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욱 열린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4월 22일 서울 여의도 열린민주당사에서 열린 제1차 열린민주당 비상대책위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최강욱 열린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4월 22일 서울 여의도 열린민주당사에서 열린 제1차 열린민주당 비상대책위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세상 경험을 하면서 나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조심한다.

첫째, 언행에서 지나치게 ‘오버(over)’하는 이다. 자신을 심하게 과시하거나 과도한 감정을 노출하는 사람들 말이다.

둘째, 자신을 정의롭다고 여기는 이다. 이런 사람들은 선악을 분명히 가르고 자기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불의(不義)로 규정한다.

기자와 관직 생활을 거치면서 나는 이런 ‘조심해야 할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두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장본인 문귀동 경장이다. 당시 노동운동을 벌이던 서울대생 권인숙 양을 성추행했다는 주장이 나오자 처음에는 완전히 부인했다. 취재하러 온 내게 동료 경찰관들을 앞세워 위력을 과시하며, “운동권 학생의 터무니없는 거짓진술에 언론이 놀아나느냐”며 거칠게 항의했다.

“내가 크리스천이오. 며칠 전 교회에 혼자 가 기도를 하다가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어 설교 강단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하나님께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냐’고 항의했어요. ×발.”

분을 못 참겠다는 듯 씩씩거리는 그에게 난 진정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한마디 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하더라도 신자가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행동합니까?”

“….”

부천서 사건은 당시 군부 독재하 보도통제로 유야무야됐다가 민주화 이후인 1988년 재조사돼 결국 문귀동은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두 번째는 청와대 비서관 시절이었다. 명망 있는 체육계 원로인사가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들고 다닌다는 정보를 듣고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당시 권력 ‘실세’로 꼽히는 사람의 눈밖에 나 오히려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분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용히 수습하려고 했는데 문제의 ‘실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런 ‘사악한’ 사람을 왜 두둔하십니까. (당신도) 지금 그 사람한테 속고 있는 겁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사악한’이라는 형용사는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판결문에서도 잘 쓰지 않는 단어다.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사악하다고요? 그렇게 무도한 사람이라면 처벌받아야죠. 도대체 어떤 사악한 행동을 했소?”

나의 말에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 인사는 명예롭게 물러났다. 반면 그 실세는 몇 년 후 비리에 연루돼 감옥에 들어갔다.

‘사악한’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요즘 연일 매스컴에 회자되고 있는 최강욱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당선자가 떠오른다. 그는 4·15 총선 이틀 뒤 ‘사악한’ 검찰과 언론을 손보겠다고 공언했다.

“검찰 개혁과 언론 개혁을 약속드렸다. 그것들이 두려웠으면 나서지도 않았다. 최소한 저 사악한 것들보다 더럽게 살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

그의 이런 과한 언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으로 있던 지난 1월 말,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아들의 허위 인턴 활동 증명서를 발급한 혐의로 검찰에 의해 업무방해죄로 기소되자, 장문의 ‘검찰 기소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고 윤석열 검찰총장을 비난했다. “검찰권을 남용한 기소쿠데타” “특정한 목표를 가진 특정세력에 의한 검찰권 농단” “과거 하나회에 비견될 만한,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 작태”라는 등 너무 거창한 표현과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나는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현직 공무원(1급)이 이런 식으로 공권력(검찰)을 비난하는 것도, 이를 묵인·방관하는 청와대의 모습도 처음 보았다. 불과 몇 달 전 자신들이 뽑은 검찰총장이 자기네 편을 안 들어준다는 이유로 말이다.(당초 최씨가 공직기강비서관으로서 윤 총장의 인사검증을 총괄지휘했었다.)

이후 최씨는 검찰의 피의자 소환 조사에도 3차례나 불응했고, 경찰의 참고인 조서 요청을 무시하는 등 공권력 위에 군림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왔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가?

군 법무관 출신인 그는 2004년 현직 4성 장군을 공금횡령 혐의로 구속시켜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군 장성 인사비리까지 파헤치려다 결국 예편하고 말았다. 당시 30대 후반 나이의 그는 정의감이 투철했고 용기, 강단도 갖추고 있었다.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노무현·문재인 대통령 인맥과 가까웠다. 방송 출연과 글쓰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개혁과 정의를 주장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권 출범과 함께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임명되자 “윤석열의 삶이 어디 한 자락이라도 권력을 좇아 양심을 파는 것이었더냐?” “하하하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라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면서 그를 옹호했다.

이후 2018년 9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으로 임명된 뒤 윤석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조국씨 내외에 대한 비리혐의 수사와 자신에 대한 기소, 그리고 송철호 울산시장 선거 관련 청와대 개입 여부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자 180도 달라져 ‘윤석열 검찰 타도’에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정의로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의로움만 정의(正義)인가?

‘정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또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다. 1987년 기자였던 나는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연이 있다. 그래서 남다르게 그의 행보를 지켜봤는데 대통령 시절 그에게 많은 실망을 느꼈다. 이유는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지나치게 정의감과 개혁의지에 불타는 투사처럼 행동하고 세상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퇴임 후 2009년 그가 가족들 금전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자살을 했다.

최강욱 당선자의 언행을 볼 때마다 나는 문귀동의 과잉대응과 감옥에 간 그 실세의 모습이 자동으로 오버랩된다. 나는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의로움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의 ‘과한’ 행동까지 이해해 줄 수는 없다. 자기 반대편이 곧 불의라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쫓기는 사람의 심리는 아닐까. 자신을 ‘무리한’ 검찰 수사의 희생양으로 만들어 향후 재판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려는 영악한 의도도 있지 않을까. 우리 인간은 누구나 내면의 죄성(罪性)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가 자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한다는 속담도 있다.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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