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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피니언
[2580호]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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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스톡홀름 회담 걷어찬 ‘수령 외교’의 속셈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 원장·전 통일연구원장 

▲ 미·북 비핵화 실무협상 북측 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가운데)가 지난 10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 주재 북한대사관 앞에서 협상결렬선언 입장을 낭독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북한이 미·북 비핵화 실무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수령 외교’를 펼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복수였다. 북한에서 수령인 김 위원장은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신적인 존재다. 수령이 압박에 굴복하거나 흥정에 의해 밀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수령은 자신의 결단에 의해 통 큰 결정을 시혜적으로 내리고, 상대방은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대가를 황송하게 그 이상으로 내놓아야만 한다. 이것이 수령 외교다.
   
   김 위원장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핵실험 중단, 동창리 미사일 발사 중단, 억류된 미국인 석방을 시혜적으로 베풀었으니 당연히 미국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2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그 ‘시혜’에 감사하기는커녕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세계 최강 미국에 의한 수령상 손상은 김 위원장의 통치력, 리더십에 엄청난 타격을 주어 일반 주민들은 물론이고 권력 엘리트들의 충성심과 내부결속에 손상이 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김 위원장의 최우선 과제는 그들에게 다시 강력한 ‘수령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톡홀름에서 북한이 미국을 비난하며 자리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북한 주민들은 자신들의 수령을 다시 한번 거룩하게 바라볼 것이다.
   
   
   수령 리더십에 타격 입힌 하노이회담
   
   그러나 시간은 김 위원장 편이 아니다. 최근 다양한 유형의 미사일을 연거푸 발사하고, 급기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까지 선보인 것은 그만큼 그가 다급하다는 방증이다. 그 배경에는 대북 국제제재 속에서 가중되는 통치자금의 고갈과 구조적인 경제난이 도사리고 있다.
   
   앞으로 그가 취할 행태를 예견해보면 일단은 아쉬움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평화공세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경제적으로 성과는 크지 않았지만, 어찌되었건 국제사회에 정상국가의 정치지도자로 등장했다. 다시 대결노선으로 가기에는 국내적 부담이 크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음에도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3차 미·북 정상회담을 수용하고, 최근 스톡홀름에서 미·북 비핵화 실무회담을 받아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수령 외교를 펼치는 김 위원장이 미국의 압박과 요구에 밀려 먼저 타협안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의 카리스마를 확고히 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굴복하는 자세를 북한 주민이나 권력 엘리트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필요한 자금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타협안을 내고 싶어도 못 내는 또 다른 이유는 ‘수정주의자’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김 위원장도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 중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협상 파트너인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선거가 끝나면서 한숨을 돌리고 있었으나 곧 다가올 재선을 위해 다시 한번 북한과의 협상 문을 넓힐 준비를 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도 미국이 요구하는 로드맵은 따르지 않지만, 이미 자신이 폐쇄했거나 중단 중인 실험시설을 대상으로 사찰 등 국제사회의 요구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양보를 유도할 수 있다. 미·북 간 타협 가능성이 여기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김 위원장은 가중되는 경제난을 관광으로 견뎌내고자 하는 것 같다. 그 자신이 완전한 비핵화의 의지가 없는 한 대북제재의 대폭 해소는 어려울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타개책은 국제제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관광을 통해 외화를 확보하는 길이다. 사실 김 위원장이 남쪽 정부에 가장 바랐던 것은 이 부분이다. 미국을 설득해 대북 관광 금지를 해제하게 하고, ‘우리민족끼리’에 입각한 민족 간 교류의 일환으로 남쪽 주민들의 대북 관광을 재개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그 시발점으로 삼으려 했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이 노리는 핵심은 대규모 중국인 관광객의 유치다. 미·중 무역분쟁 속에서 중국이 대규모의 관광객을 북한에 보낼 수 없기에 먼저 한국이 그 물꼬를 터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은 그것을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대북 관광객 수를 늘려갈 수 있다. 지난 6월 시진핑 주석의 방북 이후 “중국 정부가 북한으로 가는 자국 관광객 수를 500만명으로 늘리라고 각 여행사에 지시했다”는 보도가 이를 말해준다.
   
   김 위원장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동해안에 관광단지를 개발했다. 대북 제재로 완공시키지는 못했지만 비록 완공된다고 하더라도 관광객은커녕 파리만 날릴 처지다. 수령의 정책 실패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김 위원장도 유념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북관계에서는 민족주체성이 결여되었다며 문 정부를 압박하고, 선전선동과 간헐적 교류를 활용해 남남갈등을 조장하면서 연방제적 통일 기반을 조성하려고 하고 있다.
   
   
   ‘머들링 스루’ 전략
   
   밖으로 드러나는 동북아 정세 변화의 핵심은 북핵 문제이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세력경쟁이 그 바탕을 이룬다. 김 위원장은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경쟁의 틈을 이용해 비핵화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과 지원으로 경제난을 그럭저럭 헤쳐가려는 ‘머들링 스루(Muddling Through)’를 당면 목표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향후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핵군축을 겨뤄볼 시기를 준비할 심산이다.
   
   남·북·미·중 모두 기존정책을 변화시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상황을 만들어가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미 관계를 굳건히 하여 양국의 기본 가치들인 자유와 민주, 인권과 복지가 북한에 실현되게 하기 위해서는 미·북 간의 어떠한 합의에도 그 전제조건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여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해야 한다.
   
   한·중 간에는 비핵화가 실패해 북한이 핵보유국이 될 경우 한국보다 중국에 더 큰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양국 간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핵을 가진 북한이 중국에 절대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 상황에서 한·미, 경우에 따라서는 한·미·일 간 군사협력이 강화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시켜야 한다. 또 중국인의 대규모 북한 관광이 북핵 문제 해결을 더디게 한다는 사실에 대해 중국이 경각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대북 국제제재의 고삐를 쥐고 있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인 러시아·영국·프랑스와의 긴밀한 협력도 기본이다. 북한의 파기로 형해화되었지만 한국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견실히 지킬 것을 확약하고 북한 비핵화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가장 원하는 국가가 한국과 일본이다. 문재인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에 가장 필요한 일본과의 협력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을 경우, 과연 문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미·북 회담에만 북핵 문제 해결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의존한다면, 자칫 문 정부도 CVID가 아니라 북핵 동결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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