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휴대폰으로 기사를 정독하곤 합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웬만한 매체의 주요 기사를 죽 훑습니다. 이번주에는 무슨 뉴스를 다루고 무슨 뉴스를 버릴지, 관심 가는 뉴스를 어떻게 소화할지 나름 신경을 써가면서 기사를 읽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근무시간과도 다름 없는 지하철 기사 읽기를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국무총리 정세균입니다. 음식 ‘더러 먹기’…”

처음 귀에 거슬린 건 ‘더러 먹기’라는 발음이었습니다. 분명 음식 ‘덜어 먹기’라는 의미일 텐데 제 귀에는 이상하게 ‘더러 먹기’로 들리면서 신경을 긁었습니다. 귀로 파고드는 총리의 이어지는 말은 이른 아침 생뚱맞기 그지없습니다. “위생적인 수저 관리, 종사자 마스크 쓰기. 모두가 건강해지는 세 가지 습관입니다. 함께 지켜주세요.”

나름 친숙한 목소리였지만 별로 반갑지 않았습니다. 아침 출근길 힘든 하루를 또 견딜 준비를 하는 지하철 승객들이 대한민국 총리로부터 음식 덜어 먹기와 위생적인 수저 관리에 대한 당부를 들어야 하는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지하철 스피커로 총리의 말이 왕왕 쏟아질 때 승객들은 다들 고단한 표정입니다. 졸거나 휴대폰으로 뭔가를 들여다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뉴스는 심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폭등하는 전셋값과 집값, 취업난과 실업난, 자꾸 늘어나는 세금, 거기다가 1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다툼, 최근에는 코로나19 3차 유행까지 하나같이 우울하고 짜증 나는 소식들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우울하고 피곤한 시민들 귀에다 총리는 음식 덜어 먹으라는 당부를 합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우울한 소식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여당 차기주자 중 한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면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뉴스를 검색해 보니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선거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지하철에 이름과 목소리를 알리는 거 같다” “지하철에서 대선 운동을 한다” 등 비판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는군요.

출근길 처음 총리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방송 사연이 궁금해 서울교통공사에 알아 보니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캠페인이라고 합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추진하는 ‘식사문화 개선 캠페인’에 총리가 직접 나섰다는 겁니다. 12월 22일까지 방송이 이어진다는데 서울 지하철 노선 중 승객들이 가장 많은 2호선의 10개역에서 총리의 음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덕분에 저는 출퇴근길 포함해 하루에 4번씩 총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총리의 목소리를 선뜻 반기지 못하는 배경에는 분명 ‘정치 혐오증’이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시민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난제들을 해결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난제의 진원지로 자리 잡은 지 오래입니다. 정치인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가 공감 능력이라고 들어왔지만 요즘 우리 정치인들을 보면 정반대의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빠져들고 자신과 다른 목소리에는 귀를 닫는 능력들만 탁월해 보입니다. ‘검찰개혁’이 얼마나 정당성을 갖는지 모르겠지만 주변의 만류와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칼을 휘두르는 추미애 법무장관이 대표적입니다. 추 장관이 검찰총장 직무배제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지금이 이럴 때인지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한 민주당 조응천 의원의 목소리가 신선하게 들리는 요즘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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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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