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부터 2개월간 진행된 ‘금 모으기 운동’을 이끈 김대중 대통령.
1998년 1월부터 2개월간 진행된 ‘금 모으기 운동’을 이끈 김대중 대통령.

‘지난날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오늘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 또 내일의 향방을 예측할 수도 없다.’ - R.G. 콜링우드(Collingwood·1889~1943·영국 철학자·역사가)

2020년을 맞이하는 지금 한반도의 정세는 매우 위중하다. 100년 전 제국주의시대처럼 약육강식의 국제질서가 재현될지, 70년 전 6·25 같은 전쟁이 터질지, 아니면 20년 전 IMF사태 같은 경제위기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1997년 11월 말 김영삼 대통령이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 신청을 했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12월 3일, IMF는 당시로선 사상 최대액수인 5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한국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기업에 대한 가혹한 구조조정이 조건이었다. 예상대로 국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우리가 IMF 속국이냐?”

대선(12월 18일)을 앞두고 정치권은 국민 정서에 편승, ‘IMF 재협상론’을 들고나왔다. 세계 언론은 이런 한국에 대해 “이게 나라냐”며 엄청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우리나라는 절체절명·고립무원 상황이었다. 매일 기업들이 쓰러지고 외환·증권 시장은 붕괴 직전이었다. 연초에 1달러당 800원 하던 환율이 1500원을 돌파했고, 주가는 하루 10%씩 폭락하고 있었으며, 금리는 연 25% 선으로 치솟아버렸다. 한국 몰락은 초읽기였다. 외국 언론들은 중남미식 국가부도(default) 사태를 예견했다.

그러나 우방인 미국과 일본은 철저히 방관했다. YS 정권 말기 한·미 관계는 심각했다. 당시 한국의 국가 신인도는 최악이었다. 한마디로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외 모두가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쏠렸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있다”

드디어 12월 19일 새벽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불과 39만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외환위기’가 절정인 상황에서 과연 세계 여론의 반응은 어떨까.

홍콩 특파원이던 나는 아침 일찍 완차이(灣仔) 사무실로 나갔다. 수북이 쌓인 신문 중에서 제일 먼저 미국의 대표적 보수지인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을 펼쳐들었다. 순간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있다”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통’ 돈 커크 기자는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나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의 당선에 버금가는 쾌거”라며 극찬했다. 나는 안도했다. 이 문장으로 인해 DJ는 이후 ‘한국의 만델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다른 언론들도 호의적이었다.

미국 등 국제 여론이 DJ의 당선을 반겼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심장했다. DJ는 당선되자마자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초 “IMF 재협상” 우려와 달리 “외환위기는 우리 탓”이라며 책임을 인정했다. 사실상 면접심사를 하기 위해서 온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차관에게 “IMF 구제조건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외신은 환영했다. 심지어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언제 파산할지 모르겠다”는 DJ의 실수성 발언에도 “한국이 드디어 진실을 말한다”며 호평했다. 평생 야당 지도자였던 DJ. 포퓰리스트(populist·대중인기영합주의자) 의심을 받던 DJ. 그러나 위기 시에 아주 노련하게 대처해나갔다.

마침내 꿈쩍 않던 미국이 움직였다. 당선 6일 뒤인 12월 25일 0시(미국 시각으로 24일 오전 11시), 서방 13개국이 우선 연말까지 받아야 할 빚(단기채무)을 이듬해로 연기해주고, 추가로 100억달러를 조기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미 클린턴 정부가 한국에 주는 성탄절 선물이었다. 미국이 유럽, 일본 등 서방 동맹국들을 움직여 “한국을 살리자”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 바람에 드디어 한국 경제의 수직 낙하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러나 급한 불은 껐지만 가혹한 IMF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업체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이듬해(1998년) 1월부터 실직자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1960년대 이후 처음이었다. 서울역 등지에 노숙자들이 넘쳐났다. 곧 노사갈등이 전쟁처럼 불거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취임한 DJ는 한국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고, 현대·삼성그룹의 일부도 쪼개졌으며, 부실 금융기관 정리가 무자비하게 진행됐다.

사실 국민들은 승승장구하던 우리 경제의 몰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DJ는 인기에 영합하기보다 정공법을 택했다.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과 애국심을 호소했다. 국민들은 감내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나라를 살립시다. 금을 모읍시다”라며 전개된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DJ 당선 직후인 1998년 1월부터 3월까지 2개월간 진행된 이 운동은 코흘리개에서부터 백발노인에 이르기까지 총 349만명이 참여해 21억달러에 달하는 225t의 금을 모았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한국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3년 앞당긴 2001년 8월에 IMF를 졸업했다.

국민에게 끌려가지 않고 국민을 끌고 간 DJ

돌이켜보면 6·25 이후 최대 국난(國亂)이던 위험천만한 시기에 DJ의 리더십은 탁월했다. 복잡한 국제·금융·언론 메커니즘을 꿰뚫어보고, 현실을 풀어나가는 디테일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국민에게 끌려가지 않고, 국민을 끌고 갔다는 점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상황은 어떠한가. 만약 위기가 닥친다면 그때 같은 선방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당시 IMF 파국을 부른 ‘나쁜 정치’는 지금 훨씬 더 나빠졌다. 정부·여당은 “경제가 잘나가는데 무슨 소리냐”며 아예 위기의식조차 없다.

국제관계는 어떤가? 당시만 해도 경제난에 쪼들려 있던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에게 손을 벌리는 상태였다. 미국과 일본은 확실한 우리 우방이었다. 기아난에 시달리던 북한은 아예 논외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국민들은 금 모으기에 열성적으로 참여할 만큼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똘똘 뭉쳤으며 희생정신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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