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 개표 방송을 지켜보다가 적청(赤靑)과 동서로 분명하게 나뉜 정당별 당선자 판세 지도 그래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익숙해진 그 지도를 다시 보게 되자 2002년 3월 16일 광주 염주체육관이 떠오르더군요.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취재하다가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최대 승부처였던 광주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마누라를 버려야 한다면 차라리 대통령을 하지 않겠다”는 그 유명한 연설 끝에 대세였던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스스로 대세가 됐습니다.

그 현장에서 마주쳤던 것은 노 후보 경선 승리 선언 직후 일군의 사람들이 감격해하는 장면이었습니다. 2층 기자석에서 급히 1층 단상으로 내려갔더니 노사모 셔츠를 입은 아줌마들과 청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광주와 마산의 노사모 회원들’이라고 밝힌 이들은 “노무현이 광주에서 승리했으니 이제 지역감정이 끝났다”며 환호했습니다. 이들이 감격해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어떤 대의명분을 쥐고 있는지를 절감했습니다.

이번 총선 결과를 지켜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없애고 싶어 했던 지역감정이 다시 살아났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호남에서는 민주당이, 영남에서는 미래통합당이 싹쓸이하는 장면이 다시 재연됐다는 겁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있습니다. 과거의 무조건적인 지역감정과 지금의 싹쓸이와는 다르다는 반박입니다. 이런 반박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월호 막말’을 하는 통합당을 어떻게 호남이 지지하겠느냐는 주장도 폅니다. 보수당이 확 바뀌어야 호남서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인데 절대적인 설득력은 없어 보입니다. 지난 총선 TK의 두꺼운 벽을 깼던 민주당의 김부겸·홍의락 후보 역시 이번에 맥을 못 추고 패배의 쓴잔을 삼킨 것을 보면 말입니다.

여러 학자들이 분석한 대로 우리의 지역감정에는 영호남 간 상승 작용이 끼어듭니다. 한쪽이 뭉치면 다른 쪽도 뭉칩니다. 반대로 한쪽의 벽이 허물어지면 다른 쪽도 단단함이 이완됩니다. 이번 총선 결과는 높은 투표율이 보여주듯 친문재인과 반문재인의 세 대결이 뜨겁게 펼쳐졌고, 그 결과 익숙한 동서 대결의 관성이 다시 작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과 배경이 어떻든 동서 대결이 다시 공고해지면 한국 정치의 미래는 닫히고 맙니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이 되는 그 맹목성 앞에서는 좋은 정치의 싹이 자라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 장벽을 부수는 데 그렇게 앞장선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번호 커버스토리가 ‘순천에 간 대구 청년’의 정치 도전기입니다. 대구 출신으로 통합당 공천을 받아 보수정치의 불모지에 도전장을 던졌던 천하람 후보의 얘기인데, 30대 젊은 정치 신인의 무모함이 마음을 울립니다. 보수와 진보, 여야의 대결을 떠나서 그런 젊은 무모함이 있어야 한국 정치의 미래가 닫히지 않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3%의 득표에 그쳤지만 천 후보는 이번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예 생업인 변호사 사무실을 순천으로 옮기며 4년 후를 기약하겠다고 합니다. 4년 뒤 총선 개표 날에는 동서를 가른 지도의 모양이 복잡해질지 궁금합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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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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