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경 ‘반기문 비 맞고 태산에 오른 까닭’이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퇴임 1년여를 남기고 차기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1위를 달릴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중국 출장을 갔다가 중국 관리들로부터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던 반 총장이 베이징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산둥반도의 지난(濟南)까지 내려와 비가 오는 날 태산에 올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일반인이 들었으면 무심히 지나칠 얘기였는데, 정치담당 기자를 하면서 국내 유력 정치인들이 ‘우중(雨中) 태산 등정’에 얼마나 의미를 두는지 알고 있던 터라 ‘옳거니’ 했습니다. 태산은 중국 역대 황제들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한 곳으로, 대권을 꿈꾸는 한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복(福)을 비는 성산(聖山)으로 통해 왔습니다. 특히 ‘태산을 오르는 도중 비를 맞으면 뜻을 이룬다’는 속설은 한국 정치권에도 꽤 알려져 있어 비 맞기를 고대하며 태산에 오른 정치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당시 반 총장의 우중 태산 등정 얘기를 듣는 순간 그의 권력의지가 느껴졌습니다. 당시 “국내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만 되뇌던 그가 대권에 관심이 있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제 기사에 이렇다 할 반응이 없던 반 총장은 예상대로 유엔 사무총장 퇴임 직전 “10년 동안 유엔 총장을 역임하면서 배우고, 보고, 느낀 것이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 불살라서라도 노력할 용의가 있다”면서 출마 선언을 했습니다.

정작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출마 선언 후 고국에 돌아와 화려한 행보를 이어가던 그가 출마 선언 불과 20여일 만에 이번에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해버린 겁니다. 링에도 올라가 보지 않은 채 스스로 대권 의지를 꺾어버린 셈인데, 당시 불출마 선언을 두고는 ‘검증의 칼날을 견디기 힘들었다’ 등 여러 관측이 나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밖에서 생각하던 정치판과 실제 겪어본 정치판의 온도 차이가 이유였다고 봅니다. 그는 불출마 선언에서 ‘인격살해에 가까운 모해’를 운운했는데 태산을 오르면서 뭘 각오했는지 사실 좀 의아했습니다.

반기문 전 총장의 과거 얘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비슷한 궤적을 밟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 때문입니다. 그도 공직 임기를 8개월여 남겨두고 차기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위치까지 와버렸습니다. 그 역시 이렇다 할 정치적 기반 없이 정치권 바깥에서 자라고 있는 잠재적 제3후보입니다. 반기문 전 총장처럼 잔뜩 기대를 받다가 제풀에 꺾여버릴지, 아니면 진짜 대선까지 완주할지 지금으로서는 가늠하기 힘듭니다. 그가 권력의지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도 정확히 알 도리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변에서 훈수를 둘 수는 있어도 결국 스스로의 권력의지가 없으면 대선 완주는 불가능합니다.

주간조선도 기사로 다룬 바 있지만 윤 총장은 정무감각이 나름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수부 검사로 정권을 뒤흔드는 대형 사건을 맡으면서 길러진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검찰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벌인 정치와 진짜 정치는 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그가 대권 도전을 선언하는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던 보호막과 포장지는 한꺼번에 벗겨질 겁니다. 그가 기성 정당에 들어가거나 자기 세력을 만들지 않는 한 차기주자 윤석열은 완성되기 어렵습니다. 기본 자격을 갖춘 후에도 경쟁자들과 끊임없이 비교되면서 자체 발광(發光)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그가 그런 자질을 가졌는지도 지켜봐야 할 대목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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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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