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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2호]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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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5주년]DMZ 내 대성동 마을 30년 만에 리모델링

황은순  차장  /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 대성동 마을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
북한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찍어낸 듯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들이 늘어선 북한 마을이 벌판 너머로 펼쳐져 있고 마을 서북쪽으로 개성공단이 보인다. 마을에서 개성공단까지는 직선거리로 4㎞, 걸어가더라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단다. 육안으로도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북한 마을의 풍경은 한반도의 여느 곳과 다를 바가 없다. 마을 가운데 높이 솟아오른 게양대 위에서 펄럭이는 인공기가 갈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비무장지대(DMZ) 내에 있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민간인 마을, 대성동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의 풍경이다. 남한의 대성동과 북한의 기정동은 분단이 낳은 쌍둥이 마을이다. 북한의 기정동은 물론이지만 남한인 대성동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1951년 10월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회담에서 두 마을이 ‘비전투지역’으로 지정된 이후 대성동은 유엔사령부가 관할하고 있다. 한국법보다 유엔사의 규정이 우선한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육지 속 섬처럼 고립된 대성동을 ‘통일맞이 첫 마을’로 가꾸기 위한 리모델링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대성동에는 현재 49가구 207명이 살고 있다. 대성동이 현재의 마을 틀을 갖춘 것은 1971~1972년과 1978~1980년, 두 차례에 걸친 대성동 종합개발을 통해서다. 그 이후 대성동은 세월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30여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 대성동은 미수복 지역으로 돼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 주택이나 농지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주택의 경우 1970년대 정부가 지어준 집을 손대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보니 노후화가 심하다. 1970년대 마을 종합개발도 주민의 삶보다는 남북한 체제 경쟁에 따른 선전의 목적이 컸다. 오랫동안 불편을 감수해온 주민들에게 노후주택 보수는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지난 1월 9일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대성동 마을을 방문했다가 주민들의 건의를 듣고 지원을 약속하면서 시작됐다. 노후주택 보수를 넘어 마을 경관 개선 등 큰 그림이 그려지면서 대성동 마을 전체를 리모델링하는 ‘통일맞이 첫 마을’ 프로젝트가 만들어졌다. 대성동을 ‘분단의 상징’이 아닌 ‘통일의 희망’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행정자치부는 이를 위해 건축, 조경, 작가, 예술가 등 전문가가 참여한 자문단과 실무추진단을 구성했다. 관 주도가 아닌 민, 관, 기업, 시민단체 등이 머리를 맞대고 온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 낼 계획이다.
   
   총괄감독은 정진국(58)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가 맡았다. 그동안 프로젝트팀은 현장 방문과 회의를 거쳐 마을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고민해 왔다. 지난 4월 28일 주민간담회를 열고 주민들의 의견도 수렴했다. 오는 7월 23일 대성동에서 그동안 해온 고민의 결과물인 마스터플랜이 펼쳐진다. 이와 함께 기업, 시민단체 등이 모여 프로젝트 추진을 위한 협약식을 가질 예정이다.
   
   지난 6월 12일 주간조선은 총괄감독을 맡은 정진국 교수와 함께 대성동을 찾았다. 대성동의 실태를 보고 정 교수로부터 프로젝트의 방향을 듣고 싶어서였다. 대성동의 행정구역 명칭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유엔사에 취재 신청을 한 후 몇 차례 날짜를 연기하는 우여곡절 끝에 대성동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남방한계선을 지나 비무장지대를 달려 마을로 가는 도로는 1번국도. 목포에서 시작해 신의주까지 연결되는 한국의 최장 국도(496㎞)이다.
   
   취재진을 태운 버스가 마을 입구에서 멈췄다. 취재를 위해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라고 크게 적힌 마을 입구 간판을 촬영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취재진에 촬영이 허가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진촬영은 유엔사의 OK 사인이 없으면 안 된다. 대성동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민정중대가 24시간 주둔하고 있고 보안이 철저했다. 주민 안전을 위해 마을 위치를 노출시킬 수 있는 정보는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 대성동 마을 입구. 대성동의 행정구역 명칭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다.

   마을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국기 게양대다. 높이는 99.80m. 한국에서 가장 높은 게양대이다. 처음엔 다른 장소에 40m 높이로 있었다. 19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85m로 올렸다가 1982년 1월 국기봉 보수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높이가 됐다. 원래 80m에 그쳤던 기정동의 인공기도 한국 측이 공사를 하자마자 그 다음 달 165m까지 높였다.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는 가로 12m, 세로 19m 크기로 2~3개월마다 교체하는 비용만 200만원이 든다. 남북 대치의 현장을 한눈에 보여주는 태극기와 인공기 간의 거리는 불과 1.8㎞이다.
   
   마을회관 2층에 올라가니 육안으로도 북측이 한눈에 보였다. 옥상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위대한 김일성과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글씨가 적힌 선전탑이 또렷이 보였다. ‘자유의 마을 대성동’과 ‘평화의 마을 기정동’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무엇보다 두 마을 사이에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을 뿐 경계를 알 수 있는 시설물이 전혀 없다. 단지 마을 사람들이 ‘동그란 산’이라고 부르는 작은 숲이 사이에 있을 뿐이다. 과거에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작은 말뚝이 있었는데 현재는 흔적도 찾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경계가 확실하지 않다 보니 잘못해 군사분계선을 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1997년 가을 ‘도토리 사건’이 있었다. 마을 토박이인 홍승순씨(당시 68세)가 아들과 함께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도토리를 줍다 북한군에 끌려가 5일 동안 억류돼 있다 풀려났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됐다. 홍씨 모자는 북에서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조사를 받느라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동그란 산 앞쪽으로 대성동 마을 시설인 팔각정이 있다. 군사분계선과 불과 200m 거리로 남한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된 시설물이다. 사정권에 있다 보니 북측과 접한 쪽은 방탄유리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 1993년 5월 13일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대성동 마을과 자매결연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곳 대성동과 이름이 같은 제주도 대성동 마을은 제주도 최남단에 있는 마을이다.
   
   대성동 마을의 속살을 보기는 어려웠다. 대성동 마을에서는 동선이 철저하게 제한돼 있다. 이날 취재도 공회당과 초등학교 등 유엔사와 사전 협의된 범위 내에서 민정중대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마음대로 볼 수도 없고 사진촬영도 힘든, 취재진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그나마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마을을 공개한 것이라고 했다.
   
   “6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일 겁니다.”
   
   마을 이장 김동구(47)씨가 주간조선의 요청에 따라 마을의 골목길 중 한 곳의 촬영을 허락하면서 말했다. 리모델링 프로젝트와 함께 대성동 마을도 60여년 꼭꼭 닫아 걸었던 빗장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 것이다. 정 교수도 “총괄감독을 맡고 네 차례 이곳을 방문했는데 오늘처럼 많은 곳을 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 대성동의 유일한 근대건축물인 공회당. 마을기록전시관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마을을 훑어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변화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정 교수는 고민이 깊었다. 정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를 “미화나 치장보다 삶의 터전으로서 대성동 마을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통일이 되기 전 고립된 섬과 같았던 서베를린도 활기를 잃고 주민이 계속 떠났다. 서베를린 당국은 도시를 살리기 위해 ‘베를린국제건축전(IBA)’이라는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주거를 중심으로 대규모 정비계획을 세웠다. 주거의 질을 높이면서 주민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서베를린처럼 대성동도 더 이상 고립된 섬이 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남과 북의 단절을 해소하는 능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땅이 이어져 있듯 마음도 이어져 있었던 그때를 하루라도 빨리 다가오게 하려면 화려하고 거창한 제안보다는 보통의 마을들처럼 가장 기본적인 마을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정 교수는 프로젝트의 기본원칙이 ‘보존’이라고 밝혔다.
   
   행자부는 일단 노후주택 보수에 20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사영배 행자부 지역발전과 서기관은 “한 가구당 예상비용은 5000만원인데 국민후원금을 포함해 행자부에서 4000만원을 지원하고 1000만원은 주민 자부담으로 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상하수도 개선사업도 실시한다. 농사가 절대 수입원인 마을 주민들에게 농업용수는 생명의 물과 같다. 올해 가뭄이 들면서 주민들의 마음도 타들어갔다. 다행히 취재를 갔던 날 통일대교로부터 8㎞ 길이의 임시수로를 설치해 임진강 물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임시수로를 영구시설로 바꾸기 위해 내년부터 3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근대건축물인 공회당은 마을기록전시관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1959년에 지어진 공회당은 초등학교 졸업식, 마을 집회 등 마을의 주요 행사가 열리던 장소로 1980년 마을회관 등이 지어지면서 방치돼 왔다. 블록과 붉은 벽돌을 함께 사용한 공회당 건물은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을 뿐더러 대성동 관련 기록물들을 전시해 대성동 마을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할 예정이다. 국가기록원이 나서 관련 기록들을 수집하고 있다.
   
   민간기업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마을회관에 기가오피스를 지원하는 KT를 비롯해 KT&G, LH공사, 청호나이스 등이 후원을 약속했고 한국해비타트는 성금모금을 위한 국민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다. 마을 이장 김동구씨는 “10년 동안 줄기차게 요구해 왔는데 이제야 숙원사업이 이뤄지게 됐다”면서 “가장 급한 것은 단열 문제이다. 겨울엔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데 30년 전에 블록으로 지은 집이라 단열이 전혀 안 된다.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가 감당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대성동의 주택은 애초에 단열이나 편의성보다 전시용이었다. 북한 기정동을 마주보며 조성하다 보니 주택으로서는 최악인 서향으로 지어졌다. 마을회관에서 내려다본 주택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가까이 가보면 서까래가 썩고 균열이 심하다. 지붕이 새는 집도 허다하다. 장마 때면 양동이를 받쳐놓고 산다. 마을회관 옆에 있는 윤용복(57)씨의 주택도 균열이 심했다. 대성동 주민인 남편을 만나 1976년 결혼한 이후 대성동에 살고 있다는 윤씨는 “손이 들어갔다 나올 정도로 벽이 갈라지고 지붕도 새고 내려앉았다. 겨울에 난방비가 40만원이 넘는데 겨우 냉기만 없애는 정도다”라고 말했다. 아들, 며느리, 손주와 함께 3대가 살고 있다는 윤씨의 집을 들여다보니 66㎡(20평) 공간은 마치 피난 살림처럼 어수선했다. 부엌 옆에 달린 다용도실 한쪽 벽에 세로로 굵은 금이 쫙 가 있었다.
   
▲ 대성동 마을의 한 주민이 금이 간 자신의 집 벽을 가리키고 있다.

   윤씨가 “외부에 대성동 마을 사람들은 잘산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면서 하소연을 했다. 마을에는 구멍가게 하나도 없다. 생활용품 하나라도 사려면 차를 타고 문산까지 나가야 하는데 버스는 하루에 3번이 고작. 집집마다 무리해서라도 자동차를 두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또 쌀농사가 대부분인 주민들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력이다. 외부출입이 제한돼 있다 보니 인력 구하기가 어려워 농기계 의존율이 높다. 농사 시기가 비슷하니 품앗이를 하기도 어렵게 돼 있다. 윤씨는 외부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밖에서는 차도 있고 농기계도 많으니 부자인 줄 알지만 속 모르는 소리다”고 말했다.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대성동에 사는 이유는 뭘까. 주민 김진웅(50)씨는 “부모님이 살았고 내 삶이 있는 터전인데 쉽게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대성동 주민들은 제한된 자유를 누리는 대신 병역면제와 소득세면제 혜택을 받고 있다. 수확한 쌀, 콩 등 농산물은 파주시에서 수매를 해 준다. 대성동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대성동에서 태어났거나 대성동으로 시집을 온 경우만 가능하다. 남자가 대성동 여자와 결혼을 한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대성동에는 다른 곳에는 없는 규칙들이 많다. 일정기간 거주해야 주민 자격이 유지되기 때문에 저녁마다 점호가 이뤄진다. 또 32세가 되면 대성동에서 살지 나갈지를 결정해야 한다. 외부에서 살던 주민들이 다시 대성동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경우엔 주민 회의를 거치고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마을의 주요 안건은 주민회의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외부 거주가 인정되는 경우는 학교에 다니는 기간이다. 대성동에는 초등학교밖에 없다. 대성동초등학교는 한때 아이들이 없어 폐교 위기에 처했다. 마을의 유일한 공공기관인 초등학교는 살려달라는 주민의 요구에 따라 파주시에서 광역학군제를 만들어 대성동 마을 밖의 학생들도 대성동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게 했다. 현재 학생은 35명. 그중 대성동 아이들은 5명 정도다. 나머지는 문산 등지에서 다니는 학생이다. 영어특성화학교로 지정돼 있는 데다 학생 수가 적어서 1 대 1 교육이 이뤄지다 보니 매년 신청자가 많다. 정원을 늘리지 않은 탓에 현재도 전학 대기자가 50여명이 밀려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부터는 외지로 나가야 한다.
   
   대성동은 강릉 김씨 집성촌이다. 13대손인 김동구씨는 중학생 때부터 대성동을 떠나 대학까지 다니고 24살에 돌아왔다. 군 면제 혜택이 있어서 좋겠다고 하자 김씨는 “대성동에 사는 것 자체가 군생활이나 다름없다”고 답했다.
   
   매일 눈앞의 북한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저수지 2개가 진즉 바닥을 드러내는 바람에 밤잠 설치며 마음고생했다는 김동구씨는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논에 물을 댈까 그 생각밖에 안 나더라”면서 웃더니 “만약 대성동 주민들이 없었다면 DMZ는 숲만 우거져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터전을 잡고 논밭이 펼쳐져 있으니 긴장감이 훨씬 덜한 것이다. 남북이 같이 잘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의 말도 정 교수의 생각과 닿아 있었다. 대성동이 진짜 삶의 터전이 되는 길이 곧 통일의 길이다. 올해는 6·25전쟁 65주년이다. 내년까지 ‘통일맞이 첫 마을’ 프로젝트가 완성되고 대성동이 새로운 마을로 거듭나면 대성동으로 가는 길도 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기대해 봤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을 검색하기 위해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켜니 ‘찾을 수 없는 지역’에 있다는 메시지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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