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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1호]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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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인생극장]처칠이냐 헤밍웨이냐, 우울증과 싸우는 법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jmedia21@naver.com

▲ 윈스턴 처칠(왼쪽). 어니스트 헤밍웨이(오른쪽).
언제부턴가 뉴스를 보기가 겁나기 시작했다. 보고 나면 분노, 우울, 미움, 한탄, 절망, 자책 등의 부정적 감정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성정이 그리 원만하지도 않으며, 참을성도 많지 않다. 직설적으로 반응하는 내 마음의 파도가 때로 나를 꽤 지치게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나름 마음의 평정을 찾는 기술을 약간 터득했다고나 할까.
   
   한동안 정말 마음이 힘들 때가 있었다. 모든 게 잿빛으로 보였고 긍정적 감정을 갖기 어려웠었다. 그때 나를 돌아보게 해준 것이 20세기 두 걸출한 인물의 인생 역정을 통해서였다. 바로 불굴의 의지와 승리의 아이콘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와,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다만 파괴될 뿐이다’라고 외친 행동주의 문학의 거장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빛나는 성취 스토리가 아니라 평생 우울증과 싸우며 자살 욕구에 시달린 어두운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처칠의 우울증은 집안 내력이었다. 아버지도, 아들들도 자살하거나 알코올중독의 길을 걸었다. 26세에 하원의원으로 당선, ‘초년 출세’의 길을 걸었던 처칠도 나이 마흔이 안 돼 우울증이 본격적으로 찾아왔다. 거의 폐인으로 자살 일보 직전까지 갔던 그를 구한 것이 그림 그리기였다.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평생을 ‘검정개(Black Dog·우울증)’와 같이 살았다. 그러나 내가 하늘나라에 간다면 처음 맞는 100만년 동안은 그림을 그리면서 살겠다.”
   
   이후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정계에 진출해 활약하다 너무 소신에 충실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사실상 은퇴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그를 도와준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가 유약하고 착한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를 속이고 유럽을 공격,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영국인들은 고집불통이지만 싸움꾼인 처칠을 만 6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총리로 앉혔고 결국 처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의 우울증은 전쟁 중에도 심각해, 총리로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면서도 잠자리에 들어서는 베개를 껴안고 소리 내어 울었고, 새벽녘까지 브랜디를 마시고 일하면서 ‘검정개’와 싸웠다.
   
   종전 직후인 1945년 ‘전쟁 영웅’ 처칠은 총선에서 패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국인들은 평화 시 지도자로서 처칠을 원하지 않았다.
   
   이후 처칠은 무엇을 했을까. 이쯤 되면 시골 영지로 내려가 좋아하는 샴페인에 브랜디, 시가를 즐기면서 편안한 노후생활을 즐기거나, 가끔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설도 해 돈도 벌고 명예도 즐기는 시간을 가져야 할 텐데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우울증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자살 충동 때문에 배를 타거나, 강가나 호수 주변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몰두할 것이 필요했다. 그림 그리기 외에 택한 것이 ‘글쓰기’였다. 그때부터 자신이 겪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써서 8년 뒤인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때 그의 나이 79세. 집필 활동 역시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한 방도 중 하나였다. 이후 처칠은 12년을 더 살고 1965년 만 91세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처칠이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땅을 치고 가장 분해한 사람 중 하나가 헤밍웨이였을 것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작가였다. 역사상 헤밍웨이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은 문필가는 없다. 지금으로 따지면 비틀스나 BTS(방탄소년단)에 못지않은 팬덤(fandom)을 거느리고 있었고 부, 명예, 사랑을 다 가지고 있었다. 단 하나 갖지 못한 것이 노벨문학상. 결국 그는 처칠이 수상한 다음 해인 1954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처칠과 비슷하게 우울증을 유전 받았고 평생 고생했다.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고 아들, 손주도 우울증의 길을 걸었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남자답고 모험을 즐기고 도전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지만 내면은 정반대였다. 동료 작가 노먼 메일러는 말한다.
   
   “헤밍웨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내면의 풍경은 비겁함과 자살의 유혹과 싸우는 악몽이었다.”
   
   헤밍웨이가 평소 술을 좋아하고 권투, 사냥, 바다낚시, 사파리 등 거친 스포츠를 즐겼으며 심지어 목숨이 오가는 살벌한 전쟁터를 수차례나 참전한 내면의 동기에는 자신의 신경정신증 질환들에서 오는 고통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숙원인 노벨문학상을 받고서 심신이 급격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폭음을 일삼았고 더 이상 짧은 문장조차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우울증의 비옥한 토양일 수 있다.
   
   헤밍웨이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는 없었고 62세이던 해(1961)에 장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했다. 세상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담하거나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그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스스로의 약점도 감출 줄 모르는 그의 솔직성은 남을 보는 안목도 탁월해 체임벌린을 비롯 당시 유럽 지도자들을 농락한 히틀러의 악마성을 직관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견해,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과도 함께 살 수 있다. 이런 초연함이 그렇게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그토록 세계사적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90세가 넘게 장수한 비결이 아닐까.
   
   반면 헤밍웨이는 현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려고 했다. 세상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니까 낙담하고 절망하고 분노했고, 그래서 향락을 도피처로 삼았다. 자신이 최고라는 교만은 말년에 그가 사람도 싫어하고,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뉴스를 보면 세상이 내가 바라는 대로 가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견해도 너무나 많다. 그때 현실을 있는 그대로(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세상은 흘러간다. 나는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내 생각과 감정, 의견만이 옳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생각들을 하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내려놓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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