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0일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의 도시 크라스노야스크 겨울 수영 클럽 멤버들이 2013년의 상징인 뱀 형상을 이루며 사진을 찍고 있다. ⓒphoto 로이터
지난 12월 30일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의 도시 크라스노야스크 겨울 수영 클럽 멤버들이 2013년의 상징인 뱀 형상을 이루며 사진을 찍고 있다. ⓒphoto 로이터

“영하 40도 이상은 추위도 아니고 알코올 40도 이하는 술도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모스크비치(모스크바 사람)들은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긴다. 겨울을 극복하기 위해 산책하고 운동하는 것은 수백 년 된 전통이다. 사우나를 한 뒤 눈밭에서 뒹굴고, 호수나 강의 얼음을 깨고 수영을 하는 등 겨울나기 방법도 다양하다. 러시아인들은 “러시아를 이해하려거든 겨울을 경험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러시아에서 겨울을 나는 횟수는 군대의 계급장을 하나 다는 것과 같다는 농담도 있다. 러시아에서 겨울나기를 해야 인생의 연륜이 쌓인다고 말한다.

이미 러시아는 지난 12월 중순부터 영하 15~50도의 맹추위가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을 강타했다. 리아노보스티통신은 시베리아 지역에선 기온이 영하 30~50도까지 곤두박질치면서 고르노알타이스크와 노보시비르스크 등의 교통을 마비시켰고 울란우데 등 동부시베리아는 학교가 휴교하는 사태가 빚어졌다고 보도했다. 고드름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는 사고도 속출하고 있다. 북위 55도에 위치한 모스크바는 1~2월 평균기온이 영하 10도 안팎이지만 영하 20~30도로 떨어질 때도 많다. 거의 매일 눈이 내려 도시 전체가 눈에 파묻힌다.

러시아인들에게 겨울은 숙명이다. 오전 10시가 돼야 날이 밝아오고 오후 4시면 어두워진다. 해를 거의 볼 수가 없고 저기압 상태가 계속된다. 어둡고 침울한 날씨의 연속이다. 눈은 거의 매일 내리니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모스크바는 보통 9월 말이나 10월 초 첫눈이 내린다. 첫눈으로 시작된 겨울은 보통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되지만 길게는 5월 초까지 눈이 내리면서 무려 7개월 동안 겨울이 지속되기도 한다. 첫눈이 오기 전 9월 중순 2주 동안 러시아판 ‘인디언서머’인 ‘바비 레타’가 계속된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여자의 여름’ 정도로 변덕이 심한 여자의 마음을 뜻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처럼 청명하다.

이 시기가 지나면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면서 어느덧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게 모스크바 날씨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겨울 채비를 한다. 오이를 추수해 소금에 절여 지하에 저장하는 등 우리의 김장철에 해당한다. 또 스노타이어를 교체하면서 월동 준비를 한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는 것도 거르지 않는다. 러시아인들은 감기라면 치를 떤다. 감기를 중병으로 생각한다. 러시아 감기는 지독해서 하루이틀 새 달아나는 법이 없다. 걸리면 보통 2주 이상 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야말로 혹독한 경험을 한다.

눈 치우기 세계 최고

러시아는 눈이 아무리 내려도 도로가 빙판이 되는 법이 거의 없다. 시(市)가 제설(除雪) 작업을 워낙 신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겨울 동안 시 소속 제설 작업 인원은 24시간 가동된다. 지역별로 제설 인원이 정해져 있다. 제설 차량을 단위로 인원들이 배치된다. 특수 제설 차량 종류만 20여가지. 불도저는 기본이고, 염화칼슘 살포 차량에서부터 로봇 팔 모양을 한 제설차가 두 손으로 눈을 쓸어담는 특수 차량까지 다양하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모스크바 길거리에서는 어김없이 장관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불도저 4~6대가 사선을 이뤄 도로의 눈을 치우며 지나간다. 그 다음 빗자루가 달린 트럭들이 도로를 따라가며 눈을 쓸어낸다. 이어 마지막으로 도로 가장자리에 쌓인 눈을 제거하는 제설차가 잔설을 제거한다. 이렇게 3단계를 거치면 도로는 정상이 된다. 모스크바는 하룻동안 20~50㎝의 많은 눈이 내리기도 한다. 이런 날에도 출근길은 보통때와 다름없이 차량 소통에 지장이 없다.

아파트와 건물 옥상에서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눈을 치운다. 건물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될 수 있어 이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건물과 고가도로 교량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 제거는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필수다. 고드름을 제거하기 위해 총을 쏘기도 한다.

겨울에는 외출 복장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단단한 복장은 기본이며, 특히 신발과 모자에 신경을 쓴다. 신발은 목이 길어야 하고, 모자는 가죽으로 된 것이나 모피로 된 것이 일반적이다. 신발은 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바닥 홈이 깊게 파인 것을 신는다. 모자는 머리가 얼지 않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생명 보호의 수단이기도 하다. 모자를 쓰지 않고서 거리를 걷다가 자칫 봉변을 당할 수 있다. 도처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이 위험 요소다. 의외의 상황에서 고드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있다. 모자는 고드름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고드름은 20~30도의 혹한이 지속되다가 잠시 날이 포근해져 눈이 녹기 시작하면 도시의 흉기로 돌변한다. 빌딩 지붕 위에 매달린 고드름이나 고가도로에 매달린 얼음덩어리가 떨어지며 흉기로 변한다. 지붕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는 1m 넘는 고드름은 살인무기다. 길거리를 가다가 고드름을 맞고 사망하는 사고는 모스크바에서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래서 겨울 동안 모자를 쓰는 것은 이런 위험을 막는 훌륭한 자기 보호 수단이기도 하다.

지난 12월 30일 예니세이강에서 신년맞이 수영을 즐기는 시베리아 크라스노야스크 시민들. ⓒphoto 로이터
지난 12월 30일 예니세이강에서 신년맞이 수영을 즐기는 시베리아 크라스노야스크 시민들. ⓒphoto 로이터

겨울 운동은 러시아인의 일상

러시아어로 ‘굴랴치’는 산책을 뜻한다. 산책은 러시아인들의 일상이다. 영하 15~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에다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마찬가지다. 산책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러시아인들의 생활 습관이다. 어린아이도 예외가 아니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남부의 트로파료프스키공원.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에도 산책 나온 모스크비치들로 종일 북적거린다. 엄마들이 유모차에 유아를 태운 채 산책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유모차 속의 아이들은 포대기로 온몸을 감싸거나 외투와 모자로 중무장시킨다. 하지만 얼굴은 노출돼 있거나, 호흡하기 편하게 코를 노출시킨다. 러시아 의사들은 “햇볕과 공기, 물은 유아 건강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라며 엄마들에게 “겨울에도 하루 2~3시간 아이와 함께 산책할 것”을 권장한다. 특히 태양을 볼 수 없는 모스크바의 겨울 동안 드물게 해가 나는 날 산책은 무조건 하라고 권한다. 아이들에게는 일조량 부족으로 충당하지 못한 비타민D와 요오드를 별도로 섭취하도록 하는 것이 거의 의무사항이다. 모스크바는 일반적으로 집 주위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공원과 숲을 접할 수 있다. 루스키(러시아인)는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산책을 습관화해 겨울과의 공존법을 배운다.

모스크비치들이 즐기는 겨울 스포츠는 노르딕 스키를 이용한 크로스컨트리. 산과 언덕이 없는 모스크바에서는 평지에서 조깅하듯 스키를 탄다. 아파트 단지나 동네에 조성된 운동장은 겨울이면 아이스하키장이 된다. 남녀노소가 스틱을 들고 아이스하키를 즐긴다. 겨울이면 숲속 호수가 얼어 스케이트장이 되고 언덕은 슬로프가 된다. 길거리나 숲 어디서나 스키를 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모스크바 전역이 동계 스포츠판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식 건강비법은 겨울 수영

모스크바 남부 베케트호수는 얼음물 수영을 취미로 하는 ‘러시안 모르쉬’, 이른바 해마(海馬)클럽 회원들의 무대다. 호수 주변에는 새벽녘부터 30여명이 조깅과 철봉을 하며 워밍업을 한다. 10대 남녀부터 80대 노인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회원들은 20~30분간 스트레칭을 하며 땀을 낸 뒤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호수에 들어가기 전 해마들은 “우리는 상관없다.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다. 오직 물속에서 수영을 할 뿐이다”라고 노래하면서 분위기를 돋운다. 회원들은 “영하 20도가 넘는 날 하는 수영이 제맛”이라고 말한다. 얼음물에 뛰어든 해마들은 수영을 하고 눈밭에 나와 조깅을 한 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베케트호수 해마클럽은 1975년 조직됐으며, 회원은 약 100명이며 이 중 3분의 1은 여성이다. 주로 새벽 시간에 수영을 즐기지만 낮에도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다. 90세가 다 돼가는 블라디미르 사트게트(88)씨는 얼음물 수영 경력 40년째다. 사트게트씨는 2차대전 당시 독일과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총상을 당한 상이용사다. 그는 “총상 후유증으로 백약이 무효였지만 얼음물 수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고 했다. 모스크바에는 호수를 중심으로 한 해마클럽 회원 수천 명이 한겨울 얼음물 수영을 즐기고 있다. 얼음물 수영은 이미 러시아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햇볕이 없는 겨울에 사우나를 하면서 찬물 속이나 눈밭에서 몸을 씻었지만, 지금은 얼음물 수영이 사우나와 분리돼 하나의 취미로 굳어졌다.

사우나와 보드카

보드카와 사우나는 러시아 겨울을 나기 위한 최고 조합이다. 보드카로 열량을 채우고 운동 부족량을 사우나로 대신해 땀을 흘리며 체내 노폐물을 내보내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보드카는 추위를 이기게 하는 최적의 상품이다. 저기압으로 인한 두통을 치료하며, 사우나 분위기를 돋우는 만병통치약으로도 통한다. 낮 시간이 짧고 금세 어두워져 보드카를 찾는 루스키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겨울 보드카 소비량은 여름보다 3배 이상 늘어난다. 보드카 안주로는 교외 텃밭에서 재배한 오이와 토마토, 배추 등을 소금에 절인 것들이다, 러시아 가정에는 보드카와 이런 음식들이 냉장고에 꽉 채워져 있다. 겨울철 신선한 채소를 자주 먹지 못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이들 음식은 보드카 안주일 뿐 아니라 최고의 비타민 함유 식품이다.

러시아에서는 볼쇼이극장 등 공연장의 휴식 시간에도 보드카 몇 잔을 마시는 게 문화로 정착돼 있다. 이처럼 러시아인의 보드카 사랑은 겨울에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겨울 눈밭에서 골프 치는 행사도 생겨났다. 철저하게 겨울을 즐기며 극복하려는 러시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도 보드카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눈밭에 보드카병을 꽂아둔 채 샷을 할 때마다 보드카를 마시기도 한다.

사우나와 보드카를 찾는 또 다른 이유는 저기압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기압이 낮다 보니 시민들은 두통을 자주 앓는다. 러시아는 겨울 동안 기압이 700~800으로 낮다. 외국인들 역시 두통을 호소하지만 저기압으로 인한 것이라 딱히 치료법이 없다. 보드카를 마시든지 사우나를 하는 방법이 좋다고 한다. 마땅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러시아인들은 이를 습관으로 여긴다. 보드카야 쉽게 사서 마실 수도 있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인데 매일 마시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사우나도 한국과 같은 대중 사우나는 찾기 어렵다. 러시아 사우나란 개인적으로 이용하거나 몇 명이 함께 예약해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다. 사우나를 하고서 눈밭에 뒹굴기도 하고 얼음을 깨고 강물에 뛰어들면서 호기도 부린다.

저기압을 극복할 수 있는 즉효약은 햇볕이다. 일조량이 적은 겨울이라 어쩌다 잠시 해가 나는 날이면 모스크비치들은 식물이 광합성을 하듯 베란다에 나가 태양을 흡입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은 겨울 동안 터키와 이집트, 스페인 등 따뜻한 나라로 여행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12월 말~2월 이집트, 터키, 스페인 등은 러시아 관광객들 차지가 된다.

볼쇼이 공연장은 초만원

겨울철 볼쇼이극장 등 각종 공연장은 만원이다. 공연 관람은 짧은 낮 시간에 대한 보상이다. 공연장의 화려한 장식에다 밝은 조명을 보고 짧은 일조량을 보상받는다는 생각에서다. 모스크바에는 수백 개의 공연장이 있다. 지역마다 그리고 시내 어디를 가든 공연이 널려 있다. 발레, 오페라, 연극과 뮤지컬을 겨우내 보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공연과 전시장을 찾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봄을 맞는다”는 모스크비치들도 상당하다.

러시아의 예술 발달이 겨울에서 기인했다는 주장도 있다. 러시아의 긴 겨울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연문화 예술이 반복되면서 문학과 예술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부모를 따라 예술 공연을 일찌감치 경험한 아이들이 예술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혹한과 칠흑의 어둠이 있기에 러시아의 음악과 미술이 발달하고 예술가들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러시아 교육자들도 러시아의 혼이 겨울을 견디는 인내력과 자연을 극복하는 의지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루스키들은 겨울이 정말 춥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혹한이 몰아쳐야 제대로 된 겨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고 기온이 내려가지 않으면 오히려 답답하다고 느낀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으면 매년 반복해온 겨울 산책과 자연스럽게 해오던 겨울 스포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리듬감이 깨진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대부분 가정에는 노르딕 스키, 썰매 등 웬만한 겨울 스포츠 장비들을 다 갖춰두고 있다. 겨울 스포츠가 생활화됐다. 스포츠 채널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바이애슬론, 노르딕 스키 대회, 스키점프, 봅슬레이 경기 중계가 계속된다. 러시아인들은 “눈이 없으면 집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운동도 못하고 좀이 쑤셔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무엇보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스크비치들은 “모스크바는 눈이 내리고 추워야 더 빛나고 시민들도 정상적인 활동을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모스필름이 제작한 영화로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제목은 러시아에서 아주 평범하게 회자되는 말이다. 객지에서 모스크바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곳이 모스크바요, 인정은커녕 비정한 곳이 모스크바요, 어느 누구도 정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들 스스로가 자기를 인식하며 홀로 서기를 해야 하는 곳이 모스크바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러시아 겨울이 그렇다. 이방인들에게 비정할 정도로 혹독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이런 혹독한 추위를 즐긴다.

정병선 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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