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세상에 알린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지방판 2단 기사(1987년 1월 14일 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세상에 알린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지방판 2단 기사(1987년 1월 14일 자)

내가 신문기자를 시작하던 1980년대 초, 전국지는 조·석간 합쳐 6개뿐이었다. 이 밖에 통신사 1개, 지상파 TV 2개, 경제지 두어 개가 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 매체와 유튜브를 포함해 수천 개 언론사가 난립하는 시절과는 달랐다. 나름 자부심도 높았고 회사 분위기도 좋았다. 200명 가까운 기자가 매일 12면을 제작하니 정성도 대단했다.

문제는 언론 자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는 보도되지 못했고 담당 기자나 간부는 기관에 끌려가 ‘봉변’을 당했다. 서슬 시퍼런 상황이라서 정치·사회 등 정권과 관련된 기사를 쓸 경우에는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초년병 시절부터 우리는 사실(fact)과 의견(opinion)을 명확히 구분해 쓸 것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화창한(sunny) 날씨’는 객관적 사실이지만 ‘좋은(nice) 날씨’는 주관적 의견이다.

군사 독재하에서 우리는 의견은 줄이고, 사실만 보도할 것을 배웠다. 그러나 사실 보도도 문제 될 수 있었다. 정권에 불리한 기사는 보도 금지가 됐다. 부동산 사기 피해자 중에 ‘장군 부인’이 포함된 기사가 나갔다고 군인들이 편집국에 난입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다.

당국의 검열을 피하면서 국민에게 사실과 정보를 알려주려면 기자들이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했다. 용어나 형용사·부사는 물론 조사까지도 의미를 담아 선택했다. 예컨대 전두환 정권의 ‘경제가 좋다’와 ‘경제는 좋다’는 문장 뉘앙스가 다르다. 전자가 가치중립적이면서 긍정적인 반면, 후자는 경제 이외의 다른 상황은 좋지 않다는 부정적 느낌을 담고 있다.

그래서 ‘민감한 상황’을 보도할 때 선배들은 흔히 이렇게 주문했다.

“사설 쓰듯 하지 말고 스케치하듯 보여줘.(Show, Don’t tell.)”

기자가 심판자가 돼 의견(opinion)을 말하지 말고, 관찰자 입장에서 사실(fact)을 그대로 묘사해주고,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게끔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5공 시절 수많은 시국사건 기사들이 검열의 매서운 눈을 피해 보도될 수 있었다. 지금은 기성언론 비판의 선봉에 서 있는 ‘작가’ 유시민이 세간에 알려져 유명하게 된 계기는 동아일보 황호택 기자(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의 작은 스케치 기사 덕분이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유씨가 민간인을 폭행·고문한 ‘서울대 프락치 사건’과 관련,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황 기자가 담담하게 소개해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군사정권도 ‘사실’에 굉장히 민감했다. 군인이란 생래적으로 적을 제압해 전쟁에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보고와 판단’을 생명으로 한다. 의견보다 사실을 중시하는 습관이 밴 군인들이라 대(對)언론 정책에 있어 사실 보도가 되지 않게끔 틀어막으려는 데 중점을 두었지, 이왕 보도된 기사를 엉뚱한 의견(논리)으로 왜곡시키는 데는 익숙지 못했다.(다만 남북 대치-세계 냉전 상황에서 대북 문제와 안보는 예외였다.)

때문에 보도기관과 정권과의 ‘시간 차(time-lag)’ 싸움이 빈번했다. 사건이 터지고 검열당국이 미처 보도통제를 하지 못한 사건의 경우 언론사가 먼저 보도하곤 했다. 1987년 1월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대표적이었다. 당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현 성균관대 교수)가 검찰 인사의 제보로 사실을 입수하고 서울판에는 넣지 못하고 지방판에 2단 기사로 슬며시 끼워 넣었는데 이것이 일파만파로 알려지면서 한국 민주화를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나도 박종철 기사가 나간 지 며칠 뒤 조영래 인권변호사(작고) 사무실에서 박석운씨(현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로부터 ‘부산의 한 인권변호사가 구속된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날 밤샘 취재를 하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검찰이 당초 청구한 영장이 당직판사에 의해 기각됐는데도 검찰은 계속 부장판사, 수석부장판사, 법원장 집을 찾아가 영장청구를 ‘강요’하다 끝내 거절당한 사실이었다. 검찰 사상 전무후무한 하룻밤 4번 영장청구 사건은 그렇게 이뤄진 것이었다.

그때 시간이 이미 새벽 2시가 넘어 시내판 기사가 마감된 상태였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 기사를 하루 뒤에 보도하려고 묵힌다면 그새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는 특종을 포기하고 이날 오전 10시 당시 석간인 동아·중앙·경향에 “검찰이나 법원에 확인하지 말고 그냥 쓰라”며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석간 3개 신문은 낮 12시에 발행되는 첫 판에 크게 실었고 무명의 노무현 변호사는 석방과 함께 처음으로 전국에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후 민주화가 본격화되면서 언어는 고삐 풀린 말처럼 자유로워졌다. 온갖 주의·주장이 난무하고, 과거 하지 못했던 날 선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현장에는 살벌한 구호와 욕설, 폭로가 난무했다.

언론기관도 특유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벗어나 주장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관찰자(observer)가 아닌 참여자(player)가 되기도 했다. 정파나 세력들은 이런 언론을 이용했다. 도움이 되면 박수를 쳤고, 불리하면 비난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당초에는 민주화의 과도기적 진통이라 여겼지만 정권이 바뀌고 해가 거듭할수록 상황은 더욱 심화돼 갔다. 언어는 폭력화·무기화했고 진실은 정파·세대 등 집단에 따라 선과 악, 백과 흑으로 명백히 갈렸다.

소설가 김훈의 주장대로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 ‘왜 이런가?’ 등의 과학적 사고 대신 ‘내 마음에 드나, 안 드나?’ ‘내 생각과 맞나, 안 맞나?’ ‘내 편인가, 아닌가?’ 식의 정서적·이념적·정치적 생각을 한다.

대학에 재직하면서 미디어 지망생들을 가르칠 때, 나는 ‘사실’과 ‘의견’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궁극적으로 ‘진실(Truth)’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A라는 학생이 B라는 학생을 늘 때리고 못살게 굴었다. 어느 날 B가 못 참고 A를 때렸다. 공교롭게도 선생님이 목격했다. 그때 사실은 뭘까? 물론 B가 A를 때린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평소 A가 B를 늘 괴롭혀왔고 그 결과로 B의 폭력이 나왔다는 것이 진실이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건을 놓고 누구 편도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 직업이 바로 기자, 경찰, 검찰, 법관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은?”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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