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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2호]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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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5주년]참전 계기로 NATO 가입 한국 간청으로 1971년까지 주둔

6·25 참전 터키군의 숨겨진 이야기

이희철  터키 정경문화연구소장 

▲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한 터키의 6·25 참전용사 5명이 부산시 남구 유엔기념공원 내 터키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photo 연합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6·25전쟁에서 한국을 도와 준 유엔 참전국의 희생과 원조를 기억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들 참전국 중 터키는 1950년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미국(178만9000명), 영국(5만6000명), 캐나다(2만5687명) 다음 네 번째로 많은 연 병력 1만4936명을 파견하였다. 1950년 6월 당시 터키 민주당(DP) 소속의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터키는 의원내각제 국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부터 한국전쟁 지원 요청을 받자 국회 동의도 없이 즉각 파병을 결정했다. 이는 파격적인 정치적 결정이었다.
   
   터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냉전시대에 서구 진영에 편입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그즈음 저 멀리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 터키에는 ‘기회’였다. 멘데레스 총리는 해외파병 문제를 놓고 야당과 갑론을박 말다툼할 시간이 없었다. 멘데레스 총리는 7월 18일 내각회의에서 국회의 승인 없이 ‘돌직구식’ 파병 결정을 내렸다. 야당은 국회 승인 없이 한국에 파병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정부를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에도 야당 측은 전사자 소식이 계속 들려오는데 어떻게 젊은이들을 한국에 보낼 수 있냐며 정부를 몰아세웠다. 멘데레스 총리는 “나에게도 세 명의 아들이 있다. 만약 오늘 소집명령서가 온다면 3분도 생각할 필요 없이 즉각 아들 셋을 전장에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조국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맞섰다. 터키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2월에 서방 국가들의 집단적 안전보장 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였다.
   
   터키는 한국전쟁에서 전사 765명, 부상 2147명, 실종 175명, 포로 346명 등의 인명피해를 보았다. 인명피해 규모로는 미국, 영국 다음으로 세 번째이다. 부산 유엔묘지에는 462명의 터키 용사가 잠들어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장병은 거의 모두 자원자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터키 여단은 참전 초기 군우리(평남 덕천) 전투에서 고전하였으나, 김량장리(경기 용인) 전투에서 백병전으로 승리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다.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벌어진 김량장리 전투는 군우리 전투에서 패배한 터키군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연합군의 사기를 충전시켜 한국전의 전세를 반전시킨 중요한 전투였다.
   
   매년 1월 25일이면 터키 수도 앙카라의 한국공원에 있는 한국전참전추모탑 앞에서 한국전 참전용사, 터키군 대표단과 한국전 참전 각국 외교단들이 참석한 가운데 터키군의 김량장리 전투 승전 기념식이 엄숙하게 열린다. 앙카라의 겨울 날씨 중 1월 하순경에 영하의 추위가 절정에 이른다고 한다. 작년 행사 때 앙카라에서 만난 고령의 유수프 귀나이든 한국전 참전용사는 “우리는 이 추위보다도 훨씬 더 매서운 추위 속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했다”면서 그날을 상기시키며 전사자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바라보았다.
   
   터키군이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용맹성과 희생정신에 대해서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1971년까지 터키군이 한반도에 남아 있었고, 1960년대 터키군이 철수를 결정하자 미국과 한국 정부가 터키군의 주둔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외교부는 생산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공개하고 있다. 외교부의 외교사료관에 남겨진 외교문서에는 한국전쟁 이후 터키군의 주둔을 위해 한국 정부가 얼마나 긴박하게 외교적 노력을 해 왔는지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나는 외교사료관에서 “한국전쟁 이후 터키군의 한국 주둔 문제”와 관련한 외교문서를 찾아내어 시간의 흐름을 엮어낼 때, 묻혀진 역사를 찾아내는 흥분과 설렘을 느꼈다.
   
▲ 6·25 당시의 터키군 모습.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한국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말까지 미국과 터키, 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는 모두 철병했다. 터키와 태국만이 1개 중대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터키와 태국 병력은 유엔사령부의 한 상징으로 남았고 반공정책을 시행하던 한국 정부로서는 이들의 잔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터키는 1950년부터 1960년까지 10년 동안 10개 여단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1960년 터키 군사혁명 직후, 터키 정부는 한국 파견 여단 병력을 그해 8월에 중대병력으로 감축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한국 정부는 1962년 2월 12일 주터키 대사대리로부터 주한 터키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보고를 접수하였다. 주한 터키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정보 출처는 터키 주재 미국 국방무관이었다. 며칠 후인 2월 20일 히크메트 하이리 안르 주한 터키 대사는 최덕신 외무장관을 면담하고 주한 터키 군대의 철수 결정을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 터키군의 갑작스러운 철수 계획에 대해 정부는 당황했다. ‘돌발 상황’이었다. 한국 정부는 터키 정부에 주한 터키군 철수 문제를 재고해 줄 것을 터키 주재 대사대리에게 긴급 지시하고, 터키 주재 미국대사관 측과도 긴밀히 협의해 나가도록 지시를 내렸다.
   
   당시 한국 정부는 터키군이 주둔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터키군은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공산세력에 맞서 수많은 공헌을 했는데, 터키군이 철수하는 것은 한국의 방위를 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터키군이 철수한다면, 유엔군의 국제적 성격이 저하되어 미군이 한국을 강점하고 있다는 공산 측의 악선전에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터키군 주둔을 위한 한국 정부의 숨 가쁜 외교적 교섭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안르 주한 터키 대사가 1962년 3월 20일자 공한을 통해 한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주한 터키군의 철수를 1년 연장한다는 터키 정부의 결정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로 터키군의 한국 주둔이 가까스로 1년 연장되었다. 터키군의 주둔을 위한 교섭은 매년 이루어져 1963년, 1964년에 이어 1965년에도 1년씩 주둔이 연장되었다.
   
   1965년 중반에 이르러 터키군의 철수 문제가 다시 거론되어 한국 정부를 긴장시켰다. 5월 25일 터키 주재 지연태 대사대리는 터키 주재 하트 미국 대사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터키군 참모총장이 드와이트 비치 유엔군사령관에게 주한 터키 중대를 철수하고, 대신 연락장교만을 잔류시키겠다고 통보하였음을 정부에 보고했다. 다음 날인 26일 터키의 쉴레이만 데미렐 총리는 한국에 주둔한 병력은 곧 철수할 것이며, 연락장교만 두겠다고 발표하였다. 데미렐 총리의 발표 직후, 한국 정부는 합동참모본부장 장창국 대장을 단장으로 한 특별사절단을 터키에 긴급 파견하였다. 또 이와는 별도로 김성은 국방장관을 파견하였다. 고위급 파견을 통해 터키 정부를 설득해보려고 하였다.
   
▲ 6·25 당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터키군.

   한국 정부 파견 인사들은 터키 정부에 철군 결정을 재고하여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지만, 번복시키지는 못했다. 터키 측은 군부와의 협의를 거쳐 철수를 결정했다고 한국 측에 밝혔다. 터키 외무부는 1966년 6월 28일 주터키 지연태 대사대리에게 주한 터키 의장대원으로 11명의 터키 분대가 곧 한국으로 출발할 것임을 알려왔다. 터키군의 철수 계획이 확고한 것을 파악한 한국 국회는 7월 9일 제20차 본회의에서 ‘터키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 한국 국회는 한국이 공산침략자들의 위협에 있을 때 터키의 전사들은 이 땅에서 확신과 정의에 입각한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고귀한 피를 뿌렸으며 용맹성과 헌신적인 전우애, 불굴의 정신은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다고 하면서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 6·25 당시 전선을 살피는 터키군.

   터키는 중대 병력을 철수시키고 1966년 7월부터 의장대 11명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그로부터 5년 후 또 한국 정부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1971년 1월 12일자 AP통신 기사였다. AP는 터키 일간지 밀리예트신문 보도를 인용하여 터키 정부는 주한 터키군을 철수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외신 보도 접수 다음 날, 한국 외무부의 함영훈 구미국장은 볼칸 우랄 주한 터키대사관 대사대리를 불러 외신 보도 내용에 대해 한국 정부는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주한 터키군은 그 수는 적으나 상징적 의의는 매우 크므로 계속 주둔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외무부는 주터키 대사에게도 터키 외무장관 또는 관계 요인들을 만나 주한 터키군이 철수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라고 지시했다. 여러 채널을 통해 터키 정부의 입장을 타진한 한국 정부는 터키 정부의 철수 결정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흐산 사브리 찰라얀길 터키 외무장관은 터키군을 철수시키는 이유는 예산 문제와 군기 확립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1971년 2월 15일 최규하 외무장관은 주한 터키군을 최종적으로 철수시킨다는 터키 정부의 결정을 전적으로 철회시킬 수는 없었지만, 주한 터키대사관에 근무하는 2명의 영관급 장교가 주한 유엔군 사령부에 대한 연락장교로 역할을 하게 되어 주한 유엔군에 대한 터키군의 체류는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최종 보고했다. 이로써 터키 정부는 의장분대 11명을 철수시키고 주한 터키대사관에 연락장교 2명을 체류시킴으로써 터키군의 한국 주둔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유엔군의 상징이었던 터키군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북한과 소련 등 공산진영과 맞대고 있는 한국의 안보는 물론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자유진영의 결속을 위한 또 하나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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