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취밭에서 오크라를 가득 들고 있는 자운. 터널작물로 그늘이 생긴 밭에는 참취가 잘 자란다고 한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참취밭에서 오크라를 가득 들고 있는 자운. 터널작물로 그늘이 생긴 밭에는 참취가 잘 자란다고 한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산골농부 자운을 만나러 가는 길은 험했다. 자동차가 영동고속도로 홍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에 들어서자 꼬불꼬불 시골길이 9㎞ 이어졌다. 마지막 1㎞ 정도는 아예 울퉁불퉁 흙길이다. 승합차 한 대 간신히 다니는 좁은 흙길 운전은 운전자와 동승자 모두의 가슴을 벌렁벌렁하게 했다. 그 와중에도 가을걷이가 막 시작된 밭작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 수수, 샛노란 해바라기, 초록색 들깨, 고추, 콩 등. 자연이 빚어낸 색채의 향연에 마음을 뺏기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멀리 낮은 산을 등지고 빨간 지붕의 아담한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고, 그 앞에 개량한복을 편하게 걸친 호리호리한 여인이 기자 일행 차를 보고 손을 흔든다. 이곳에서 자급자족적 삶을 살면서 글을 쓰는 여인, 산골농부 자운(본명 최화자·53)이다.

1650㎡에 80여종의 작물

집에는 울도 담도 없다. 새빨간 나무 우체통과 나란히 서 있는 키 큰 해바라기가 이 집 입구를 알렸다. 우체통 뒤로는 탐스러운 오디나무가 서 있다. 자운은 남편 김석호씨와 함께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우체통 색이 더 예뻤는데, 이 양반(남편 김석호씨)이 어제 망쳤어요. 페인트 색감이 너무 빨갛지요? 오디나무는 올해 풍작이에요. 초여름 오디를 따서 오디빙수를 해 먹었죠.” 둘은 서로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자운은 이곳에서 6년째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태평농법은 무농약, 무비료, 무시비, 무경운 등 4무(無)를 내세운 농법으로, 자연이 지닌 토양의 속성을 그대로 살리는 농법을 말한다. 국내에서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누가 그래요’의 저자 이영문씨가 태평농법을 창안했는데, 자운은 이영문의 제자다. ‘자줏빛 구름’이라는 뜻의 호 ‘자운(紫雲)’도 이영문씨가 지어줬다 한다.

자운은 스승 이영문의 태평농법 연구터전인 경남 사천시 서포면 별학섬에서 2005년부터 5년간 살았다. 그곳은 연구 터전인 동시에 생존 터전이었다. 그는 별학섬에서 말 그대로 자급자족 삶을 살았다. 섬 한 바퀴 도는 데 걸어서 15분 걸리는 작은 섬의 벼랑에 허름한 오두막을 짓고 들어앉아 바닷물을 끌어와 설거지를 하고, 태평농법으로 재배한 섬 작물만으로 ‘삼시세끼’를 해결해야 했다. 별학섬에서 자급자족의 힘을 키운 후 이곳에 둥지를 튼 건 2010년이다.

그의 삶이 의미 있는 건 태평농법으로 작물을 거두고 그 농작물로 만든 음식을 통해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쳤다는 것. 그리고 그 자연에서 얻은 가르침을 글로 써서 여러 사람들과 공유했다는 점이다. 그는 파워블로거다. 그의 블로그 ‘산골농부의 자연밥상’(blog.naver.com/jaun000)의 일 방문자는 2000명이 넘고 누적 방문객은 500만명이 넘는다.

그가 1650㎡(500여평)에서 키우는 작물은 무려 80여종. 고추, 가지, 오이, 참외, 아욱, 수박, 마, 갓끈동부, 검정동부, 들깨, 수수, 호박, 단호두, 서리태, 감자, 고구마, 참취, 콩, 검정팥, 굵은팥, 메주, 딸기, 생강, 엄나무, 오크라, 파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숨차다. 참외와 오이만 해도 여러 종이고, 가지도 보라색 가지와 흰 가지 두 가지다. 카네이션, 무궁화, 국화 등 조경용 꽃도 여기저기 심어뒀다.

“이건 오크라예요. 원두커피와 함께 갈아서 차로 마시면 은은하고 향긋해요. 이건 갓끈동부인데, 생긴 건 팥과 비슷하고, 갈아서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어요. 쿠키도 만들 수 있죠. 이 깻잎 향 좀 맡아보시겠어요? 향이 굉장히 진해요. 천연 허브 역할을 해서 고라니들의 습격을 막아주죠.”

깻잎을 손으로 문질러 향을 맡아봤다. 자극적일 만큼 강한 깻잎 향이 콧속을 훅 파고들었다. 기자가 이제껏 먹어오던 깻잎과 차원이 달랐다. 놀란 표정을 짓자 자운은 “태평농법을 통해 씨앗을 받아서 심는 작물의 맛과 향은 작물 본연의 맛과 향이 강해요. 시비하고 비료를 주는 작물과 비교할 수 없죠”라며 “거름을 주면 맛이 밍밍해져요. 사람이 물살이 찌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식물이 갖고 있는 자생력을 감퇴시키고 무리하게 속성으로 키우는 거니까요”라고 말했다.

태평농법은 땅에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씨앗이나 모종 심기 전에 하는 그 흔한 밭갈이도 하지 않는다. 그저 흙 땅에 씨앗을 심고 이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근처의 자생초를 뽑아주고 씨앗이 자라나면 순을 따 주는 게 전부다. 동네 어르신 중에는 자운의 농사법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농사 고수들이 많다고 한다. 특히 고구마를 보고 “땅을 갈지 않고 두둑을 올리지도 않고 어떻게 고구마를 재배하냐?”면서 의아해한다고. 자운은 이렇게 답한다. “땅이 활성화돼 통기성이 좋아지면 두둑을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태평농법의 핵심은 인위적인 거름을 주지 않고도 땅 본연의 힘을 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한 특별한 비책이 있다. 바로 가을걷이가 끝난 후 땅에 보리나 밀, 귀리 등 맥류를 심어서 월동시키는 것. 맥류가 흙속 미생물을 활성화시키고, 밀과 보리 등 부산물이 땅에 떨어지면서 땅을 기름지게 해 자생력이 생기는 이치다. 그는 “맥류의 월동이 땅을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자생력이 생기면 벌레가 잘 오지 않고, 온다 해도 작물 스스로 이겨내는 힘이 강해 손실이 적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진딧물이 많이 꼬이면 그는 농약 대신 물엿을 물에 희석해서 뿌려준다. 식물의 호흡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진딧물을 잡기 위한 묘책이다.

15첩 자연밥상

밭에서 막 따온 작물로 차린 자연밥상. 항아리에 있는 참취 꽃이 꽃그림자를 만든다.
밭에서 막 따온 작물로 차린 자연밥상. 항아리에 있는 참취 꽃이 꽃그림자를 만든다.

갓끈동부 크래커와 오크라 커피.
갓끈동부 크래커와 오크라 커피.

자운이 차린 밥상은 화려했다. 직접 기른 작물을 따 와서 차린 밥상이다. 가지나물, 호박잎 된장국, 박고지 조림, 고추장 소스 샐러드, 고추부각, 취나물, 동아장아찌, 애호박나물 등 15가지 반찬은 하나같이 맛깔스러웠다. 식재료의 풍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맛을 살린 요리 고수의 밥상이었다. 가지를 그저 들기름에 노릇노릇 구워 양념간장을 얹은 가지나물은 부드러우면서 입에 감겼고, 당도 낮은 참외를 갈아 만든 고추장소스 샐러드는 향긋하고 개운했다. 동행한 사진기자 이경민씨는 밥그릇을 다 비우고도 젓가락을 놓지 않은 채 한참 이 반찬 저 반찬 먹었고, 기자 역시 오랜만에 밥을 두 그릇 먹었다.

자운은 의외로 대식가였다. 남은 반찬을 싹싹 다 먹어치웠다. 자운의 체격은 키 167㎝에 몸무게 49㎏. 건강하게 날씬한 몸이었다. “그렇게 많이 먹고도 어떻게 살이 안 찌나?” 묻자 그는 “평소에는 이보다 더 많이 먹는다”며 “과거엔 물만 먹어도 살이 쪘는데 이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로 바뀌었다”고 답했다.

그의 삶은 음식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먹는 것이 곧 그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삶은 산골농부로서의 삶 전과 후로 나뉜다. 농부 이전에는 몸 여기저기가 아프고 성격이 뾰족한 사람이었지만, 농부가 되면서 몸 건강하고 성격도 둥근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자운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섬 생활을 시작했다”면서 말을 이었다.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몸이 아팠어요. 면역력이 약해서 쉽게 피곤해지고, 한번 상처가 나면 잘 아물지 않았죠. 나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병원 진단에서는 아무런 병명이 안 나왔어요. 늘 약봉지를 싸들고 다녔어요. 혈액순환 장애가 컸죠. 그러다 이 양반(남편)이 이영문 선생님을 소개했어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별학섬에 들어가서 새 삶을 찾은 거죠.”

“지금은 많이 나으셨냐?”는 질문에 부부는 이구동성으로 “좋아진 정도가 아니에요. 기적이죠”라고 말했다. 남편 김씨는 특히 아내의 성격 변화가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이 사람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다 불편해했어요. 워낙 개성이 강해서. 가족들도 어려워했죠.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사람이 모여요. 다들 편안해하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돈독해졌죠.”

건강도 몰라보게 회복됐다. 늘 약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는 병원 발길을 끊었다. 피부 면역력이 약해 보습제를 하루에 열 번 넘게 바르던 습관은 과거가 됐다. 가장 달라진 건 햇빛에 나갈 때다. 예전엔 잠시라도 외출할 일이 있으면 장갑, 팔토시,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가야 했다. 햇빛 알러지가 심해 10분만 노출돼도 건조해져서 피부가 금세 텄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땡볕에 맨 얼굴 맨손으로 나가도 끄떡없다. 이런 그를 보고 가족들은 “이제야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섬에 들어갈 때 다들 말렸다. 주변 사람들은 “아플 일만 남았다”고 했고, 태평농법 연구회 회원들은 “상(喪) 치를 일 있냐”면서 그의 가입을 반대했다. 하지만 자연은 그를 바꿔놓았다. 공기 좋은 곳에서 합성첨가물 하나 없이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그의 영혼을 다독였다. 스승 이영문의 생태에 대한 가르침, 마음수련도 빼놓을 수 없는 치유책이다.

글쓰기는 또 다른 치유 수단. 작가를 꿈꿨던 그는 태평농법 연구회 회원의 권유로 블로그를 열었고, 별학섬에서의 자급자족적 삶을 글로 쓰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블로그를 시작한 이듬해인 2009년부터 그는 파워블로거가 됐다.

그는 원래 요리와 담 쌓고 살았다. 스스로 “들깨와 참깨, 시금치와 아욱도 구별 못하는 요리 젬병”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런 그가 자연밥상의 고수로 거듭난 건 제철 식재료가 안겨주는 매력에 빠지면서다. 그는 “과거에는 먹는 데 시간을 보내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어요. 대충 먹는 대신 고상하게 사는 데 시간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니에요. 먹는 것이 곧 삶이에요.”

내년에 대를 잇게 될 작물 씨앗을 햇빛에 바짝 말리고 있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내년에 대를 잇게 될 작물 씨앗을 햇빛에 바짝 말리고 있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농사는 노동이 아니라 유희

자운에게 농사는 ‘노동’이 아니라 ‘놀이’다. 그 많은 작물을 혼자서 다 재배하려면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쁘지만 그는 힘들어 하지 않는다. 농사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는 “농사는 절대로 노동이 아니다”라면서 “다른 일을 하다가 농사를 2~3시간 하고 오면 에너지를 얻는다”고 했다. 자운은 수확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농사 과정 자체에서 기쁨과 환희를 얻기 때문이다. 유명 블로거가 되면서 “태평농법으로 수확한 작물을 좀 파시라”는 제안을 종종 받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다. 먹을 만큼 수확해 가족들과 나눠 먹으면 그만이다. “자급자족 삶을 살면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또 다른 이유다.

남편 김씨는 “이 사람은 작물과 교감을 한다”며 신기해했다. 자운은 “작물은 사람과 같다”며 둘을 동급으로 여겼다. “좋은 사람과 있으면 푸근해지고, 싫은 사람과 있으면 피곤해지는 것과 비슷해요. 궁합이 맞는 작물을 매만지다 보면 좋은 사람을 안았을 때의 살가움이 느껴지죠. 거기서 얻는 에너지는 단순히 정신적 에너지뿐 아니라 진짜로 힘이 돼요. 교감하는 작물을 대할 때 어마어마한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육체로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여러 가지 있는데, 우선순위에 놓고 싶은 게 밭 작물을 재배할 때의 쾌감이죠. 아!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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