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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9호]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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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인생극장]박지원 국정원장을 당황하게 만든 한마디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jmedia21@naver.com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29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신임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경찰청장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해 박지원 신임 국정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1988년 2월, 5공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6공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국내 여론은 곧바로 5공 비리 수사를 요구했고, 첫 번째로 전 전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씨를 지목했다. 전씨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면서 위세를 부린 인물이었다. 당시 뉴욕지사에서 근무하던 나는 뉴욕에 있다는 전씨 재산 추적에 나섰다. 전씨와 가까웠던 교포들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뉴욕 한인회장과 미주지역 한인회 총연합회장을 지낸 박지원씨를 지목했다. 그를 ‘전경환의 오른팔’로 부르는 이도 있었고, “전씨가 뉴욕에 오면 그 사람이 다 책임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즉시 수소문했으나 그는 이미 한국에 가고 없었다. 그는 1970년대 초 이민 와서 사업가로 성공했고, 뉴욕 한인회장으로 있던 1981년 전 대통령의 방미환영위원장을 맡으면서 전 대통령 측과 친해졌다. 이후 뉴욕 평통자문위 회장도 맡고 정계 진출도 모색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뉴저지주 소재 전경환씨 부인과 장남 명의의 집(대지 990㎡, 건면적 150㎡)을 발견, 보도했다. 당시 검찰 수사를 받던 전씨에겐 외화도피죄가 추가됐다.
   
   박지원은 1987년 귀국 후 평민당에 입당했고 1992년 14대 전국구 의원이 돼 DJ의 ‘대변인’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승승장구해 동교동계 가신들을 제치고 DJ의 ‘No.1 맨’으로 자리를 굳혔다. 1998년 DJ 정권 출범과 함께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고 2001년 다시 청와대로 들어와 정책기획수석·비서실장을 지내며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했다.
   
   그와의 본격적 만남은 2001년 6월 이뤄졌다. 당시 언론계는 비상시국이었다. DJ 정권은 세무조사를 통해 그동안 벼르던 ‘언론 권력’을 손보자는 입장이었고, 보수언론은 ‘언론 탄압’으로 여기고 일전불사를 다짐했다. 해외에 있던 나 역시 갑자기 불려 들어와 사회부장을 맡게 됐다. 국세청은 그해 6월 20일 전국 23개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6개 언론사를 고발했다. 곧 검찰 수사와 사주 구속 등이 뒤따를 예정이었다. 바로 이날 청와대 정책수석을 맡고 있던 박씨가 시내 한정식집으로 중앙 일간지 사회부장단을 초대했다. ‘언론과의 전쟁’을 앞두고 ‘권력의 칼자루’를 쥔 박지원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술판이 벌어졌다. 폭탄주가 돌고 농담이 오고 갔다. 박씨의 다소 호기 어린 모습에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 나는 13년 전 뉴욕 이야기를 꺼냈다.
   
   “박 수석, 뉴욕서 전경환과 그렇게 친했다면서요?”
   
   그 말에 박지원은 그날 처음으로 굳어진 표정을 보였다.
   
   “아…, 뉴욕 한인회장을 하다 보면 의전상 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매우 가까웠다고 하던데…. 전경환의 ‘가방모찌’(어떤 사람의 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노릇을 했다면서요?”
   
   그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좀 거칠게 말을 했다. 어차피 권력과 언론 간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번진 판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날 이후 그는 내게 잘 대했다. 내가 전화를 걸면 즉각 받았고 어떤 사건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면 적당히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그는 여러 얼굴의 사나이다. 스스로 고백했듯 ‘좌익의 아들’이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였고, ‘전경환의 오른팔’을 거쳐 ‘DJ의 충신’이 됐다. 그런 전력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과 호평 역시 극명하게 갈린다. 그는 세상에 굴신(屈身)할 줄 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굽히고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인물 같다. 언론사를 찾아가 간부들에게 거친 행동으로 권력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아들뻘 되는 기자에게 공손히 술을 따르기도 한다.
   
   그를 보면 이방원과 정몽주의 고사(古事)가 떠오른다. 박지원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정몽주보다는 이방원 편에 설 인물이다. 정치적 스승인 DJ가 정치인의 덕목으로 강조한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 중 그는 철저히 후자 쪽이다. 박지원은 DJ의 충신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권력 주변을 서성거리며 주변인(outsider)으로 맴돌았다. 이후 호남 세력에 편입된 뒤에도 DJ 적손인 민주화 동지들로부터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떠난 후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DJ 사후 최고위원, 당 원내대표를 거치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이념(理念)으로 포장된 이권(利權), 개혁(改革)으로 위장한 개악(改惡), 명분(名分)으로 치장한 명리(名利)와 더불어 혈연·학연·지연 등 온갖 연고(緣故)가 판치는 위선적 정치판에서 박지원은 스스로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좌우를 넘나들며 살아온 인물이다. 좋게 보자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셈이다. 시도 때도 없이 ‘정의’를 부르짖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나 최강욱류의 사람들, 입만 열면 ‘애국’을 외치던 김기춘이나 친박 세력들보다 오히려 솔직하다는 역설적 평가도 가능하다.
   
   그는 2014년, 그래도 여야 정치가 돌아가던 시절에 영·호남 출신 의원 20여명과 함께 전남 하의도 DJ 생가와 경북 구미 박정희 생가를 차례로 방문하고 사진을 찍었을 때 환하게 웃었다. 지역 갈등 해소와 여야 화합을 다짐하는 모임을 주도한 그의 역할이야말로 그다운 행동이요,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원은 국정원장 내정 통보를 받고 “역사와 대한민국, 그리고 대통령께 충성을 다하는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내 판단이 정확한지는 몰라도 ‘국정원장 박지원’도 이 정권에는 양날의 칼이다. 이 정권은 북한을 다루는 그의 ‘솜씨’와 ‘경륜’을 샀겠지만 국정원장 박지원이 북한이라는 숙제에만 머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번 청문회 과정에서 그가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장직을 제안받았지만 정치 개입을 우려해 고사했다는 사실이 조명받기도 했다. 그는 이번 국정원장 지명 직후 “정치의 정 자도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지만 11년 전에는 “내가 만약 국정원장에 가면 정치 개입이 굉장히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안 갔습니다”라고 말했었다.
   
   아직도 이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운동권적 사고에 머물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지금 정권의 핵심 586인사들과 그들이 이끄는 국정(國政)에 박지원식 ‘실용’이 긍정, 부정 어떤 효과를 낳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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