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 나흘 만인 6월 28일 서울 함락, 7월 4일 한강방어선 붕괴….

속절없이 패퇴를 거듭해온 대한민국은 남침 40일 만에 국토의 80%가 북한 공산군에 유린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육군 수뇌부는 급기야 8월 4일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곳마저 뚫리면 대한민국은 김일성의 수중에 떨어져, 스탈린의 세계공산화 전략이 한반도에서 실현되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전쟁 직전 육군 장교는 총 6617명. 이 중 소대장급(중위·소위) 가용 인원은 2413명이었다. 전쟁 발발 40여일 만에 소대장급 장교의 60%인 1478명이 전사했다. 남은 중·소위급 장교는 965명. 이 인원은 총 10개 사단에 소요되는 소대장 2950명의 32%에 불과했다.

1951년 3·1절 기념 체육대회에서 우승한 중대의 기념사진(23기). photo 육종전우회
1951년 3·1절 기념 체육대회에서 우승한 중대의 기념사진(23기). photo 육종전우회

전쟁 발발 40일 만에 장교 60% 전사

육본은 후퇴하면서 7월 8일 이미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와 경기도 시흥 육군보병학교를 임시 폐교한 상태. 이 상황에서 육군종합학교(이하 육종)가 초급 장교 속성 양성 기관으로 8월 15일 부산 동래여고에서 개교했다. 1기생은 9월 4일 입교했다. 그리고 다음해 1951년 8월 18일까지 6주 내지 9주의 훈련을 받고 임관한 장교는 32기까지 보병 4757명을 포함해 7288명이었다.<표 참조>

백락만 육군종합학교 전우회 사무국장(육종 16기)은 육군종합학교 졸업생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 입교생들은 거의가 민간인 출신으로 학생, 교사, 교수 등 각계각층의 인사를 비롯해 심지어는 30대 후반으로 병역 의무가 없는 인사들까지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 의병정신으로 궐기했다. 당시 ‘하루살이 소모 소위’라는 별칭이 붙은 소대장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입교했다.”

육종의 첫 졸업생은 1950년 10월에 배출되었다. 육종 출신 소대장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은 중공군 1차공세(10월 25일~11월 5일) 때였다. 첫 번째 전투에서 소대장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중공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소대장들은 고립 상태에서 남쪽으로 퇴각해야 했다. 소대장들은 굶주린 상태에서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과 험준한 산악지형을 뚫고 걷고 또 걸었다.

소대장들은 다시 중공군 2차공세(11월 25일~12월 25일)와 신정공세(12월 31일~1951년 1월 15일)에 다시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덕천 부근 전투, 길수-청진-부령 진격전, 합수-청진-흥남 철수작전, 동두천 부근 전투, 서울 철수작전, 남대리 부근 전투 등이 소대장들이 참전한 대표적인 전투였다. 이 시기에 소대장 3170명이 참전해 170명이 전사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불법적인 개입으로 1951년 1월, 37도 선인 평택-안성-제천-삼척선까지 후퇴했다. 재반격기는 1951년 2~6월.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재반격해 현재의 휴전선까지 진격했다. 이 기간 동안 전투를 지휘한 육종 소대장들은 5700여명. 이 중 386명이 희생되었다.

하루 평균 6㎞ 행군… 졸면서 걸어

전제현씨(예비역 소장·육종3기)은 6·25 당시 충북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제현은 동료들과 함께 피란길에 나서 전주까지 가게 됐다. 그는 우연히 전봇대에 붙어 있는 ‘지원병 모집’ 광고를 보았다. 전제현은 ‘그래 입대하자. 이북에서 혼자 월남한 놈이 피란만 가는 건 비겁하지 않나. 나라가 큰 위기를 맞았는데 나도 나가서 몸뚱이 값이라도 하고 죽어야 할 것 아닌가’라는 마음으로 입대를 결심했다. 전제현은 7월 13일 전주 중앙초등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모병소를 찾아가 입대, 2등병이 되었다. 이후 전제현은 군복도 입지 못한 채 부대원들과 함께 남으로 걸어내려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그는 1등병으로 진급했다. 1등병이 된 지 얼마 안돼 그는 지명이 되어 육군종합학교에 3기생으로 입교했다.

1950년 10월 말 3기생 132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먹고 자며 사흘 만에 영등포역에 내렸다. 한강다리는 끊겨 있었다. 132명은 한강 위에 임시로 설치된 부교(浮橋)를 걸어서 육군본부에 도착했다. 전제현은 동료들과 함께 도요타 트럭을 타고 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평안남도 개천(价川)에 있는 6사단에 편입되었다. 전제현은 조양탄광 북쪽 998고지에서 처음으로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제현씨의 회고다.

“중공군과의 거듭되는 전투에 쉴 틈이 없었다. 높은 고지에서 밤마다 침구 대신 가랑잎을 긁어다가 무릎 위에 올려놓아 추위를 견뎌보려고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모든 전선은 38선까지 물러서게 됐고 우리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36㎞를 도보로 행군했다. 병사들은 걸어가면서 졸았고 50분 후 10분 휴식할 때에는 눈으로 꽁꽁 얼어붙은 길바닥에 벌렁 누워 코를 골면서 잤다.

다시 출발할 때에는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을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찧으면서 일으키지 않으면 움직이려 하지도 않았다. 다 같이 고달픈 나날이었다. 소대에서 어느 병사보다도 나이가 어린 게 소대장이었지만 그래도 장교라고 병사들을 지휘하고 질타하고 달래고 부상병을 보살폈다. 진지에 배치된 날에는 순찰을 했다. 이렇게 하여 38선까지 다시 돌아온 우리는 1951년 1월 공세를 거쳐 횡성, 홍천, 양동, 지평 등지에서 전투를 했다. 4월에 사창리에서 중공군과 대전투를 벌였지만 크게 패해 용문산에 이르게 되었다.”

육종 출신 노병들이 2009년에 국립이천호국원을 찾았다. photo 육종전우회
육종 출신 노병들이 2009년에 국립이천호국원을 찾았다. photo 육종전우회

110여개 전투 지휘, 2762명 훈장

6·25 전쟁은 1951년 7월부터 12월까지 진지전의 양상을 띠었다.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은 서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초 거점 쟁탈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 육종 소대장은 226명이 전사했다. 1952년에 전선은 소강 상태로 고지 쟁탈전을 계속했다. 1년간 희생자 수는 급감해 66명이었다. 그러나 1953년 4월에 접어들자 휴전회담이 급진전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되자 양측은 군사상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화력을 집중시켰다. 중부전선의 금성지구 전투와 금화지구 전투가 대표적으로 치열한 전투였다. 1953년 육종 장교 희생자는 74명. 전투가 치열했던 상황에 비하면 희생자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육종 출신 장교가 대위나 중위로 진급해 대부분이 일선 소대를 떠나 중대장, 대대참모 등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육종 장교들은 모두 2762명이 훈장을 받았다. 이 중 최고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이는 김교수 대위(32기). 김교수 대위는 1953년 7월 14일 금성 남쪽 교암산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뒤 전사했다. 휴전을 불과 13일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의 희생은 더욱 안타깝고 동시에 빛이 난다.

현재의 휴전선을 38선과 비교해 보라. 중동부 전선 부근에서 휴전선은 38도 위로 북상해 있다. 바로 휴전 직전의 고지전에서 국군이 공산군을 물리친 결과다. 수많은 고지전을 지휘하다 스러진 이가 김교수 대위 등 366명이었다.

육종 장교들은 6·25전쟁 33개월 동안 110여개의 크고 작은 전투를 지휘하는 과정에서 1300여명이 조국의 산하에 고귀한 피를 뿌렸다. 이는 같은 기간 중 총 장교 전사자의 33%에 달하는 수치다. 대부분이 꽃다운 나이인 20대 초중반이었다. 운이 좋아 목숨은 구했다고 하더라도 임관자의 32.3%인 2256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중에는 신체장애가 된 사람도 있고 현재까지도 후유증에 신음하는 사람들도 있다.

좌)경기도 이천에 있는 국립이천호국원의 충용탑, 기단부에는 졸업생 728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photo 육종전우회 / 우)육군종합학교 임관자 명단 photo 육종전우회
좌)경기도 이천에 있는 국립이천호국원의 충용탑, 기단부에는 졸업생 728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photo 육종전우회 / 우)육군종합학교 임관자 명단 photo 육종전우회

장군 127명·국회의원 15명 배출

육종을 졸업한 장교 중 영관 장교가 된 사람은 임관자의 36%인 2668명. 이 중에서 장군이 된 사람은 김홍한 대장을 비롯해 127명이었다. 육종 장교가 마지막으로 현역에 있었던 시기는 1985년이었다. 전역한 이들 중에는 국회의원 15명, 대학총·학장 28명 등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육군종합학교는 6·25를 위해 태어났고 6·25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6·25전쟁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북한 공산군 침략 앞에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대한민국을 구하겠다고 나선 젊은이들. 현재 살아남은 육종 장교들의 평균 나이는 82세다. 이제 인생의 황혼녘에 서 있다. 전제현씨의 회고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군에 남아 1968년 1·21사태 당시 6군단 작전참모로, 1971년 주월남사령부 작전참모로 복무했다. 나중에 장성으로 진급해 예편 후에는 고등학교 교장과 육군종합학교 전우회장까지 역임했다. 이런 영광을 누린 것은 하루살이 소대장, 소모품 소위로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육군종합학교 출신 동료들의 희생과 조국애 덕분이라는 것을 살면서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현재 경기도 이천에는 국립이천호국원이 있다. 이곳에 가면 육종 출신 장교들의 나라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국립이천호국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작은 연못 호국지(池)가 보인다. 호국지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호국 영령(英靈)을 기리는 충용탑이 세워져 있다. 육종 전우회가 1976년에 세운 기념탑이다.

전우회는 1998년 4월 이 충용탑 기단부에 육종 출신 전원의 명단을 기수별로 오석(烏石)에 명각(銘刻)했다. 먼저 간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이 빼곡하게 어깨를 맞대며 전우애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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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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