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공무원들은 흔히 ‘영혼이 없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가까이서 겪어봤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재빨리 입장을 뒤집는 공무원들을 보면 놀랄 정도입니다. 영혼은 고사하고 줏대와 자존심도 다 버리고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영혼이 없다는 건 분명 비아냥 어린 비판이지만 공무원들끼리는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남다른 처세술의 소유자라는 겁니다. 실제 정권 초·중반기까지는 좋은 자리에서 승승장구하다가 정권 말기로 접어들면 아무도 관심 없는 조용한 자리로 피해 가서 ‘신분 세탁’을 노리는 고위 공무원들도 꽤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나면 옛 정권과는 전혀 무관한 신선한 얼굴이 돼 다시 출세 코스를 달리면 동료들은 부러워합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영혼은 사치이고 생존술이 더 중요할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의 한마디에 공무원들의 생사여탈권이 달린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이 최근 정권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국토교통부가 최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제출한 ‘가덕도신공항 특별법 검토 보고서’에서 “가덕도신공항 특별법 찬성은 공무원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라며 대놓고 반대 의견을 내놓은 겁니다. 대통령 한마디에 멀쩡한 원전까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공무원의 나라에서 놀랄 만한 일입니다. 국토부는 가덕도신공항 건설 비용이 7조5000억원이라는 부산시의 입장에 맞서 “접근교통망 확충, 국제선과 국내선, 군시설 등을 갖추는 비용을 고려하면 사업비가 모두 28조6000억원에 이른다”고 추정했습니다. 국토부는 보고서에서 “직무유기란 정당한 이유 없이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유기한 경우”라며 “절차상 문제를 인지한 상황에서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에 반대하지 않는 것은 이에 해당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러한 국토부의 반기가 단순히 면피용일 수 있다는 의견도 많지만 사실 공무원들의 속내는 복잡할 겁니다. 무엇보다 현 정권에서 탈원전 정책을 수행하느라 월성 원전의 경제성을 조작했다가 탈이 난 산업통상자원부의 교훈이 눈에 밟힐 겁니다. 정권의 요구를 무조건 떠받들다가 법적 처벌을 받으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연금 혜택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공무원들의 신분보장이 왜 중요한가라는 문제입니다. 사실 요즘 여당 의원들이 주문처럼 되뇌는 ‘선출된 권력’ 앞에서 공무원들은 무기력합니다. 일단 선출된 권력이 하라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게 대한민국 공무원들의 처지입니다. 민주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미국만 해도 19세기 초까지는 공무원들의 신분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공무원들도 100% 교체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공직 임용의 기준을 정당에 대한 충성도나 정치적 신념을 기준으로 삼는 엽관제도(spoils system)가 당연시됐습니다. 하지만 미국도 1883년 팬들턴 공무원법을 제정하면서 공무원들의 신분을 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즘의 상식으로는 뻔한 것들입니다. 권력과 결탁한 공무원들의 부패, 그리고 정권마다 나라를 혼돈에 빠뜨리는 정책의 무일관성이 끼치는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이번 국토부 공무원들의 반기는 어쩌면 ‘어떤 정권이든 공평하게 봉사한다’는 신분보장 직업 공무원제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외침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이 아니라고 하면 진짜 문제가 있는 겁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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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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