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선 형광분석기기를 이용해 그림의 색상별 원소 분석을 하고 있는 최명윤 교수. photo 정복남 영상미디어 기자
X선 형광분석기기를 이용해 그림의 색상별 원소 분석을 하고 있는 최명윤 교수. photo 정복남 영상미디어 기자

“미술계에서 싸움닭이라고 부르던데요.” “싸움닭요? 그 정도면 아주 점잖은 거죠. 허허.”

국제미술과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최명윤(62) 명지대 대학원 문화재보존관리학과 교수를 찾은 날은 서울옥션 경매에서 이중섭의 유화작품 ‘황소’가 35억6000만원에 팔린 다음 날이었다. 그는 지난 2005년 이중섭 작품 위작사건과 지난해 법원 판결로 일단락된 박수근의 ‘빨래터 사건’ 당시 위작임을 주장하면서 진위공방의 논란에 불을 지폈던 ‘문제의 인물’이었다.

미술계를 발칵 뒤집었던 두 사건을 거치면서 그는 미술시장 사람들에게는 ‘뺄 수도 박을 수도 없는 가시’가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술시장이 급속 추락하는 와중에 위작 시비는 잔뜩이나 위축된 미술계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위작 시비의 두 주인공이자 미술시장의 최고 블루칩인 이중섭·박수근의 작품이 다시 시장에 나오기 시작하고 미술시장 회복에 대한 기대가 살아나고 있는 요즘 그는 뭘 하고 있는지, 미술시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중섭의 ‘황소’를 말하다

먼저 지난 6월 29일 서울옥션에서 팔린 이중섭의 ‘황소’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작품을 직접 안 봤으니 뭐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다”면서도 “30억원이니 40억원이니 가격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수작인지 졸작인지, 작품에 대한 평가를 먼저 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논리로만 움직이는 요즘 미술계에 쓴소리를 던졌다. 그는 “미술시장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통 관심이 없다”면서도 이번에 경매에 나온 ’황소‘와 이중섭의 다른 소 작품에 대한 비교분석을 이미 해 놓고 있었다. 그는 실제 소 사진과 ‘황소’를 비교해서 보여줬다. 그는 “어깨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근육의 연결, 소의 얼굴 각도와 뿔·귀의 위치, 전진하는 소를 다리가 제대로 받쳐주고 있는지, 다리의 각도가 제대로 됐는지 등을 봐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이중섭은 누구보다 소를 잘 알고 있었다. 소 도둑으로 몰릴 정도로 소를 관찰하고 수없이 드로잉을 했다. 이중섭의 소들을 보면 움직임이나 생김새에 대한 묘사가 정확하다. 그런 관점에서 황소 작품을 살펴보라”고 덧붙였다. 그는 “미술애호가든 수집가든 다른 사람의 눈만 믿지 말고 스스로 미술공부를 하고 분석해서 작품의 가치를 따질 수 있어야 한다”며 “이중섭의 ‘황소’ 작품도 정확한 분석을 통해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했다. 그러한 도상분석이 바로 ‘과학’이고 위작을 가려내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과학감정과 미술과학

미술계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도 그는 아직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법정소송으로까지 번졌던 박수근의 45억2000만원짜리 ‘빨래터’ 위작사건에서 논란의 핵심은 ‘과학감정’이었다. 미술감정은 안목감정과 과학감정이 있다. ‘안목감정’이 감정가의 연륜·경험·직관을 통해 진위 여부를 판단한다면 ‘과학감정’은 종이·물감과 같은 재료분석 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작품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이다.

빨래터를 경매에 올렸던 서울옥션 측은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위원 20명의 ‘안목감정’을 진품의 근거로 제출했다. 여기에 맞서서 그는 ‘과학감정’을 내세워 빨래터가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빨래터’ 논란은 지난해 11월 4일 법원이 “진품인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2년이 넘는 지루한 싸움을 끝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와 가까웠던 갤러리 대표들도 대부분 등을 돌렸다.

‘최명윤’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킨 것도, 화랑가의 ‘공공의 적’으로 만든 것도 ‘과학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빨래터’와의 싸움을 아직 끝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빨래터’뿐만 아니라 박수근의 작품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 자료를 5년째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있었다.

그는 왜 이렇게 고단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미술시장을 흔들자는 것이 아니다.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위작이 판을 치는 바람에 박수근·이중섭은 완전히 망가졌다. 한국 대표작가인 박수근·이중섭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위작들을 반드시 걸러내고 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한국 미술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과학감정’에 대한 질문을 하자 그는 ‘과학감정’이 아닌 ‘미술과학’이라고 바로잡았다. “미술과학이 재료만 분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종이·물감 등 물질 분석만으로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림이 왜 문제가 있는지, 또는 진짜인지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객관적인 방법들을 동원해서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미술과학이다.”

그는 ‘미술과학’에서 진위를 가리는 기준이 바로 작가와 작품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라고 생각한다. 정확한 데이터를 위해

1억5000만원이나 하는 물질분석기도 샀다. 최근에는 박수근 작품의 마티에르(질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박수근처럼 여러 번의 덧칠을 통해 화강암 같은 마티에르를 표현해낸 과정을 실험해 보고 있다. 어떤 층에서 색을 칠했느냐에 따라 작품에 나타나는 색이 달라진다. 그것을 밝혀내면 박수근 작품의 기준을 만들 수 있다. 그 기준을 바탕으로 박수근 작품들을 분석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미술 희망은 있다”

그는 “빨래터 싸움 당시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말을 거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때 우리 세대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다음 세대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수근과 이중섭에 대해 5년째 구축한 자료를 모두 CD로 만들어 100명의 학생에게 나눠줬다. 그는 학생들과 박수근 작품에 대한 스터디도 계속 해오고 있다. “현업에 있는 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겠지만 내가 해결을 못하면 젊은 그들이 그 일을 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는 홍익대 미대 출신이다. 이두식 현 홍익대 교수가 동기다. 서양화를 전공했던 그가 어쩌다 미술품 보존 작업에 올인하게 됐을까. 그의 부친은 1940~1950년대 서울에서 화방 두 곳을 운영했다. 당시 우리나라에 화방이 딱 세 군데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물감을 갖고 놀면서 자랐다. 화방 심부름도 도맡아 했다. 그가 미대에 진학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찢어지고 물감이 엉겨붙어 화방에 실려온 ‘사고 작품’을 많이 봤다. 미대생인 덕분에 작품을 손보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그림을 못 그리니 보존미술 쪽으로 눈을 돌렸다”고 말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양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를 마치고 1984년 프랑스 8대학 조형미술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랄페르기술연구소에서 복원기술을, 고등장식미술학교인 아르데코에서 벽화기술을 배웠다.

그는 요즘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한동안 그만뒀던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총체적으로 사활을 걸까 생각 중이다. 그러려면 체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술계에서 욕먹는 것쯤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는 숨을 몰아쉬고 막 돌진하려는 이중섭의 ‘소’와 닮아보였다.

황은순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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