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별명이 ‘호랑이’였습니다. 군대에서 유격 조교였다는 사실을 자랑하던 이 선생님은 성적표를 나눠주는 날이면 유격 조교가 쓰는 것 같은 빨간 모자 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곤 방과 후 학교에 남을 아이들 이름을 죽 불렀습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등수가 선생님과 합의한 목표에 못 미치는 아이들이었는데, 저 역시 불행하게도 거의 1년 내내 학교에 남아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와의 약속’을 못 지킨 문제아들을 텅 빈 운동장에서 굴렸습니다. 나중에 입대해 논산훈련소에 가보니 웬만한 얼차려 동작은 그때 다 해본 것들이었습니다. 선착순 오리걸음을 몇 번 돌고 나면 다들 구역질을 해대며 비틀거렸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큰 문제로 비화할 학대일 수 있지만 그때는 그게 교육이고 선생님의 역할로 여겨졌습니다.

그래도 저한테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1년 내내 얼차려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선생님과 합의한 목표가 과연 공정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비교적 성적이 좋았는데도 선생님이 제시한 반(半)강제적인 높은 목표 탓에 저보다 성적이 나쁜 아이들처럼 ‘무사’ 귀가를 못 하는 현실이 못마땅했습니다. 선생님은 목표를 몇 번 달성하면 더 높은 목표를 제시하곤 했는데 유독 저한테는 처음부터 너무 높은 목표를 제시한 것 아니냐는 불만도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한테는 입도 뻥긋 못 하고 얼차려를 1년 내내 받았습니다.

나중에 기자 초년 시절 호랑이 선생님에게 저녁을 대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야 “그게 공정한 벌이었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더 잘할 수 있는데도 너처럼 게으른 놈한테는 벌을 주는 것이 맞는다”면서 “차별화된 목표가 공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지금 돌이켜 보면 선생님의 기준과 벌은 공정 여부를 떠나서 저한테 들이닥칠 능력주의와 줄세우기에 대한 훈련이자 대비였다고 여겨집니다. 실제 중학교 2학년 이후로는 저한테만 적용되는 목표와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고입 연합고사, 대입 학력고사 등 인생 자체가 잔인한 줄세우기의 연속이더군요. 그것도 수십만 명의 응시생을 일렬로 늘어놓는 줄세우기가 인생의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아마도 호랑이 선생님은 험난한 세상에 대비할 근육을 키워주기 위해 그런 다단계 목표 달성 같은 훈련을 시켰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주 주간조선을 보면 공정과 능력주의에 대한 글이 두 편 있습니다. ‘지금 이 책’에서 소개한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의 폭정’은 과정이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능력주의는 성패를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돌려 사회적 연대와 시민적 덕성을 해친다고 주장합니다. 또 김상철 평론가는 기고에서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낳는다지만, 현실은 다르다. 반칙과 특권이 불평등의 벽을 쌓고 있다. 그런 불평등이야말로 능력주의를 부른다’고 썼습니다. ‘능력주의를 시대의 대안으로 만든 것은 젊은 야당 대표가 아니라 정부’라는 김상철씨의 주장에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공정의 최소한의 덕목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제대로 된 능력주의조차 발휘되지 못하고 그 틈을 반칙과 특권이 파고드는 현실에 젊은이들은 더 절망합니다. 능력주의를 넘어서는 덕성과 연대는 어찌 보면 그다음의 문제일지 모릅니다. 이상론일 테지만 차기 대선에서 능력주의와 사회적 연대와 시민적 덕성을 제대로 비벼낸 공정의 잣대를 들고나오면 당선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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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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