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미래사)의 일본군 위안부 서술에 대한 필자의 비판(주간조선 2573호)을 반박하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글(주간조선 2579호)은 반갑고도 실망스러웠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필자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기 때문이다. 이 교수의 글은 먼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 ‘귀향(鬼鄕)’을 소개했다. 그리고 나서 필자의 비판을 다른 언론매체에 실린 일본군 위안부 연구자의 비판과 함께 뭉뚱그려 다루었다. 그러다 보니 필자가 제기한 쟁점들에 대한 반박에 충분한 분량이 할애되지 않았고, 따라서 깊이 있는 답변과 반론이 이뤄지지 못했다.

모든 논쟁은 자칫하면 인상비평이나 인신공격으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필자는 비판의 초점을 분명히 했다.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를 규정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이영훈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 서술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교수는 필자의 비평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고” “흥분하고 있다”고 했다. 논리적인 비판을 감정적인 공격으로 돌려서 이해하는 것은 차분하고 이성적인 논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필자가 지난번 글에서 힘을 기울였던 두 개의 논점 가운데 하나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 제국의 위안부’였는가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영훈 교수에게 그런 주장이 보편명제(‘모든 ~는 ~다’)로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일부 조선인 위안부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면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돼 동조하는 현상)’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는) 성(性)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일본인)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는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필자의 질문과 지적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이 논점이 갖고 있는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몹시 아쉬운 일이다.

따라서 이영훈 교수의 글은 필자의 비판에 대한 본격적인 반박이라기보다 그 비판을 계기로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번 되풀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가 당초 제기했던 논점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하지만 이번 글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반일 종족주의’ 전반을 아우르는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주장도 들어 있어 새로운 논점을 던진다. 그러므로 먼저 필자가 지난번 제기했던 논점에 대해 이 교수가 답변한 부분을 검토하고, 이어 새롭게 떠오른 논점을 짚어보기로 한다.

거액을 가족이 미리 받았는데 다른 선택 가능했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가 지적했던 또 하나의 논점은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는가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일본군의 의뢰를 받은 위안부 모집책의 감언이설에 속아 고국을 떠났고 이역만리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필자의 비판이 “위안부로의 전락 과정과 이후 전개된 그들의 의지적 삶에 관한, 다시 말해 상이한 국면에 관한 서술을 한데 묶어서 비판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즉 “그들은 비록 속아서 왔지만 전차금(前借金)을 상환하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열심히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이영훈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삶을 구분해서 이해한다. 즉 그들의 상당 부분이 속아서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위안부가 된 후에는 주어진 제도와 환경에 적응하면서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의지적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위안부가 되는 과정보다 위안부가 된 이후의 삶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속아서 갔으면 속절없이 노예로 살다가 소모되어야 마땅했던가”라고 필자를 꾸짖는다. 얼핏 위안부들의 주체성을 높이 평가하는 듯한 이런 주장은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 타당한가.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들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버마(현 미얀마)와 싱가포르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1942년 8월부터 1944년 말까지 조바(관리인)로 일했던 박치근이라는 사람이 쓴 일기이다. ‘반일 종족주의’에도 소개됐고, 필자도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던 이 자료는 2013년 8월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이숲)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이 책에 실린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해제는 1942년 7월 부산항을 떠나 40일 뒤 버마 랑군에 도착한 ‘제4차 위안단’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과 출진(出陣), 위안소의 분포와 유형, 위안소 경영과 위안부들의 생활을 분석했다. 머릿속에서 관념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차 자료에 대한 엄밀한 독해를 바탕으로 쓰인 이 해제를 통해 드러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이영훈 교수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

먼저 안병직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에 대해 “위안부들을 모집할 미끼가 필요했는데 그 중요한 수단이 전차금과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이 아니었던가 한다” “위안부 모집에 있어서는 전차금에 의한 인신매매와 더불어 ‘유괴나 다름없는’ 사기의 수법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러한 위안부의 동원 방법을 ‘광의의 강제동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위안부가 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전차금을 받은 경우 일반적으로 그 의무 취업연한은 2년이었다” “전지(戰地)인 버마에서는 결혼하기 위하여 폐업을 한 위안부가 (일본군의 명령으로) 강제로 재취업되는 사례가 있었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되는 과정은 물론, 된 뒤에도 선택의 자유가 사실상 제한돼 있었다는 지적이다.

일본군 위안부들이 위안소에 감금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노예(sex slave)’로 볼 수 없다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도 안병직 교수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안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의 폐업 허가에 있어 전차금을 변제했을 경우에도 폐업이 어려웠고, 위안소가 군(軍)편제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돼 군부대와 같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성적 노예 상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안병직 교수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징용, 징병 및 근로정신대와 같은 전시(戰時)동원 체제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잇달아 일으킨 일본이 본국은 물론 식민지에서 인력을 강제동원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도 발생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일본군이 의뢰인 파견, 행정당국과 군대에의 협조 요청, 위안소 업자에 대한 모집 의뢰, 위안부 수송과 배치, 위안소 운영과 이동을 주도했고 전차금도 일부 군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결국 일본 군부와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 자체만 미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시대상황과 연결시켜 거시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태도야말로 올바른 역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와 필자의 글에 대한 반박을 통해 거듭 ‘일본군 위안부는 일제 초기인 1916년 한국에 이식된 공창제(公娼制)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재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위안소 운영에 일본군을 위시한 공권력이 개입한 정도와 (공창제에서) 유곽 운영에 경찰을 위시한 공권력이 개입한 정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양자의 영업구조는 동질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창제에서 경찰이 나서 매춘부를 모집하고 이동수단을 제공하면서 끌고 다녔는가. 매춘부 모집 비용을 내고, 유곽의 운영에 개입했는가. 이 교수의 주장은 양자의 피상적인 형식의 유사성을 들어 근본적인 본질의 차이를 가리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는 1944년 8월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이 패퇴한 뒤 미군에 체포된 조선인 위안부를 심문한 기록에 나타난 위안부들의 삶을 필자가 주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심문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생활과 노동 상황은 좋았다며 “위안부의 대부분은 1년 안에 전차금을 상환하고 이후 추가로 노동하고 저축한 다음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위안소 제도가 그런 권리와 기회를 허용하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로 그 심문 기록에는 제도의 이면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 드러난다. “그녀들이 체결한 계약은 가족의 부채 변제에 충당하기 위한 전차금에 따라서 6개월에서 1년에 걸쳐 그녀들을 군(軍)의 규칙과 포주들에게 묶어놓았다.” “그녀들은 자기의 직업이 싫다고 말하고 있으며, 자기의 직업이나 가족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전쟁 상황 때문에 어느 누구도 지금껏 위안소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가족이 받은 거액의 선금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일본군 위안부들의 피나는 생활을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의지적 삶’으로 일반화해서 묘사하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강제징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부도 제도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는 현실을 우선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1944년 8월 버마 미치나에서 일본군이 패퇴한 뒤 미군 등 연합군에 포로가 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이 연합군의 심문을 받기 위해 한데 수용돼 있다.
1944년 8월 버마 미치나에서 일본군이 패퇴한 뒤 미군 등 연합군에 포로가 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이 연합군의 심문을 받기 위해 한데 수용돼 있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

이영훈 교수는 필자의 비판에 대한 반박을 영화 ‘귀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감금되고 강간당하고 학살당한 것으로 그린 영화를 만들어낸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필자 등을 향해 “위안부 문제를 이끌어온, 또는 그것을 통해 형성된, 한국 현대문명에 대한 성찰을 결여하고 있다” “우리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에 관한 문제 제기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고 질타했다.

필자는 이영훈 교수의 그 같은 문제의식을 이해한다. 그리고 필자도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극성을 부리는 ‘종족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영화 ‘귀향’에 관한 이 교수의 서술은 필자의 비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조선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노예사냥 하듯이 끌고 갔다”는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난 이후 책임 있는 연구자나 언론인은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설’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 교수의 논쟁 상대가 그런 작품을 만든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주장을 펴지 않는 언론인이나 연구자에게 “영화가 진실인가 허구인가”라고 다그치는 것은 전형적인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상대방의 입장을 엉뚱하게 만들어놓고 공격하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필자 또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우상과 신화를 허물고 그 자리를 다른 우상과 신화로 대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우상과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무지, 무능, 상업주의, 정치적 목적 등 여러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나왔든 똑같은 방식으로 맞서서는 안 된다. 아무리 주관적으로는 진심과 충정이 담겼다고 해도 그런 방식이 갖는 위험성은 이미 리영희 교수의 사례를 통해 너무나도 뚜렷하게 입증된 바 있다. 필자가 보기에 지금 이영훈 교수는 리영희 교수가 걸었던 길을 반대편에서 따라가고 있다. ‘좌파의 리영희’가 끼친 영향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곤욕을 치르고 있는 우리 사회는 ‘우파의 리영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영훈 교수는 이번 글에서도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또 한 번 드러냈다. “원래 민족주의자에겐 개인과 그 내면의 주체는 인정되지 않는다. 개인은 민족의 부속품일 뿐이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 민족주의가 개인을 민족의 부속품으로 삼았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릴 수 없다. 우리 민족이 가미카제 특공대나 인간어뢰 가이텐 같은 인간병기(兵器)를 만든 적이 있었던가. 혹시 안중근이나 윤봉길, 이봉창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김일성 민족주의’를 한국 민족주의의 대표로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필자가 공부를 통해서 알고 있는 한국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통해 ‘개인’을 보호하고 ‘그 내면의 주체’를 조금이라도 더 보장하려고 노력했다. 신채호의 민족주의, 안창호의 민족주의, 이승만의 민족주의, 김구의 민족주의가 그랬다.

이영훈 교수는 주간조선 2575호에서 필자의 독도 관련 비판에 대한 반박을 통해 ‘우파 민족주의’ 입장에서 ‘우파 세계주의’를 비판한다는 필자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반일 종족주의’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한국인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종족주의를 비판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이런 진술은 그가 좌·우파의 구분보다 민족주의(종족주의)와 세계주의의 구분이 더 본질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이런 이해는 이영훈 교수가 1876년 개항 이후 150년간의 한국 근대화 과정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9세기 말의 ‘자주’ ‘개화’, 20세기 전반의 ‘독립’, 20세기 후반의 ‘조국 근대화’ ‘민족중흥’으로 이어져 이제 21세기 ‘선진통일’의 과제를 앞두고 있는 한민족의 열망은 ‘자유인’ ‘세계인’이란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다. 한국 민족주의를 ‘더러운 종족주의’와 동일시하는 이 교수에게서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다시 확인한다. 이는 젊은 시절 마르크시즘을 신봉하는 좌파 민족주의자에서 1980년대 이후 경제성장주의를 추구하는 우파 세계주의자로 전향한 지적 궤적의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고 발전시켜온 주류 우파 민족주의에서 비껴 서 있는 것이다. 그는 한민족의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몇 세대 동안 피와 땀을 바친 우리 선조들의 고투(苦鬪)를 공감하지 못한다. 이 교수가 대한민국 수립과 발전을 이끈 이승만과 박정희를 숭모한다고 말하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그들의 생애와 정신세계를 진정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필자는 처음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부분을 읽을 때부터 몹시 궁금한 점이 있었다. 이영훈 교수와 필자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번역·출간은 이 교수가 소장을 역임했고 지금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작품이다. 그는 경기도 파주의 한 사설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자료의 입수와 공동 연구에 깊숙이 참여했다. 따라서 그 내용을 해제자인 안병직 교수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공식 간행물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펴는 것일까.

‘학자 이영훈’과 ‘사회운동가 이영훈’의 내부 충돌

이영훈 교수의 이번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그런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동원’이며 일본이 책임져야 할 ‘국가범죄’라는 주장에 ‘모순과 혼란’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아둔해서 그런가라고 자문했다. 하지만 이 교수가 느끼는 모순과 혼란은 ‘학자 이영훈’과 ‘사회운동가 이영훈’의 내부 충돌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주간조선 2576호에서 이 교수의 독도 반박에 대한 재반론을 통해 그의 독도 서술이 안고 있는 모순을 지적한 바 있다. 그것도 역시 동일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학자 이영훈’의 냉철하고 이성적인 역사 이해를 ‘사회운동가 이영훈’의 열정과 사명감이 자꾸 방해하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는 서울대 정년 퇴임 후 이승만학당 설립과 ‘반일 종족주의’ 출간으로 사회운동가의 길에 들어섰다. 본인도 그렇게 자임하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반일 종족주의’에 나타난 일면성과 과격성은 이해할 수도 있다. 무릇 모든 정치나 사회운동은 중요한 사회현상의 다양한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강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국민의 역사인식이나 영토 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제의 경우 전문가나 언론에 의해 ‘진지한 학술적 논의와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래야 ‘파사(破邪)’의 열정이 ‘현정(顯正)’의 올바른 길을 흩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앞으로도 필요성이 제기될 경우 그런 작업은 계속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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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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