도체 생산국이었으나 이로써 반도체 생산에 제동이 걸려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이병철 삼성회장은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미국의 대일 통상압력은 일본의 대미 통상전략을 수출 확대에 기초한 ‘중상주의적’ 통상정책에서 직접투자 혹은 기업 간 제휴강화로 선회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을 원천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1985년 플라자합의로 무자비한 엔화 절상 압력을 가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단초를 제공했다.
   
   1980년대 들어 미국은 쌍둥이 적자가 심각해지자 이를 환율로 해결하기 위해 우격다짐을 과시한다. 1985년 9월, 미국의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뉴욕 플라자호텔로 각국 재무장관을 소집했다. 베이커는 일본에 엔화가 너무 저평가되어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고 있으니 엔화 강세를 유도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베이커의 압박에 각국 재무장관들은 달러가치, 특히 엔화에 대한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플라자합의’다.
   
   이 합의로 미국은 엔화와 마르크화를 평가절상시킴으로써 달러를 대폭 평가절하하여 위기를 넘겼다.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스스로 평가절하할 방법이 없다. 곧 상대방 통화를 절상시켜야 달러의 평가절하를 달성할 수 있다. 1971년 닉슨쇼크 때 1달러 360엔에서 시작한 환율이 250엔으로 절상되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달러 본위의 변동환율제 아래서 인위적인 달러의 대폭 평가절하를 유도했다. 닉슨의 일방적인 금본위제 폐기 선언 뒤 14년 만의 일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각국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에 나선 다섯 달 뒤인 1986년 1월, 1달러당 엔화 환율이 259엔에서 150엔으로 떨어졌다. 단기간에 일본 엔화의 구매력은 40%까지 오르고, 달러로 표시되는 상품 가격은 그만큼 하락했다. 1987년까지 달러가치는 엔화 대비 42%, 마르크화 대비 38% 절하되었다. 1988년 1월, 127엔까지 하락했다. 2년여 사이에 엔화가치는 2배 가까이 올랐다. 이를 현재 상황에 비추어 생각하면 얼마나 큰 변화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의 비극은 여기에서 싹텄다.
   
   이로써 그동안 일본이 사들인 미국 국채의 실질가치는 반 토막이 났다. 곧 미국은 일본에 대한 부채를 반으로 탕감시킨 효과를 보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외환보유고 총액의 실질가치도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일본, 중국의 협공에 거덜나다
   
   게다가 일본은 중국 위안화에도 심하게 당했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1978년에 유명한 ‘백묘흑묘론’을 내세우며 중국의 개방화와 세계화를 선언했다. 백묘흑묘론이란 “고양이 색깔이 검든 희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뜻이다. 실사구시의 의미이다. 실사구시란 “실질적인 것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중국의 환율정책이 바로 그랬다.
   
   중국은 1980년 개방 초기에 이중환율제도를 실시했다. 수출기업에는 달러당 2.8위안, 외국인 직접투자나 관광객 그리고 민간에는 달러당 1.5위안으로 환전해주었다. 일종의 수출보조금제도 성격이었다.
   
   당시 암시장 환율 등 3개의 환율이 동시에 존재해 외국인들을 힘들게 했다. 그 뒤 이중환율제도가 수출 보조금 역할을 한다는 교역상대국들의 주장과 공정환율의 상승으로 1984년 이중환율제도를 통합하여 달러당 2.8위안으로 통일했다.
   
   그 뒤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국 지도부는 중국이 수출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위안화의 평가절하가 긴요하다고 보았다. 위안화의 가치가 쌀수록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강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술과 자본이 없는 후진국의 경제 발전이 대부분 그렇듯 중국은 값싼 인력을 무기로 세계의 공장을 자임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이 전략의 핵심요소가 환율이었다.
   
   위안화의 가치가 쌀수록 임금이 싸져 외국 기업의 중국 투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위안화는 1986년에 달러당 3.2위안, 1989년에는 4.7위안, 1990년 5.2위안으로 연속적으로 평가절하됐다. 이때부터 중국은 경상수지 흑자국으로 돌아섰다.
   
   이렇게 위안화는 계속 계단식으로 평가절하되다가 1994년 한꺼번에 무려 40%의 평가절하가 단행되었다. 달러당 8.8위안이 되었다. 1984년 달러당 2.8위안이 10년 만에 8.8위안이 되어 무려 300%나 평가절하된 것이었다. 제조업 경쟁력을 확보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덩샤오핑의 국가적 작전이었다.
   
   그 뒤 평가절하된 위안화는 전 세계에 ‘골디락스’를 선물했다. 골디락스란 ‘중국의 값싼 상품이 인플레이션을 상쇄시켜 세계 경제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알맞은 성장을 지탱시켜 주었다’는 뜻이다. 중국은 세계의 제조업을 낮은 가격으로 무력화시켰다. 중국 저가제품은 마치 전염병처럼 주변국의 제조업을 비롯한 1차산업을 무너뜨렸다. 특히 일본이 직격탄을 맞았다. 일본은 미국의 플라자합의보다 중국의 위안화 절하로 맞은 상처가 더 깊고 아팠다.
   
   1889년부터 1995년까지 위안화당 엔화 환율은 200엔에서 50엔으로 무려 4분의 1로 추락했다. 이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제조업 경쟁력이 높았던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공장들이 속속 중국으로 옮겨가 일본의 산업공동화가 본격화되었다.
   
   그 뒤 위안화가 너무 저평가되어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자 조금씩 절상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역풍이 불었다. 외국인 자본이 일본과 아시아의 신흥국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급속히 이동했다. 이런 유동성의 이동은 일본 경제에 치명타였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본이 일본을 빠져나갔다.
   
   뿐만 아니다. 이후 이러한 외국인 자본의 급속한 중국 이전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달러가 중국으로 빨려들어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 등 일부에서는 “아시아 금융위기는 위안화가 대폭 평가절하되어 발생했다”고 말했다. 동남아 외환위기에 이어 우리나라도 그 불똥을 피하지 못했다. 1997년 한국의 IMF 사태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자본 유입과 공장 이전 덕분에 중국은 2010년 경제 규모에서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요즘 많은 경제학자들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말하면서 한국도 비슷한 과정을 따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일본의 ‘자이테크’ 자산시장 버블과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받은 심한 환율 공격이다.
   
   
   잃어버린 30년은 한국과 본질 달라
   
   이렇듯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현재 우리나라의 저성장 위기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일본은 잘나가자 자이테크라는 돈놀이에 빠졌으며 여기에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심하게 환율 공격을 당해 빈사상태에 놓였다. 내부 돈놀이 버블과 외부의 환율 공격 충격이 오늘날 일본 경제를 망가트린 주범이다.
   
   반면 수출 중심의 우리 경제는 세계 경제가 하향 국면이라 같이 둔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좀 더 과감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여타국에 비해 아직 쓸 정책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우선 시중 유동성 확대를 위한 지준율 인하, 금리 인하, 양적완화 등의 통화정책이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시중 통화량이 확대되어도 소비자들과 기업들이 미래 경기를 비관적으로 보면 소비와 투자는 늘지 않는다.
   
   그럴 때 쓰는 게 재정정책이다. 정부가 정부사업에 미리 돈을 풀어 인위적으로 수요를 일으키는 것이다. 마중물 성격이 강하다. 아직 우리 정부 부채는 여타국에 비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장기불황의 기미가 보이는 초입에 과감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같이 써서 일단 방향을 돌려세워야 한다.
   
   게다가 이런 불황기에는 각종 규제를 대폭 풀어주거나 개선해야 한다. 규제는 역작용이 우려되는 호황기에는 풀어주기 힘들다. 정부는 산업 발전에 관한 한 표를 의식해 우회하지 말고 불황기에 정면 돌파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위기에 늘 강했다. 게다가 경제는 심리이기도 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우리 심리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 국민과 학계와 정부 그리고 기업이 자신감을 다시 찾아 지혜와 의지를 모아 이번 저성장과 디플레이션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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