셴양 건릉의 61번신상. 61개의 석상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이 석물은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주변국의 조문 사신이라고 해석된다.
셴양 건릉의 61번신상. 61개의 석상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이 석물은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주변국의 조문 사신이라고 해석된다.

이연(李淵)은 태원에서 기병하여 수나라의 심장부 장안을 점령해 대당제국을 세웠고, 당은 장안성에서 화려한 역사를 꽃피웠다. 답사 일행은 탁발선비 천년 역사의 종착지인 장안, 지금의 시안(西安)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셴양(咸陽·함양)으로 갔다. 약탈과 굴복으로 이어진 흉노의 역사와, 호(胡)와 한(漢)을 융합하여 새 역사를 열었던 탁발선비의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두 개의 상징적인 석상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답사 24일차 셴양공항 인근에 예약한 숙소를 찾아갔다. 숙박비가 조금 저렴하다 싶었더니 철거민 아파트를 개조한 어설픈 빈관(賓館)이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터라 하룻밤을 묵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 제값을 치러야 하는 법이다. 공항 지근거리의 제대로 된 호텔은 꽤 비싼 터라 약간 저렴한 숙소를 잡는다는 것이 그만 그렇게 됐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는 박한제 선생님(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과 석상들을 찾아나섰다. 마답흉노(馬踏匈奴)상과 61번신(蕃臣)상이다. 마답흉노상은 한무제 시대의 장수로서 흉노와의 전쟁에 일생을 바치다시피 했던 곽거병의 묘(한무제 茂陵의 배장묘)에 있는 석물이고, 61번신상은 당고종 이치와 무측천 부부의 능침인 건릉(乾陵)에 있는 석물이다.

먼저 무릉을 찾아갔다. 이른 아침이기도 했지만 관람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주변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으나 왠지 모를 적막감이 압도적이었다. 무릉 정문 앞에 서니 사람의 손으로 쌓은 봉분치고는 너무 크다고 느껴졌다. 봉분에 다가서면서도 그 막막함은 그대로였다. 왜 이런 느낌이었는지는 무릉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입간판 하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무릉은 여러 면에서 중국 황제의 능 중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능침의 조성기간이 53년으로 최장이고, 매년 국세의 3분의 1을 쏟아부어 조성자금도 최다이고, 능을 관리하는 능읍의 인구가 27만7000여명으로 최다이며, 배장묘가 60여개나 되는 것도 최다라고 했다. 40여년간 정벌전쟁만 고집하다가 선조들이 물려준 국력을 탕진하는 한쪽에서는, 자신의 무덤에 국세의 3분의 1을 쏟아부었으니 한무제는 과연 무엇을 바랐던 것인가. 그의 생각 속에서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씁쓸한 생각으로 무릉을 나와 곽거병의 묘를 찾아갔다. 2㎞ 거리다. 봉분 앞에 있는 마답흉노, 즉 말이 흉노인을 짓밟고 있는 석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말에게 짓밟힌 흉노인은 죽어가면서도 창을 움켜쥐고 말의 배를 찌르고 있다. 처절한 전투를 묘사했다. 그런데 그 말에 한나라 병사가 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말과 사람이 싸우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동원하여 한나라는 흉노인을 죽이는 것이다.

흉노는 북방초원에 군사적으로 강력한 제국을 세웠다. 그들은 부족한 물자를 남방에서 조달해야만 했다. 말이 조달이지 약탈이거나 불공정한 교역이었다. 약탈은 그들에게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흉노의 생존 방식은 중원에는 언제나 공포였다. 한고조 유방에서 한무제 직전까지 다섯 황제는 흉노가 요구하는 물품 목록에 황실의 공주까지 얹어서 꼬박꼬박 바치는 것으로 약탈과 전쟁을 회피했다. 그러나 충분한 국력을 비축했다고 판단한 한무제는 선조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다. 굴욕적인 조공을 중단하고 사생결단의 결전을 벌였다. 이런 남북대결의 공포와 흉노 정벌의 희원이 마답흉노 석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죽했으면 군사가 아닌 군마가 흉노인을 밟는 것으로 묘사했을까. 역사는 대결 국면을 거쳐야만 공존이 낫다는 것을 힘겹게 터득하는 것 같다. 서로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관용은 집단적인 이해관계의 충돌 앞에서는 무기력한 독백인지도 모른다. 마답흉노는 이해관계의 극단적 충돌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제로 대표되는 한나라 황제들의 대외정책이 패권주의를 일관되게 향하였음을 보여준다.

곽거병의 묘를 나와 건릉을 찾아갔다. 건릉은 무릉에서 서북으로 40여㎞ 떨어져 있다. 달력으로는 가을이었지만 뜨거운 햇살이 들판을 뒤덮어 우리 일행의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건릉은 셴양시 첸현(乾縣)의 양산(梁山)에 조성되어 있다. 봉분을 인공으로 쌓아올린 무릉과는 달리 산봉우리 자체를 봉분으로 삼아 조성했다. 대대적인 노역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53년간 국세의 3분의 1을 쏟아 조성한 무릉과는 분묘 조성의 발상법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가슴에 먼저 다가왔다.

건릉 입구에 들어서서 분묘로 올라가는 긴 신도(神道) 좌우에 수많은 석상이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 61번신상이 있다. 서쪽에 32개 동쪽에 29개 등 모두 61개의 석상이 오와 열을 맞춰 운집해 있는 독특한 석물이다. 당나라 변방의 여러 민족이나 국가의 사신들이 당 고종의 서거에 조문을 하는 형상이라는 설이 있다. 혹자는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주변국의 조문 사신이라고도 해석하고, 당나라가 지배하던 당시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있던 주변 속국이라고 해석하는 등 시각에 따라서는 약간의 온도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닌 것 같다. 박한제 선생님은 “61번신상은 마답흉노가 보여주는 적대관계가 아니라 교류하고 공존하는 우호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호와 한을 융합하여 탄생한 대당제국은 주변국과의 관계 역시 공존과 교류를 기본 목적으로 하는 ‘제국’ 체제였다는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강압적 힘만으로 떵떵거린 제국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서로 교류하고 공존하는 장을 제공했다는 면에서 진정한 제국이라는 것이 박한제 선생님의 설명이다.

대당제국 수도인 장안의 서시를 복원한 광장에 서 있는 청동상 사로악무. 낙타 위에 무대를 얹고 무대에는 호선무를 추는 호희가 있다.
대당제국 수도인 장안의 서시를 복원한 광장에 서 있는 청동상 사로악무. 낙타 위에 무대를 얹고 무대에는 호선무를 추는 호희가 있다.

대당제국의 수도 장안으로 최치원을 비롯한 많은 신라인과 일본의 승려들이 몰려들었다. 동쪽에서만이 아니다. 남에서 북에서 그리고 서역을 통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한나라 시대의 장안은 유목민족에게는 약탈의 목표이자 상징이었고, 주변국 사람들도 일을 마치면 미련 없이 귀국하는 남의 나라 수도였다. 그러나 대당제국의 장안은 달랐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언어와 문화와 재화를 싣고 와서는 한데 융합되어 새로운 것을 낳았다.

그렇게 발전한 동아시아의 문명은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선진문명을 공부하기 위해 외국 유학생이 몰려들었다. 일부는 귀국하지 않고 당나라에 눌러앉아 출세의 길을 걷기도 했다. 상인도 승려도 유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 이전의 세계사에는 없었던 새로운 세계사를 써나갔다. 당대의 장안은 세계 최고의 도시였다.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는 북방 민족에 휘말려 초라한 몰골로 주저앉았다. 장안이 백만 인구를 자랑할 때 로마는 십만 인구에 지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역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나 장안에 비교할 수 없었다. 이것이 대당제국의 영화요, 호한융합의 힘이었고, 탁발선비 천년 역사의 종착점이었다.

61번신상에 담긴 호한융합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탁발선비 역사기행을 마치기로 했다. 박한제 선생님과의 동반도 여기까지였던 터라 동반자들이 역사기행 현장학습에 감사의 박수를 치고 마무리했다. 다음 날 박한제 선생님은 퇴직 이후에도 계속되는 또 다른 학술 일정에 맞춰 우리 일행보다 며칠 먼저 귀국했다. 이날까지 박한제 선생님이 동반한 답사는 25일간 차량운행 거리로 7653㎞였다.

박한제 선생님을 셴양공항에서 송별하고 우리는 시안 시내로 들어섰다. 하루를 휴식하고는 다음 날 남은 일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서시(西市)를 찾았다. 대당제국의 수도 장안에는 동시와 서시 두 개가 있었다. 동시는 국내시장이었고, 서시는 국제무역시장이었다. 실크로드가 교역로라는 면에서 시발점과 종착점은 당연히 시장이고, 실크로드 동쪽 터미널이 바로 장안의 서시였던 것이다.

대흥안령 삼림 속의 알선동에서 시작된 탁발선비 천년 역사는 호한융합을 맥으로 전개되어 왔다. 호한융합이 가장 적극적으로 개화시킨 역사는 유라시아 동서의 교역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대당제국 수도인 장안의 국제시장 서시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유라시아의 실크로드는 당나라 시대에 가장 번성했으니.

당시의 시장은 1500년이 지난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은 시안시 서남부, 원래 서시가 있던 그 자리에 실크로드 문화와 성당(盛唐)의 상업문화를 보여주는 대당서시(大唐西市)를 복원하고 있다. 원래의 서시와 동일하게 동서와 남북으로 두 개씩 길이 가로질러 아홉 개의 장방형 방(坊)으로 구분되어 있다. 한가운데 5방에는 대당서시 호텔이 들어섰고, 4방에는 대당서시박물관이 신축되어 있다. 2개의 방은 광장으로 조성했고, 나머지 5개의 방은 상가 건물이다. 1차 개발사업이 완료된 지금 대당서시박물관과 오성급 호텔, 그리고 실크로드 조형물이 멋진 넓은 광장이 여행객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대당서시박물관은 전면이 오각형으로 된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서시가 있던 그 자리에 세웠다. 박물관 입구에는 서시유지라는 표지석도 있다. 박물관 바로 앞에는 서시가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멋진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투명한 발판 아래 당시의 도로와 교량의 발굴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표면 2~3m 깊이에 묻혀 있던 당시의 십자가(十字街) 일부를 발굴한 것이다.

한무제 시대 장수인 곽거병의 묘에 있는 마답흉노상. 말에게 짓밟힌 흉노인이 죽어가면서도 말의 배에 창을 찌르고 있다.
한무제 시대 장수인 곽거병의 묘에 있는 마답흉노상. 말에게 짓밟힌 흉노인이 죽어가면서도 말의 배에 창을 찌르고 있다.

박물관 1층에서는 도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중국인 도예작품 가운데 현대적이면서도 실크로드를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 가운데는 당대에 유행했던 호선무(胡旋舞)를 묘사하는 것도 있었다. 눈썹이 짙고 코가 오뚝한 서역 사람들도 있었다. 아예 서양의 소녀와 같은 도자 작품도 있었다.

광장에는 사로악무(絲路樂舞)라는 커다란 청동상이 눈에 띄었다. 조각상의 높이만 해도 9.27m이고 기대까지 하면 14.88m나 되는 것 두 개가 짝을 이루고 있다. 낙타 위에 무대를 얹고 무대에는 호선무를 추는 호희(胡姬)가 있고 이국적인 선율을 연주하는 악사들은 바깥쪽을 향해 둘러앉아 있다. 파란 눈을 가진 미모의 호희가 요염하게 허리를 드러내고 춤을 추는데 생동감이 넘치는 듯하다.

대당제국의 화려함, 곧 장안의 화려함을 집약해서 전해주는 것의 하나가 호희주사(胡姬酒肆)다. 장안의 서시에는 특히 객사와 주점이 즐비했다. 주점 거리에서도 로마의 예술과 비잔틴 풍격의 건축, 그리스의 화염처럼 생긴 인동화 문양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인도의 곡예, 마술 역시 장안의 구경거리 중 하나였다.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출신의 아리따운 여성들이 이국적 미모를 뽐내면서 거리를 누비고 주점을 장식했다.

시인 이백의 장안 찬가에서도 ‘오릉의 청년들이 은빛 안장에 백마를 타고 낙화를 밟으며 호희주사로 들어간다’고 노래했다. 신라에서 온 젊은 지식인 최치원도 서시의 호희주사 거리를 기웃거렸을 것이고, 일본에서 온 승려 원인(圓仁)도 이 거리에서만큼은 시선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르칸트에서 온 상인들은 양털과 비취와 보석을 팔아서 남긴 돈으로 호희들에 둘러싸인 채 비싼 포도주를 주문하곤 했을 것이다.

대당제국의 장안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었고 세계인들 역시 장안을 무대로 삼았다. 장안은 인구 백만의 도시로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성이었고 세계사의 중앙 무대였다. 이렇게 장안이 대당제국의 봄과 밤을 꽃피운 지 1500년가량 흘렀다. 답사일행은 서시를 복원한 대당서시 광장에서 탁발선비 역사기행을 마감했다.

다음 날 나머지 일행은 모두 귀국 비행기를 탔고 나는 차량에 몸을 싣고 베이징까지 몇 군데 보충 답사를 했다. 베이징에 도착하여 답사차량을 하얼빈으로 돌려보낸 건 내가 서울을 떠난 지 34일째 되던 날이다. 하얼빈에서 출발하여 베이징까지 34일 동안 차로 9300㎞를 답사한 것이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열일곱 편으로 나눠 글을 써나가면서 박한제 선생님과 많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소회를 물었더니 며칠 후 회신을 받았다. ‘석학인문강좌57 대당제국과 그 유산-호한통합과 다민족국가의 형성’이라는 440쪽에 달하는 두툼한 단행본이 방금 인쇄되어 나왔다는 소식과 함께 이런 말씀으로 마무리되었다.

“역사의 현장을 찾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책에서만 느낄 수 없는 현장감을 만끽할 수 있다. 현장을 버린 역사연구는 진실의 반을 포기한 것이다.” 퇴직 후에도 학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학술과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노학자의 한마디는 간결하지만 육중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중국 대륙 여행이 10년째이고, 그 가운데 역사를 읽고 현장을 찾아 돌아다닌 것이 최근 나의 5년의 주된 일과였다. 2014년 초에는 마오쩌둥의 대장정 코스를 답사했었다. 후난성 창사에서 시작하여 장시성 루이진에서 옌안을 거쳐 시안까지 1만2800㎞였다. 그 다음은 탁발선비 천년 역사를 좇아 알선동에서 시안까지 9300㎞를 답사한 이번 연재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시안에서 마무리하는 또 하나의 답사여행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대당서시(西市) 광장에서 실크로드를 직접 느끼는 그 순간부터 시안에 도착하는 또 다른 길로 나서라고 무엇인가가 나를 충동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을 독자 여러분에게 배달하기 위해 편집자가 애쓰는 시점에 나는 박한제 선생님과 함께 신장성 우루무치에서 시안에 이르는 실크로드 동단 답사여행을 장안의 대당서시에서 마무리하고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번 탁발선비 역사기행 연재를 마치면서, 알선동에서 장안까지 25일간 동반해주시고, 동반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부족한 글을 살펴주신 박한제 선생님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오무근, 엄문희, 연규승, 최치영, 인성배님 등 낯선 역사기행에 즐겁게 나서준 동반자들에게도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내가 조용히 글을 쓸 수 있게 집필공간과 편의를 제공해준 한국전통문화대학의 진경환 교수와 관계자 여러분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M.net 기획국장 편성국장, 팍스인슈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06년부터는 중국 인문기행을 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 제작하고 있다. ‘중국 식객’ ‘중국 민가기행’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등의 저서가 있다. blog.naver.com/kimyto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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