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12월 18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발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12월 18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발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대한민국의 정체(政體)는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나라다. 민주공화국은 삼권분립을 전제로 성립한다. 삼권분립이 훼손되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흔들려 국가권력의 집중과 남용이라는 불행한 결과가 발생한다. 삼권분립은 국가권력의 전횡(專橫)을 방지하여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삼권분립 이론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9)에서 정립되었고, 1787년 미국연방헌법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1789년 프랑스인권선언은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아니하고 권력의 분립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모두 헌법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16조)라고 하여 권력분립을 시민헌법의 한 요소로 규정하였다. 삼권분립은 공화정 3년 차인 1791년의 프랑스헌법에서도 구현되었고, 이후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보편화되었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현행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40조),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66조 4항),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101조) 속한다고 규정하여 삼권분립 원칙을 명문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권분립 원칙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제4공화국(유신헌법)은 삼권분립의 정신을 무시하고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막강한 국가긴급권을 가졌고 그 권한 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적 장치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국회와 법원에 대해 우월적 지위에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입법부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사실상 지명하는 유신정우회 사람들로 채워졌고, 법원은 사법부(司法府)가 아니라 사법부(司法部)로 전락하였다. 요컨대 현재의 삼권분립주의는 지난한 투쟁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벌어지는 삼권분립 훼손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민주화세력을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는 도대체 왜 반(反)헌법적 행위를 감행하고 있는 것일까.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을 지낸 정세균 의원의 국무총리 지명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인선이었다. 이는 단순히 국가의전서열 2위에서 5위로 내려가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헌법을 보면 국회(제3장)가 정부(제4장)보다 먼저 나온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정신에 입각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로 구성되는 국회가 정부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할 때 국회의장이 상단의 의장석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헌법정신의 공간적 표현이다. 반면 헌법 제86조는 국무총리를 대통령의 보좌역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대정부질문을 할 때 국무총리와 장관이 낮은 위치에서 답변하는 것이다.

삼권분립이 유린된 참혹했던 유신시절에도 이런 인선은 없었다. 우리 헌정사에서 국회의장과 국무총리 모두를 역임한 인물은 백두진·정일권 두 사람이 있었으나, 모두 국무총리를 거친 후 국회의장으로 갔다. 정세균은 “국회의장 출신으로 국무총리를 맡는 게 적절한지 고민했으나, 국민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런 걸 따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자기 합리화를 위한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정치인들은 자신이 국민을 위해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민주화가 정착된 김영삼 정부 이래 이만섭 의장을 제외한 모든 국회의장이 의장직을 마지막으로 정계은퇴를 하고 국가원로가 되었다. 정세균이 헌법정신과 정치관행을 어기면서까지 국민을 위해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문재인 정권의 삼권분립 훼손은 이뿐만이 아니다. 공수처 신설 역시 정치와 사법의 분리라는 권력분립 원칙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대륙법 국가 중에서 검찰이 법무부의 외청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검찰총장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나 총리가 임명하는 나라도 이 두 나라뿐이다. 대륙법의 본고장인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검찰은 법원에 설치되어 있다. 똑같은 사법고시를 통과해놓고 판사는 사법부에서, 검사는 행정부에서 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하필 일본의 정부조직 체계를 따랐는지, 그 어느 누구도 명쾌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수사와 기소라는 검찰의 업무가 사법의 영역인지 행정의 영역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이 점과 관련, 우리는 분명 왜곡된 조직체계를 갖고 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대통령 직할의 공수처를 신설하고 검찰에 우선하는 수사권을 부여하는 것은 가뜩이나 왜곡된 시스템을 더욱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수사와 기소라는 사법작용이 정치권력의 직접적 영향권에 놓이게 되면, 법의 지배라는 공화국의 대원칙은 근본부터 흔들리게 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헌법 제11조)는 ‘유권무죄(有權無罪) 무권유죄(無權有罪)’라는 현실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수처를 정치보복의 합법적 도구로 악용하는 폐단이 되풀이될 것이다. 정말이지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위험지대로 끌고 가고 있다.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전임 대법원장을 구속시키기 위해 검사 출신 영장심사 판사를 추가로 임명한 것이나, 국가 간 조약에서 합의된 사항을 뒤집는 판결을 내린 것 역시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이 크게 흔들린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외관상으로는 사법부가 외교라는 행정부의 고유권한을 침해한 것이었지만, 내실은 제왕적 대통령의 주문을 성실히 수행한 ‘하명(下命) 재판’이었다. 얼마 전 한국공법학회는 ‘사법의 독립과 민주화를 향한 공법적 과제’라는 법원행정처 연구 용역 보고서에서 법관 투표를 통해 대법원장을 선출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을 하였는데, 삼권분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의견이라 사료된다.

삼권분립은 국가권력의 능률향상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집중과 전횡을 막아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제도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삼권분립의 위기는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현 정권은 제도보다는 자신들의 ‘선한 의지’를 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 앞에 좌우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역사의 철칙에 무지하다. 진영논리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대화한다. 이런 상태에서 삼권분립마저 흔들리면 어떻게 될까?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전제정치(專制政治·despotism)가 판을 치게 된다. 최근 최장집 교수는 현 집권세력이 강조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동일하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자칭 민주화세력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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