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죽음의 공포와 마주한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끔찍한 경험은 아예 겪지 않는 것이 좋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맞닥뜨릴 때도 있는 법입니다. 저의 경우는 1997년 7월 캄보디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앙코르와트 취재를 갔다가 훈센 현 총리가 일으킨 유혈 쿠데타 때문에 시엠레아프에 며칠간 발이 묶인 적이 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프놈펜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 고달픈 여정 막판에 저를 겨누는 총부리와 마주했습니다. 보트를 타고 바다 같은 토렌샵 호수를 건넌 후 프놈펜 외곽에서 차를 대절해 시내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시 외곽 검문소 2개는 무사히 지나쳤는데 마지막 검문소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검문소 장교가 아무 신분증도 없는 반바지 차림의 저를 끌고 숲으로 들어가 권총을 겨눴습니다. 당초 당일치기로 앙코르와트를 갔다올 계획이어서 짐과 여권 모두 프놈펜 호텔에 두고 온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저를 겨누는 검은 총부리와 방아쇠에 놓인 손가락을 보면서 짧은 순간 ‘이제 죽는다’는 구체적인 공포감이 머리에 기둥처럼 내려박혔습니다. 이윽고 혼란스러운 프놈펜 외곽 수풀에 시신이 버려지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란 데 생각이 미치자 집에 두고 온 세 살짜리 딸아이 얼굴부터 떠오르더군요. 그 직후 ‘죽기 싫다’는 강렬한 저항감이 일었습니다.

신발 속에 숨겨뒀던 100달러짜리 지폐를 주면서 싹싹 빈 덕분인지 악몽 같은 순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 강렬했던 공포는 지금도 가끔씩 떠올려집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서 든 생각은 죽음의 공포가 ‘기다림’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 견뎌야 하는 시간이 공포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겪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사형수들의 공포가 대표적일 겁니다.

22년 전의 공포를 불러낸 것은 최근 벌어진 20대 북한 선원 두 명의 북송(北送)이었습니다. 재갈을 물고 안대가 씌워져 다시 북으로 간 두 청년은 앞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야 할 겁니다. 이번주 하주희 기자가 쓴 관련 기사를 보면 두 사람의 처형까지는 길어야 세 달이라는 것이 탈북민들의 공통된 얘기입니다. 그 세 달이 이 청년들에게는 실제 죽음보다 더 큰 공포일 겁니다.

더욱이 그들의 집단살인 혐의도 지금으로서는 의혹투성이입니다. 그들이 탔던 배를 소독했던 정부 관계자는 저희 기자에게 분명히 “배 안에 혈흔이 없었다”고 얘기했습니다. 12명을 살해한 현장으로는 쉽사리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번 사태는 간단치 않은 후폭풍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외국의 인권단체들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연이어 나오는 가운데 마감날에는 우리의 대한변협도 관련 성명서를 냈더군요. 변협은 “북한 주민은 우리 헌법 제3조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되며, 국가는 헌법 제10조가 규정하듯이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며 “이번 강제북송은 법치국가와 민주국가임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인권 보호 상황을 다시금 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 진보 진영은 오랜 기간 인권이라는 가치를 자양분 삼아 성장해왔습니다. 진보 진영을 키워온 인류 공통의 그 가치가 이번에는 거꾸로 진보 진영을 발가벗기고 있습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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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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