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유럽 시찰에 나선 서성환 회장(오른쪽).
1960년 유럽 시찰에 나선 서성환 회장(오른쪽).

1951년 말 서성환의 끈기로 드디어 국산 화장품 제조 수준으로는 획기적인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식물성 ‘ABC 포마드’가 그것이다. 그것의 제조는 바셀린이 아닌 피마자유와 목랍(木蠟)에 향을 부향하고 가열하며 섞은 다음 냉매나 얼음 위에 얹어 급속히 냉각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식물성 포마드인 ABC 포마드는 광택과 접착력에서 소비자들 취향에 안성맞춤이었다. 머리칼이 뻣뻣해지지도 않으며 감으면 잘 씻기는 제품으로, 시장에서 단연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는 제품이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 남성 머리 화장품 품질을 단번에 격상시켰다. 식물성 포마드 출시는 광물성 포마드에 쌓였던 소비자 불만을 단숨에 해소하면서 다른 포마드와 확실한 차별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업계에서는 포마드의 포장디자인과 용기를 용기혁명이라고 했다. 포장디자인은 현대 감각이 돋보이는 녹색 패턴으로 처리했으며, 용기는 시장에서 통용되던 검은색 대신 ABC 세 글자를 돋을새김한 흰색 병을 사용해 세련미를 풍겼기 때문이다.

또 하나 창조적이고 도전적 결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브랜드명 채택이었다. 그때까지 ‘메로디’ 브랜드는 하루 수백 타(1타는 12개)를 생산하며 그 역할을 훌륭하게 이어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메로디 브랜드를 ABC로 바꾸며 통합했다. ‘ABC 포마드’는 출시되자마자 시장을 석권했다. 서울의 경우, 부산에서 열차로 보낸 제품이 서울역 집하장에 닿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도매상들이 그 자리에서 물건을 몽땅 인수해갈 정도였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는 물건이 물류창고가 필요 없을 만큼 수요가 컸으니 제품 인기는 놀랍고 폭발적이라 할 만했다. 뒤이어 출시된 ‘ABC 수백분’ ‘ABC 유액’ 등도 인기를 끌면서 사업은 순항을 이어갔다. 전쟁은 인적·물적 손실을 강요하며 교착 상태였지만, 서성환 개인이나 회사 모두 그 전쟁의 그늘 아래 커다란 발돋움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응용화학 전공한 구용섭 스카우트

휴전 1년 뒤 서성환은 서울로 돌아와 서울역에 가까운 용산구 후암동에 둥지를 틀었다. 사업이 번창하자 살림하는 아내의 일상이 더 고되어졌다. 여공들과 똑같이 제품을 만들면서 추가로 매끼 식사까지 도맡아 누구보다도 할 일이 많았다. 제품을 만드는 곳에서 살림까지 하다 보니 밥에서는 언제나 화장품 냄새가 났다. 그녀의 하루는 동동거림의 연속이었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서성환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끌어가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즈음 지인의 소개로 일본 도쿄공업고등학교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한 구용섭이 입사했다. 이를 계기로 1954년 연구실도 만들어졌다. 후암동 공장 화장실을 개조해서 만든 초라한 수준이었지만, 우리나라 장업계 최초의 연구실이라는 선구적인 사건이었다. 서성환은 구용섭을 독일로 유학까지 보냈다.

연구실을 만든 뒤 출시된 첫 번째 제품 ‘ABC 100번 크림’은 ‘ABC 포마드’에 버금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ABC 브랜드의 라인업으로 서성환의 사업은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서성환은 구용섭의 제안으로 에어스푼(Air Spun)을 도입, ‘ABC 분백분’을 시장에 내놓았다. ‘세계에서 가장 가늘고 부드러우면서도 고운 가루를 제조할 수 있는 제분기’에서 만들어진 ABC 분백분은 출시되자마자 히트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서성환은 아직도 세계적인 브랜드 코티분에 맞먹지는 못한다는 생각에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꼭 그만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도전의식이 세차게 타올랐다.

1959년 4월 봄날, 서른여섯의 서성환은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윤독정은 예순여덟의 삶을 뒤로한 채 꽃 무더기 속으로 떠났다. 어머니야말로 아모레의 창업자이며 서성환의 스승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는 그에게 하나의 세계가 스러짐이었다. 어머니는 떠나기 전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모든 실향민의 소망이었던 고향 방문이 어머니에게도 평생의 꿈이자 한이었다. 성환은 고향 가까운 벽제에 선산을 구해 어머니를 모셨다. 그의 슬픔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01 1966년 세계 최초의 인삼 화장품 ABC 인삼크림. 02 아모레 미용잡지 ‘향장’ 1974년 9월호.(표지모델 박정수) 03 1960년대 활동한 아모레퍼시픽 방문판매 카운셀러의 모습.
01 1966년 세계 최초의 인삼 화장품 ABC 인삼크림. 02 아모레 미용잡지 ‘향장’ 1974년 9월호.(표지모델 박정수) 03 1960년대 활동한 아모레퍼시픽 방문판매 카운셀러의 모습.

아모레미오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1960년대 장업계의 전근대적인 유통구조가 여러 문제에 부딪히자 태평양은 태평양화장품판매㈜를 설립했다. 장업계는 물론 제조회사가 만든 우리나라 최초 판매회사라는 상징성을 지녔지만 시장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전통적인 유통구조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제2의 유통 방안을 다시 모색하던 서성환에게 방문판매제도가 떠올랐다. 방문판매의 핵심은 제품, 조직, 인력이 중요한데 다행히 제품력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방문판매 전용 브랜드를 개발한 태평양은 상금을 내걸고 전 사원을 대상으로 브랜드 이름을 공모했다. 1961년 채택된 것이 바로 우리나라 화장품의 대명사처럼 여성들 입에 오르내린 아모레(Amore)이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칸초네 ‘아모레미오(Amore Mio·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따왔다.

다음으로는 판매망 구축이었다. 서성환은 전국을 행정구역에 따라 바둑판처럼 나누어 구역을 정하고 특약점을 설치해 갔다. 이렇게 조직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판매망은 엄청난 속도로 늘어갔다. 그는 전쟁 미망인에게 주목했다. 그 무렵 전쟁 미망인만 해도 37만명에 달했고 전쟁 중에 상처를 입은 상이군경까지 포함하면 여성 가장이 그보다 훨씬 많았다. 여성으로서 한 가정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할 그들 ‘아모레 아줌마’들에게 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과 회사 모두 공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성환은 방문판매의 안착과 지속적 성장을 위해 다양한 측면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국내 최초로 미용사원제도를 시행해 소비자에게 갖가지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했고, 사내보 ‘아모레 뉴스’ 발간, 광고를 통한 이미지 제보 등으로 아모레 알리기에 온 힘을 다했다.

서성환은 방문판매를 시작한 뒤 3년 동안 집에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언제나 현장에 함께 있었다. 방문판매제도는 태평양의 성장을 이끈 주역이었고,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만든 산파였다. 많은 운영기법의 개발과 창조적 노력으로 방문판매 제도가 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본질에서는 진정 사람을 아끼고 구성원 모두를 주역으로 존중해 주는 기업 마인드, 그리고 그 중심에 서성환이 자리하고 있었다.

외국 화장품업체와 기술제휴를 시도한 일도 태평양이 국내 최초였다. 1959년 프랑스 화장품업체 코티사와의 기술제휴에 나섰을 때 업계는 물론 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아모레 코티분은 대히트를 쳤다. 바로 아모레퍼시픽 역사의 한 줄기인 ‘코티분’ 시대이다.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서성환의 욕심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그는 코티분을 성공하고 나서 유럽 화장품업계를 시찰할 목적으로 프랑스를 방문했다.

1960년 7월 서성환은 기술제휴사인 코티사의 초청으로 40일간의 유럽 시찰에 오르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 센 강변에 있는 코티사를 방문한 서성환에게 그곳은 신세계였다. 100년 가까운 세월이 깃든 역사의 공간이면서 세계적 품질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갖가지 화장품을 무한정 쏟아내고 있는 현대적 생산의 현장. 모든 생산공정을 자동화한 최신 시설과 수많은 원료 저장탱크를 보며 서성환은 그저 부러운 마음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 일정을 끝낸 서성환은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도시 그라스를 방문했다. 거리마다 질 좋은 향료를 만들기 위한 소규모 증류공장, 비누공장, 향료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향수의 고장이었다. 꽃잎과 건초를 압축해 원액을 얻는 과정과 향수 제조과정에 쓰이는 온갖 기구들을 살펴보았다. 서성환은 보랏빛 라벤더를 비롯 갖가지 이름 모를 꽃들이 끝없이 펼쳐진 농장을 돌아보며 식물재배가 경제, 문화, 그리고 환경에까지 기여할 수 있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서성환에게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한 좋은 경험이었다. 이듬해 일본 최대 화장품업체인 시세이도사에도 여러 차례 견학을 했다. 이때마다 외국 선진기술에 대한 충격은 서성환을 더욱 자극했다.

1962년 11월 20일 마침내 영등포 공장이 준공되었다. 그때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동화 시설을 완비한 대규모 공장이었다. 연구소를 만들고 지속해서 연구원을 충원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서성환은 국산 화장품의 전체적 품질 수준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다. 1960년대 초 그는 프랑스를 다녀온 뒤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을 세우기로 했지만 자금을 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공장 준공을 눈앞에 두고는 ‘아모레가 망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경쟁업체 고려화학이 태평양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그때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인 100만원 상당의 경품행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공장 설립으로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서성환은 맞수를 뒀다. 그 무렵 태평양 매출의 1%에 이르는 200만원을 경품금액으로 내걸었다. 최초 국산 승용차를 1등 경품으로 내세웠고, 샐러리맨 1년치 수입에 해당하는 5만원을 줬다. 경품행사는 4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예기치 못한 반격에 고려화학은 당황했고 결국 1년 뒤에는 부도를 내며 업계에서 사라졌다. 서성환의 뚝심은 업계에 두고두고 회자됐다. 공장을 완공한 태평양은 업계 선두를 확실하게 굳힐 수 있었다.

그 무렵 서성환은 연구의 중요성을 일찍 절감하고 연구원들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1964년 어느 날 서성환은 연구원들에게 인삼 화장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남프랑스 그라스 여행 이후 식물 재배로 경제와 문화를 키워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늘 뇌리에 맴돌았던 서성환은 개성에서 자라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우리의 인삼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한방 화장품 ‘설화수’ 탄생

인삼 약효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던 때라 그야말로 백지 상태에서 인삼의 미용 효과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연구원들은 인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 추출물이란 추출물은 모두 뽑아 그 효능을 연구했다. 2년 뒤 1966년 세계 최초 한방 화장품 ‘ABC 인삼크림’을 제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1972년 마침내 인삼의 잎과 꽃잎에서 인삼 유효 성분인 ‘사포닌’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냄새와 자극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3년 연구실은 사포닌의 안정화에 성공했다. 드디어 세계 최초로 인삼 사포닌을 원료로 한 화장품 ‘진생삼미’가 탄생한 것이다. ‘진생삼미’는 일본과 영국, 캐나다 등으로 수출되어 나가기 시작했고, 1975년에는 고려청자를 응용한 디자인으로 용기를 바꿔 세계시장에 ‘삼미’라는 이름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인삼 화장품 개발 능력이 생기자 서성환의 관심은 인삼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한방 식물들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어 갔다. 인삼에서 피부미용 효능 물질을 추출했듯이 자연 속의 수많은 식물로부터 더 많은 이로운 물질들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1987년 피부에 아름다운 눈꽃을 피운다는 뜻을 담은 ‘설화(雪花)’가 개발되어 그의 소망을 실현하게 되었다. ‘설화’는 인삼 화장품을 만든 기술력을 기반으로 율무, 당귀, 치자, 감초 등의 여러 한방 약초들에서 효능 물질을 추출해 만든 제품으로 본격적인 내용과 모양을 갖춘 제대로 된 한방 화장품이었다. 그로부터 꼭 10년 후 비로소 한방 화장품의 진수라 불리는 ‘설화수(雪花水)’가 태어났다. 인삼 화장품 연구를 시작한 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다.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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