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런던통신에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의 소설 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조금 더 평등하다.’ 소설 ‘동물농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문장입니다. 평등을 내세운 공산주의 계급사회의 허구성을 고발한 것인데, 요즘 영국에서 ‘공공의 적’이 된 도미닉 커밍스 총리 수석보좌관을 질타하는 문구로 쓰인다고 합니다.

사태의 발단은 커밍스의 코로나19 봉쇄령 무시입니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신임하는 이 정권 실세가 모든 국민이 어렵게 지키고 있는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부모 집에 운전해 갔다온 사실이 언론 취재로 드러나면서 영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시민들은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돼지들처럼 자신은 법을 안 지켜도 되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니냐고 분노하면서 조지 오웰 소설 속 문구를 커밍스 집 앞에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며 총리 관저의 ‘장미정원’에서 당당하게 해명하는 커밍스를 보면 영국판 내로남불 사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기사를 데스킹하면서 조지 오웰의 소설 구절이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마침 제가 요즘 조지 오웰에 푹 빠져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얼마 전 ‘버마시절’과 ‘동물농장’을 완독한 데 이어 요즘은 출퇴근길에 전자책으로 ‘1984’를 틈틈이 정독하고 있습니다. 20대에 읽은 소설을 30년 만에 다시 읽는 셈인데, 젊은 시절 읽었던 ‘1984’와 50대에 다시 접한 ‘1984’와는 꽤 차이가 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1984’는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21세기를 한참 전에 내다본 조지 오웰의 통찰력이 곳곳에 묻어나는 문제작입니다. 30년 만에 다시 읽으면서 제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권력이 피통치자들을 세뇌시키는 방법입니다. 소설 속 전체주의 정권은 사람들의 기억도 조작합니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근무하는 ‘진실부’는 진실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빅 브라더와 당이 과거에 한 예측이 현실에서 맞지 않으면 과거 발언을 찾아내 현실과 맞게 고치는 것이 일입니다. 예컨대 올해는 초콜릿 배급량이 줄지 않을 것이라고 과거에 전망했는데 현실에서 30%가 줄면 과거의 기사와 책자를 찾아내 일일이 숫자를 바꿔 그걸 원본으로 삼는 식입니다. 주인공은 잘못된 숫자가 기재된 과거 문건들을 거대한 용광로와 연결된 사무실 ‘기억통’에 던져버립니다. 조작과 위조임이 분명하지만 주인공은 개의치 않습니다. 허튼 소리를 또 다른 허튼 소리로 바꿔놓는 것일 뿐 자신이 취급하는 자료 대부분이 실제 세계의 어떤 것과도 상관없다고 냉소적으로 자위합니다. 급기야 주인공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틀리는지조차 모르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 세계에서 모든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깨끗이 지웠다가 다시 쓰는 양피지 같은 것이고, 거의 매 순간마다 과거는 현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빅 브라더와 당의 슬로건은 무시무시합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여당에서 지난 총선 대승 이후 ‘과거’를 자주 입에 올리고 있습니다. 1987년 칼(KAL) 858기 폭파 사건 진상을 다시 조사한다고 하고, 친일파를 현충원에서 파묘(破墓)한답니다. 유신청산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주장도 들립니다. 이런 움직임들이 진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함으로써 미래를 지배하려는 것은 아닌지 자꾸 의구심이 듭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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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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