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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1호] 201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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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세상읽기]양날의 과학수사, 숫자도 거짓말할 수 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사건 현장에서 DNA를 채취하는 과학수사 요원들. photo 뉴시스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함께 무려 33년이나 묵은 숙제를 속시원하게 해결했다. DNA 분석이라는 최첨단 과학수사 기법으로 미궁에 빠져 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아낸 것이다. 경찰이 희대의 연쇄살인 사건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4만여명의 지문을 확인하고, 2만여명의 용의자를 수사하는 일에 연인원 200만명의 경찰을 투입했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 수사력은 어설펐다. 여러 차례 용의선상에 올랐던 진범도 번번이 놓쳐버렸다. 결국 2006년에는 수사를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현장에서 수거했던 증거물들을 오염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해둔 덕분에 뜻밖의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진범을 찾아준 ‘생명의 책’
   
   DNA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에 들어있는 ‘생명의 책’이다. 삼신할미가 점지해준다고 믿었던 유전 정보가 사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DNA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낸 것은 1953년이었다. 사람의 DNA는 46조각으로 잘라져서 세포의 핵 속에 들어있다. 모두 이어붙이면 길이가 무려 1.8m나 되는 거대분자인 DNA에는 A, T, G, C로 표시되는 30억개의 암호가 숨겨져 있다.
   
   DNA에 담겨 있는 암호를 읽어내는 일은 만만치 않다. 1990년 미국 정부가 앞장서서 수행했던 ‘인간유전체프로젝트’가 사람의 DNA에 담겨 있는 유전 암호를 모두 읽어내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전 세계의 생명과학자들이 힘을 모아 13년간 노력한 덕분에 계획보다 2년 앞당겨 2003년에 암호 해독을 완료했다. 무려 50억달러의 연구비가 투입되었다.
   
   다행히 그동안의 놀라운 기술 발달로 요즘은 1000달러만 내면 개인의 DNA 암호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술도 과학수사에 활용하기에는 여전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부담스럽다.
   
   과학수사에서는 DNA에 담겨 있는 유전 암호에서 극히 일부만 활용한다. 분석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인 전략이다.
   
   증거물에서 채취한 DNA를 ‘제한효소’라고 부르는 ‘시약’들을 사용해서 수많은 조각으로 잘라내는 것이 시작이다. 그중 가장 변별력이 높은 몇 개의 짧은 조각(‘DNA 마커’)들만 선택해서 암호를 읽어낸다.
   
   분석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중합효소연쇄반응(PCR)’을 이용해서 마커의 양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DNA 분석에 사용하는 제한효소와 중합효소는 모두 자연에 존재하는 미생물에서 채취한 신비의 물질이다.
   
   DNA 분석의 정확도는 실제 분석에 사용하는 마커의 수에 따라 높아진다. 충분히 많은 마커를 사용하면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서로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DNA 분석은 범인만 특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친족관계를 밝혀주기도 한다. 그래서 전사자(戰死者)의 신원이나 친자관계 확인에도 DNA 분석을 사용한다. 그러나 DNA 분석으로 미래에 발생할 질병을 예측해준다는 광고는 섣불리 믿을 것이 아니다. 과학을 앞세워 마음 약한 소비자의 주머니를 노린 고약한 마케팅 전략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세포의 핵이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에 들어있는 DNA에 과학수사 기법을 적용하면 모계의 혈통도 밝혀낼 수 있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서도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남부의 칼라하리에서 처음 출현했고, 13만년 전 지구 자전축이 바뀌면서 시작된 기후변화로 전 세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DNA 분석이 아니라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과학수사도 만능은 아니다
   
   DNA 분석은 최신 과학수사 기법이다. 국과수에서 ‘유전자 분석실’을 처음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91년이었다. 역사는 짧지만 국과수가 그동안 이룩한 성과는 대단했다. 2006년에 발생한 서래마을의 영아 살해유기 사건이 가장 널리 알려진 성공 사례다. 프랑스 경찰은 국과수의 DNA 분석 실력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사협조를 거부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칫솔과 병원에 남아 있는 범인의 과거 조직 검사 샘플에서 채취한 DNA의 분석 결과는 프랑스 경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과학수사가 모두 만능일 수는 없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수사에도 과학수사가 동원됐다.
   
   그런데 1988년 9월에 발생한 8차 사건에 대한 과학수사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가장 초보적인 과학수사 기법인 혈액형 판정에도 오류가 있었다.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체모(體毛)에 대한 원소분석도 문제였다. 중성자 빔을 이용한 원소분석은 당시 국과수가 도입했던 새로운 과학수사 기법이었다. 체모에서 타이타늄이라는 중금속을 검출한 원소분석은 정확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소분석 결과를 근거로 농기계 수리공을 범인으로 특정한 것은 섣부른 추론이었다. 결국 무고한 용의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치안산업이 나아가야 할 길
   
   현대 과학기술의 위력은 대단하다. 현대 과학을 근거로 하는 과학수사의 위력도 대단하다. 30여년 전에 수거한 증거물에서 채취한 몇 개의 DNA로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 정도다. 이제 첨단 정보통신(IT) 기술까지 접목되면 과학수사의 위력은 더욱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다.
   
   과학수사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투자와 노력이 꼭 필요하다. 범인들에게는 나쁜 소식이겠지만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전하고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과학수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선 과학수사에도 한계가 있다. 과학적으로 확인한 ‘숫자’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분석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분석 결과를 잘못 적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과학수사는 신중하고, 정교하게 수행되어야만 하고, 결과의 임의적 확대 해석은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치안과학과 치안산업의 육성도 윤리적이어야 한다. 과학수사의 새로운 기법을 연구하고, 기자재를 생산하고, 보급하는 일은 확실하게 민간에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 경찰청이 앞장서서 육성하는 치안과학과 치안산업은 머지않아 ‘치안 마피아’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이미 정립된 국가연구개발 사업과 산업지원 정책을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에게 윤리적으로 당당한 과학수사를 발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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