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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6호]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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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백선엽을 추모하며… 낙동강 전투의 영웅들

선영제  예비역 육군중장, 전 전쟁기념사업회장 

▲ 2019년 11월 22일 국립서울현충원 학도의용군무명용사탑 앞에서 백선엽 전 장관이 100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가족들과 무명 용사의 넋을 기리고 있다. photo 조선일보DB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신 분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특히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낙동강방어선전투’를 되돌아보며 목숨 바쳐 얻은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6.25전쟁은 젊은 세대에게는 ‘잘 모르는 전쟁’이고, 노년들에게는 ‘잊혀져가는 전쟁’이다. 그러나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점은 엄연한 현실이다.
   
   
   낙동강에 친 배수의 진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낙동강방어선 전투는 1950년 8월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벌어졌다. 서울 함락 이후 아군의 방어전은 기본적으로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지연작전’이었다. 하지만 8월이 되면서 ‘더 이상 내줄 공간이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방어선 중에서 어느 한 곳이라도 뚫리면 그것은 곧 ‘대한민국의 멸망’이었다. 미 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선정하게 되는 시기는 대전 북쪽의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이 돌파된 직후인 7월 17일경이었다.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결정하게 된 요소는 국군과 미군 및 미 본토 증원부대 상황, 유엔 해ㆍ공군 지원능력, 북한군의 전력, 지리적 조건, 부산항의 양륙(揚陸) 능력 등에 관한 각종자료를 다각적으로 분석한 결과였다. 이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한 다음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워커 미8군사령관은 최초방어선을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약 240km 구간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낙동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이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점, 방어선에 배치할 병력절약을 통한 예비대 확보,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한 내선작전의 이점 등을 활용하기 위해 8월 11일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180km로 전선을 축소 조정했다. 왜관을 축으로 동쪽으로 포항까지 Y선, 남쪽으로 함안까지 X선을 설정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한편, 김일성은 7월 20일 충북 수안보에서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 통일전쟁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10여개 사단, 14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8월과 9월 두 차례의 총공세를 가해왔다. 8월에는 왜관-다부동-대구 방면에 주공을 지향했으나, 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돌파에 실패하자 9월에는 모든 방면에서 돌파를 시도해 아군은 한때 영산, 다부동, 영천, 포항을 동시에 돌파당하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낙동강 전투의 마지막 분수령은 영천이었다. 적 15사단이 9월 6일 영천읍을 점령하면서 방어선이 연쇄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 이에 반격작전으로 전환한 국군 2군단은 8일 영천읍을 탈환한데 이어 9일부터 총 7개 연대의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 9월 12일에는 최초의 방어선을 회복했다. 영천전투의 승리로 전선을 안정시킨 아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마산과 영산 돌출부전투는 미군들이 주로 수행하였고 영천, 안강, 기계, 포항전투는 국군이 주도한 전투이며, 다부동전투는 국군과 미군이 함께 싸운 전투다.
   
   
   워커 8군 사령관의 리더십
   
▲ 6.25 전쟁의 영웅으로 꼽히는 故 월튼 워커 장군의 모습(오른쪽). photo 국방부

   낙동강전투에서는 절체절명의 대한민국을 지킨 두 명의 위대한 영웅이 있었다. 바로 워커장군과 백선엽 장군이었다.
   
   “Stand or Die !”(지키느냐, 죽느냐)
   
   월튼 워커장군은 1889년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였고, 1912년 미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및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지 패튼장군휘하 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한 역전의 노장이다. 그는 특이한 용모와 강한 책임감, 강렬한 전투의지 때문에 ‘불독워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1950년 7월 13일 미8군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1950년 12월 23일 현 서울시 도봉구에서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순직하였다.
   
   낙동강방어 작전시 워커장군에 부여된 임무는 ‘부산교두보를 확보하고, 당시 극비리에 추진 중이던 인천상륙작전에 호응하여 즉시 공세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다. 워커중장은 1950년 8월 1일 ‘워커라인’이라는 낙동강방어선을 설치했다. 대구의 관문인 왜관과 다부동에서 ‘전쟁의 명운’을 건 결전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는 낙동강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1950년 7월 29일 모두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을 때, 미 25사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고 못 박으면서 “Stand or Die!”라며 비장한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전선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인 것이다. 미국 언론들조차 워커장군의 지휘방식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비난할 정도였으나, 그는 단호한 태도로 방어전을 지휘해 마침내 낙동강을 사수할 수 있었다.
   
   워커장군이 지휘한 낙동강방어 작전의 성공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중 우세권 및 제해권 장악이었다. 이로 인해 적 병력집결이 불가했고 적 전차를 무력화했으며, 기동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둘째는 병력 및 물자의 신속한 증원이었다. 군수품의 국내 사전 비축을 위해 긴급물자는 공중수송으로, 기타물자는 해상수송을 시행하였다. 셋째, 교두보의 치안확보에 주력했다. 특히 전투경찰대 활용을 극대화하였다. 북한군 제2전선부대의 유격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피난민 통제 및 구호, 교통통제 및 야간 통행금지 강화 등을 실시하여 내선작전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주력하였다. 넷째, 내선의 이점을 이용하여 기동예비대인 미 24사단, 1해병여단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다섯째, 탁월한 지휘통솔력이었다. 워커장군은 가장 위험한 전투현장을 직접 방문해 부하들에게 용맹하고 과감한 전투의지를 주입해 절체절명의 낙동강방어 작전에서 전세를 역전시켜 대한민국을 구출한 주인공이 되었다.
   
   
   북한군이 소 1000마리 현상금을 건 백선엽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백선엽장군은 1920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일제시대 때 평양사범학교와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군사영어학교를 수료했다. 6.25전쟁시 낙동강방어선에서 다부동을 사수하여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고, ‘6.25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에게 낙동강 전선의 붕괴는 ‘대한민국의 붕괴’를 의미했다. 백선엽 장군은 다부동 고개에서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집단으로 퇴각하자, 맨 앞에 나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며 전투를 독려했다. 이에 힘을 낸 병사들이 고지를 지켜냈다.
   
   김일성은 개전 초반의 승세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지연전, 미군의 참전 등으로 조바심을 보이며 8월 국군과 유엔군을 대상으로 총공세를 폈다. 1950년 8월 12일 다부동전투를 앞두고 낙동강방어선 X과 Y선이 만나는 왜관 협조점에서 국군 1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은 각각 1개 소대병력을 교차 파견 배치해서 한ㆍ미 군간 긴밀히 협조하였다. 8월 13일에는 북한군 3개 사단이 1사단 3개 연대를 각각 공격해옴에 따라 다부동 일대의 고지들은 이를 뺏고 지키려는 아군과 적군의 공방으로 피비린내 나는 격전을 치렀다. 이때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3.5인치 로켓포 5문을 지원받아 12, 15연대에 각각 2문, 11연대에 1문을 분배하고 배치했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새로 보급받은 3.5인치 로켓포로 적 전차 10대를 파괴했다. 국군은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갖지 못했으나, 그때 보급받은 3.5인치 로켓포는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이 다부동지역에 강한 압박을 가해왔다.
   
   8월16일 11시 58분,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26분간, 900톤의 폭탄을 낙동강 대안의 북한군 병력 및 군수물자 집적소인 구미의 약목일대(가로 5.6km, 세로 12km의 직사각형)에 융단폭격을 실시했다. 미국 공군의 대규모 융단 폭격은 북한군의 전투심리와 전투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러나 북한군은 다부동 지역에서 마지막 몸부림으로 최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1사단은 미8군에 증원을 요청하였고, 지원나온 미 제27연대와 미 23연대로 다부동 방어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이때 1사단을 지원나온 미군과 북한군 사이에 전차전이 벌어졌다. 6.25전쟁 최초의 전차전이었다. 결과는 북한군의 완패였고, 북한군은 그때서야 공격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 평양입성후 공지 연락장교와 이야기를 나누는 백선엽 1사단장. photo 육군

   
   적은 이러한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가산산성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야간에 백선엽 1사단장을 생포하기 위해 사단사령부를 기습했다. 현상금도 걸었다. 북한 돈 10만원이었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북한 돈 100원인 것을 감안하면 1000마리를 살 수 있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때를 전후해 북한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정봉욱 중좌가 투항했고, 뒤이어 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도 투항했다. 북한군이 수뇌부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다부동 전투결과 1사단은 장교 56명을 포함해 2300명의 전사자를 냈고, 미군도 1282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북한군은 5690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미(美)군사학교 교재와 전사(戰史)에 실렸다. 이는 백선엽 사단장의 탁월한 리더십 결과였다. 그것은 첫째, 먼저 승리할 여건을 만든 후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상황을 빨리 판단하고 확신이 서면 신속히 결행했다. 둘째, 사단장은 가장 위험한 지역에 위치하여 진두지휘했다. 특히 다부동 고개에서 사단장이 직접 진두지휘해서 이 지역을 사수했다. 셋째, 발생 가능한 우발상황을 상정하여 미리 예측하고 대비했다가 실제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대로 실행했다. 넷째, 실전위주의 간부들의 능력은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싸워 이기는 군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섯째, 부하를 매우 아끼는 장군이었다. 백선엽장군은 지프를 타고 가다가도 고생하는 병사들을 보면 내려서 격려하고 함께 담배를 피우는 등 부하를 매우 사랑하는 장군이었다.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덕분이다. 과거의 불행을 잊어버리면 그 불행은 또 다시 찾아온다. 낙동강전투의 승리는 대한민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구국의 전투였다. 낙동강방어선이 최후의 보루로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경찰, 학도병, 소년병, 노무부대 등의 위국헌신 정신과 실천 덕분이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전쟁을 극복하였는지 제대로 가르쳐야한다. 우리는 전쟁을 각오해야 더 큰 전쟁을 막을 수 있다. 70년 전 전쟁을 겪으며 그 무엇보다 자유의 소중함을 체험했고 우리의 핵심가치로 자유가 떠오르게 되었다.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것이다. 자유수호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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