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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피니언
[2585호] 201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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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인생극장]IMF 전야, 정치자금이 여권으로 흘렀다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jmedia21@naver.com

▲ 1997년 1월 30일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왼쪽 두 번째)이 경희대병원을 찾은 가운데 그룹 홍보담당이었던 양정철 민주연구원장(맨 왼쪽)이 정 회장을 수행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어찌 큰 나라의 군주로서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경솔하게 다루겠는가? 경솔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하면 군주의 도리를 잃게 된다. - 노자 ‘도덕경’
   
   
   돌이켜보면 1993년 ‘문민정부’ 김영삼(YS) 정권의 출발은 좋았다. 하나회 척결, 공직자 재산공개 등 개혁 정책으로 지지율이 90%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국정 운영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선 참패를 했다.
   
   세간의 비판 핵심에는 YS의 차남 김현철이 있었다. 사실상 ‘2인자’로서 사조직을 운영하며 국정에 개입하고 인사 농단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그해(1995) 여름 휴가차 서귀포에 머물고 있던 나는 김씨가 회고록을 냈다는 신문광고를 보았다. ‘현직 대통령의 36세 아들이 무슨 회고록을….’
   
   바로 책방으로 달려가 읽어보니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갈망이 진하게 느껴졌다. 한국 현대사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 탄생을 꿈꾸는 것일까? 나는 향후 김 대통령의 집권 후반부가 온전치 못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바로 김현철씨 취재에 들어갔다. 우선 안기부(현 국정원)에 파견돼 있던 홍준표 검사(한나라당 대표 역임)를 만났다. 그는 YS 출범 이후 벌어진 사정작업 때 ‘6공의 황태자’ 박철언, 현직 고검장 이건개씨 등 거물들을 구속시켜 ‘모래시계 검사’로 불리며 한창 주가를 높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세종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마자 대뜸 YS정권에 대한 비판부터 퍼부어댔다.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다른 손님들까지 ‘싸움 났나’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YS가 집권 초 구속시켰던 정치인들을 바로 얼마 전인 1995년 8·15 특사로 사면 복권시킨 사실을 통렬히 비난했다. 이와 함께 YS 차남 현철씨가 동창관계로 얽힌 사업가들과 어울리며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K고 동문인 W그룹 C회장, H그룹 P회장과, K대 동문인 J그룹 J회장, K그룹 후계자인 L씨 등등….(이들 기업 대부분이 2년 뒤 IMF 사태를 전후해 도산했다.)
   
   홍 검사는 특히 현철씨가 한보그룹과 가깝다고 전했다. 한보그룹은 불과 4년 전인 1991년 노태우 정권 때 서울 강남구 수서·대치지역 특혜개발비리 사건의 주역으로 회장 정태수씨가 구속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는데 다시 재기한 상태였다. 그리고 사면 복권자 명단에 정 회장을 비롯해 수서비리 관련자들의 이름도 끼여 있었다.
   
   며칠 후 여의도 주변을 취재한 결과 한보그룹이 YS정권의 핵심인 PK 출신 민주계 세력들에 엄청난 정치자금을 쏟아붓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로 민주계 좌장 S의원 수하의 직원들이 운영하는 강남구 양재동 ‘○○컨설팅사’를 찾아가보니 인건비와 사무실 유지비는 물론 사업자금까지 한보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근처 소줏집에서 잔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이들은 S의원 비서 진영의 막내들이었으며 이들보다 고참은 한보그룹에서 상무란 직함을 받고 활동하고 있었다. 직원들에 따르면 한보그룹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천연자원 개발 및 수입 사업을 이 컨설팅사와 합작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외형상일 뿐 한보그룹은 이 컨설팅 회사를 매개로 민주계 S의원을 비롯 정치권 실세들에게 정치자금을 대주고, 반대급부로 사업에 필요한 ‘힘’을 얻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당시 민주계 세력들의 힘은 절정기에 달했고, 한보도 하루가 다르게 커 가고 있던 터라 더 이상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취재가 무르익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흥미로운 것은 현 문재인 정부의 최고 실세로 꼽히는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당시 정태수 회장의 홍보비서로 일했다는 점이다. 한보와 김현철의 밀착설이 나돌던 1995년부터 1997년 한보가 도산할 때까지 2년간 정 회장을 수행하며 홍보업무를 맡았었다. 아마도 그는 한보와 정치권 유착의 내막을 상당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4000억원’을 폭로했다. 당초 노태우 전 대통령과 ‘3당 합당’을 통해 권좌에 오른 YS는 이 문제가 나오자,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정면 돌파로 나갔다. 노씨는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에 대해서도 전면 수사를 지시하는 한편, 12·12와 5·18을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규정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돌입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외교 등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사람들은 손을 놓고 죄수복을 입은 두 전직 대통령 재판을 지켜봤다. 이 와중에 한보그룹 등은 거침없이 질주했다. 한국 경제는 이런 악성종양으로 깊숙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1996년 봄 전두환 전 대통령 수사를 담당한 서울지검 형사 3부 김상희 부장검사(법무부 차관 역임)의 전화가 왔다. 검찰 출입기자 시절부터 알고 신뢰하는 사이였다.
   
   “함 형 좀 봅시다. 보안 유지를 해주시고 ○○호텔로 와주시죠.”
   
   가보니 전씨 수사 담당인 채동욱 검사(검찰총장 역임)와 함께 있었다.
   
   “곧 1심 구형에 들어갈 텐데 함 형이 논고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때 기자와 검사는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였다. 상식, 공익, 공동체, 국가의식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난감했다. 솔직히 역사에 기록될 이런 재판의 논고문을 쓸 필력도, 자신도 없었다. 또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과연 YS가 주도하는 게 옳은 일인가 여부였다. 바로 그가 3당 합당을 통해 전·노와 손잡고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 아닌가. 당시 우리 풍토에서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YS, DJ, JP를 포함, 아무도 없었다. 조만간 YS에게도 부메랑이 돌아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국가원수에 대한 사법처리가 된다면 앞으로 전직 대통령의 감옥행은 관행화될 것이며, 가뜩이나 취약한 우리 현대사의 정통성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지금 그대로 됐다.)
   
   당시 대다수 일반 여론은 “대통령이라도 정의에 반하는 일을 했다면 감옥에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책임지는 위정자는 그 너머를 헤아릴 줄 아는 안목과 지혜를 지녀야 한다. 며칠 생각 끝에 나는 “논고문을 쓸 실력이 못 된다”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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