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4일 뉴저지주 뉴워크에서 수백 명의 시위대가 흑인 에릭 가너를 체포하다가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대니얼 판탈레오 경관에 대한 뉴욕주 스탠튼아일랜드 대배심의 불기소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photo AP·뉴시스
지난 12월 4일 뉴저지주 뉴워크에서 수백 명의 시위대가 흑인 에릭 가너를 체포하다가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대니얼 판탈레오 경관에 대한 뉴욕주 스탠튼아일랜드 대배심의 불기소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photo AP·뉴시스

지난 11월 25일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미국 서부 오리건주 포틀랜드시의 교통경찰관 브렛 바넘도 거리질서 유지를 위한 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길거리에서 ‘프리 허그(Free Hug)’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한다. 이 소년은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길거리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다. 건장한 백인 경찰인 브렛 바넘이 후에 디본트 하트로 알려진 이 소년에게 다가간다. 비무장 흑인에 대한 백인 경찰의 총격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시위였기 때문에 흑백 간 긴장이 어느 때보다 고조될 무렵이었다. 브렛 바넘은 경찰이기 이전에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울고 있는 이 소년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다가간 것이다. 그러나 디본트 하트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얘야 이름이 뭐니?”

“디본트입니다.”

“그런데 왜 울고 있니?”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백인 경찰이 우리 같은 어린 흑인들에게 무자비하게 군다고 그래요. 나는 앞으로 어찌하면 좋아요?”

디본트 하트는 4살 때 백인 가정으로 입양된 소년이다. 제니퍼 하트와 사라 하트가 부모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이 백인 부부는 아직은 덜 보편적인 레즈비언 부부이다. 하트 부부는 디본트 외에도 3명의 흑인 자녀를 입양해 키우고 있다. 입양될 무렵 디본트는 완전히 방치된 채 흡연, 음주에 찌들어 있었고 총을 가지고 놀다가 총상까지 당한 상태였다.

“경찰이 우리 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을 저는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둘 사이에 약간의 긴장이 흐르더군요. 그러다 경찰이 이름과 주소, 학교 등을 물어보며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을 시도하면서 긴장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어요.”

제니퍼가 나중에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브렛 바넘은 딱히 이 소년에게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디본트가 들고 있는 ‘프리 허그’ 피켓을 발견하고는 묻는다.

“나도 안아줘도 될까?”

“그럼요.”

시위진압용 헬멧을 쓴 거구의 브렛 바넘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12살 소년 디본트를 안았다. 그 순간 아마추어 사진작가 자니 누엔(Johnny Nguyen)은 육감적으로 셔터를 누른다. 조니는 이 사진을 그의 페이스북에 올리는 대신 포틀랜드의 지역신문 ‘더 오리거니언(The Oregonian)’을 찾아가 상담한다. 사진의 파괴력을 한눈에 간파한 신문사는 사진의 판권을 사들인 후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보도한다. 이 사진은 순식간에 15만회의 공유 기록과 수백만의 ‘좋아요’를 낳으면서 갈등과 분노로 얼룩진 퍼거슨 사태 와중에서 사랑과 이해와 관용이라는 메시지로 전국을 강타한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에 불과한 자니 누엔도 자신의 첫 보도사진 한 장으로 전국적 인사가 됐다.

“지금은 텍사스에 살고 있는(25년째 살고 있다) 오리건 출신으로서, 이 사진은 내가 오리건 출신임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만든다.”(도기)

“퓰리처 보도사진 부문 수장자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엘우드 서긴스)

“내가 엄마로서 감정적으로 가장 충만해지는 순간이었다.”(디본트 하트의 어머니인 제니퍼 하트)

전국적 관심을 끈 이 사진의 배후 사건은 사진만큼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전말은 이렇다. 지난 8월 9일 미국 중부의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멀지 않은 퍼거슨시. 순찰 경찰이던 대런 윌슨은 절도 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으로 출동한다. 조그만 동네 가게에서 담배를 빼앗듯이 훔쳐나오던 마이클 브라운과 그의 친구 도리안 존슨(두 명 모두 흑인)을 발견한 윌슨이 두 사람에게 멈출 것을 지시한다. 멈춰선 그들은 차문을 꽉 붙잡고 윌슨이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한다. 브라운은 193㎝에 132㎏이나 되는 거구이다. 윌슨도 192㎝의 장신이지만 95㎏ 정도 되는 호리호리한 체격이다. 두 명의 흑인에게 제압당할 위기에 처한 윌슨이 총을 꺼내 공포탄을 발사한다. 이에 놀란 두 명의 용의자는 각자 반대 방향으로 도주하기 시작한다. 윌슨은 도리안 존슨을 포기하고 마이클 브라운을 추격한다.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윌슨은 12발의 실탄을 발사했고 이 중 브라운은 6발을 맞았고 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마이클 브라운은 18살이었다. 여러 가지 상반되는 진술이 이후 조사과정에서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브라운이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는 것이다. 이 진술 이후 ‘손 들었어. 쏘지마(Hands up, Don’t Shoot!)’가 시위 구호가 됐다. 물론 손을 들지 않았다는 목격자의 진술도 있었다. 또 다른 목격자는 윌슨이 도망가는 브라운의 등 뒤에서 총을 쏘았다고 했지만 검시 결과 총탄이 전부 정면에서 맞은 걸로 확인되었다. 윌슨의 옷에서도 브라운의 혈흔이 발견되어 두 사람이 매우 근접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건이 발생한 후 3개월여 동안 윌슨에 대한 기소 여부를 두고 수사가 진행되었다. 지난 11월 25일 9명의 백인(남성 6명, 여성 3명)과 3명의 흑인(남성 1명, 여성 2명)으로 구성된 대배심(Grand Jury)은 윌슨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배심원은 법에 의해 퍼거슨시가 소속된 세인트루이스 카운티의 인구비례로 선발하게 되어 있다. 세인트루이스 카운티에 백인이 약 70%이고 그 외 인종이 30%이다. 이를 근거로 9명의 백인과 3명의 흑인이 배심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퍼거슨시는 반대로 약 3분의 2가 흑인이다. 이 배심원들은 8월 20일부터 본업을 전폐하고 매주 1~2회 이 사건 심리에만 참가해 왔다.

지난 11월 25일 포틀랜드시 교통경찰관 브렛 바넘이 시위 현장에서 소년 디본트 하트를 껴안고 있다. ⓒphoto AP·뉴시스
지난 11월 25일 포틀랜드시 교통경찰관 브렛 바넘이 시위 현장에서 소년 디본트 하트를 껴안고 있다. ⓒphoto AP·뉴시스

경찰의 업무집행 중 발생한 정당방위이기 때문에 기소할 수 없다는 대배심의 결정은 즉각 전국적 시위를 촉발했다. 특히 사건의 발생지, 퍼거슨시는 주 방위군과 경찰이 시위에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화, 파괴가 이어졌고 경찰은 최루탄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다행히 평결이 있었던 그 다음 날이 미국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이라 이후 시위는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런데 이런 소상상태에 기름을 부어버린 사건이 이번에는 뉴욕에서 일어난다. 뉴욕에서 발생한 사건이 더욱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퍼거슨시 사태가 워낙 언론에 많이 노출되면서 비교적 세인의 눈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뉴욕 사건에 대한 대배심의 평결이 12월 3일에 있었고, 바로 이 사건의 내막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던 시위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게 된 것이다.

지난 7월 17일 뉴욕의 스탠튼아일랜드 길거리에서 불법으로 담배(세금 없이 판매하는 담배)를 파는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던 에릭 가너에게 단속 경찰관 4명이 현행범으로 체포를 시도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너는 흑인이고 단속 경찰은 백인이다. 가너는 경범죄 위반으로 이미 수십 번 단속을 당한 경험이 있다. 가너는 불법으로 담배를 판 적이 없다며 경찰의 단속에 응하지 않는다. 풋볼선수 같은 덩치의 가너와 초등학생 같은 경찰은 처음에는 서로 거리를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가너가 자기 몸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제스처를 취하는 사이 단속 경찰관 대니얼 판탈레오가 가너의 등 뒤로 올라타면서 목조르기를 시도한다. 이 목조르기 체포는 뉴욕 경찰에서는 금지하고 있는 체포 방법이다. 판탈레오의 목조르기 시도와 함께 현장에 있던 3명의 경찰이 합세하여 가너를 바닥에 눕히는 데 성공한다. 목이 졸린 가너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친다.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숨을 쉴 수가 없어요.(I can’t breathe. I can’t breathe.)”

현장에서 녹화된 자료에 의하면 가너는 이렇게 11번가량 ‘숨을 쉴 수 없다’는 소리를 지르다가 19초가 지난 후 실신한다. 긴급히 병원에 후송된 가너는 약 1시간 후 숨을 거둔다.

이 사건에 대한 대배심의 결정이 지난 12월 3일 발표된 것이다. 뉴욕의 대배심은 퍼거슨과는 달리 총 23명으로 인종비는 14명의 백인과 9명의 소수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속 당시 가너는 담배 불법 판매, 무면허 운전, 마리화나 소지 혐의 등으로 붙잡혔다가 가석방된 상태였다. 가너가 경찰의 단속에 응하지 않는 과정과 판탈레오의 목조르기 체포 시도 장면은 당시 주변에 있던 누군가에 의해 고스란히 촬영되어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에릭 가너 사건은 마이클 브라운 사건에 가려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대배심 평결을 앞두고 동영상이 계속 방영되면서 전국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누가 봐도 경찰의 과잉단속이 명확해 보이고, 비록 가너가 당뇨·심장병 등 개인 병력이 있다고 해도 목조르기가 직접적 사인이라는 결론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건은 퍼거슨 사건과는 결론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뉴욕 대배심은 단속경찰관을 기소하지 않는다고 평결한다. 이것이 진정되어 가던 시위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이다. 지난 12월 3일 맨해튼은 대배심의 이런 결정에 분노한 시위대들로 웨스트사이드 하이웨이, 타임스스퀘어 등이 통제되거나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폭력적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시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다음은 부인이 연상의 흑인인 뉴욕 시장 드블라지오가 방송국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시장은 이번 대배심 결정(Decision)을 지지(Respect)하는가?”

“나는 대배심의 프로세스(Process)를 존중(Respect)한다.”

“‘프로세스를 존중하는가’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결정(Decision)을 지지하는가’라고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대배심의 프로세스를 존중한다.”

“그렇다면 시장은 대배심의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인가?”

“….”

2012년 2월 27일 플로리다주 샌퍼드시. 28살의 자경단 단원 조지 짐머만은 후드가 달린 옷을 입고 거리를 배회 중이던 17살의 고등학생 트레이본 마틴과 실랑이를 벌이다 총으로 살해한다. 짐머만이 살고 있는 동네는 빈집털이, 절도, 강탈 등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주민들은 이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샌퍼드 경찰의 승인을 받아 자경단을 조직한다. 짐머만은 장차 판사가 되려고 대학에서 범죄학을 공부하는 한편 보험사기를 조사하는 요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의심스러운 사람을 보거나 절도, 강탈 등을 발견할 때마다 경찰에 지속적으로 신고하여 이미 샌퍼드 경찰들과는 익숙한 사이였다. 그의 이런 평소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주민들이 이런 짐머만에게 자경단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실무를 맡긴 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 마틴은 아버지와 함께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약혼자를 방문하는 길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곳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 마틴은 어둠이 내린 동네에서 이리저리 배회 중이었는데, 이때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짐머만이 허리춤에 손을 집어넣고 후드를 뒤집어쓴,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흑인 청년 마틴을 발견하고는 즉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이 도착하기 전 마틴을 붙들어 놓기 위해 짐머만은 차에서 내려 마틴을 뒤따르기 시작한다. 갑자기 미행을 당하게 된 마틴은 짐머만과 실랑이를 벌이다 짐머만의 얼굴을 가격한다. 키가 큰 마틴의 공격에 결국 짐머만은 총을 쏜다. 2분 후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고 짐머만은 자세한 경과를 경찰에 설명한 후 총을 경찰에 넘기고 경찰서로 가서 5시간 동안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풀려난다.

짐머만의 석방은 즉각 전국적인 길거리 시위로 이어졌다. 경찰 책임자가 해고당하고 조사 담당 경찰관이 스스로 보직 변경을 요청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플로리다 주지사가 지명한 특별 검사에 의해 2012년 4월 11일 짐머만은 2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정식 재판을 받게 된다. 그의 재판은 이듬해인 2013년 6월 24일 시작되어 7월 12일까지 이어졌고, 그의 살인죄에 대한 배심원의 평결은 그 다음 날 발표되었다. 짐머만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3가지의 사건이 모두 백인 혹은 백인계 경찰(짐머만은 자경단)에 의한 흑인 사망 사건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이들 모두 무죄 혹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전 세계의 모든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언어와 문화, 역사적 배경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 문제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은 법(法)이다. 그래서 미국 법은 강력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더욱 강력하다. 법이 무너지면 미국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법 집행의 최일선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경찰이다. 그래서 경찰의 공권력 행사는 광범위하게 보호받는다. 그리고 경찰의 공권력 행사에 저항하는 경우는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이것이 미국의 힘이다. 대배심의 평결과 짐머만의 무죄는 바로 그것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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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효현 경기텍스타일 뉴욕사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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