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개성공단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는 시커먼 뉴스 자막이, 남북관계가 온통 장밋빛이었던 2018년 봄날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무렵 주간조선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홈페이지를 뒤적이다가 ‘25>65’라는 암호 같은 제목에 눈길이 갔습니다. 역사적인 4·27 판문점 3차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쓴 이 칼럼 제목이 그랬습니다. 당시 저는 칼럼에서 ‘4월 27일이 지난 65년간 이어져온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25년간 우리를 괴롭혀온 북핵 위기를 끝내는 역사적 시발점이 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시 제 나름대로의 잠정 결론은 ‘65와 25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우리의 두 가지 숙제 중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25 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5년을 풀지 못하면 65년도 풀리지 않는 것이 우리 앞의 냉엄한 현실’을 이야기했는데 지금 진행되는 사태를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은 진단이었던 듯합니다.

지금 북한은 여전히 핵을 움켜쥐고 고난의 행군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과 국제사회의 장기간 제재가 이어져 내부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거기다가 코로나19 사태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내지르는 비명이 이른바 말폭탄과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나타났다고 여겨집니다.

이번주 북한 사태 관련 글을 기고한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이런 내부 위기보다는 북한 김씨 정권의 가장 큰 숙제인 후계구도가 북한 도발의 더 큰 배경이라고 분석하더군요. 건강을 자신 못 하는 김정은이 여동생 김여정을 급하게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강경 도발이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32세 여성 백두혈통이 남한 정권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는 신화를 만드는 중’이라는 건데 내부 문제든, 외부에서 촉발된 위기든 북한의 강경 도발이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 같습니다.

결국 북핵 25년을 풀지 못한 결과 다시금 한반도에 긴장감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2018년 남북 정상의 판문점 회동을 전하는 TV 화면 하단에는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슬로건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당장 종전선언이 이뤄지고 평화 통일의 길로 들어설 것 같은 기대감이 일렁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평화롭게 보이던 봄날이 2020년 긴장의 여름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누가 쉽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얼마 전까지 이어지던 거대 여당의 ‘종전선언, 판문점 선언 비준’ 목소리가 쑥 들어간 것을 보면 2018년 봄날은 정말 신기루였나 봅니다. 25년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65년을 풀겠다는 목소리가 얼마나 공허한지 다시 한번 느낍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외교안보 원로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의 북한 움직임에 대해 “굉장히 실망스럽다”며 “국민이 더 충격을 받지 않았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문 대통령은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끼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대를 앞장서 키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문 대통령 자신이었다고 여겨집니다. ‘평화, 새로운 시작’을 긴가민가했던 적지 않은 국민들은 그 봄날이 신기루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진즉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북핵 25년을 풀어야 한다고, 그러지 못하면 65년이 풀리지 않는다고 북한에 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신기루 아닌 진짜 봄날이 오기를 고대해 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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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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