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없어졌는지도 몰라
이 충무공이 전장에서 작성 1592~1598년까지 8권 남겨
을미일기 발견 땐 역사·관련서적들 수정 불가피

사라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한 권은 어디에 있을까? 충남 아산의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소장 김상구)가 사라진 난중일기 한 권의 행방을 추적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라진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 8권 중 한 권인 ‘을미일기’다. 을미일기는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 발발에서 4년째가 되는 을미년(1595년)에 작성됐다. 난중일기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약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직접 전장(戰場)에서 쓴 일기로, 1962년에 국보 76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을미일기는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 유실됐는지 알려지지 않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그러나 최근 “사라진 난중일기를 본 적이 있다”는 진술이 문화재 당국에 접수돼 사라진 을미일기를 되찾을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을미일기’ 언제 사라졌나

지난 12월 8월 충남 아산시 염치읍 외곽에 자리잡은 현충사는 아침부터 내린 눈으로 입구가 제법 질척였다. 이순신 장군의 생가를 중심으로 조성된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는 궂은 날씨 탓에 관람객의 발길이 끊긴 채 한산했다. 입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한옥 디자인의 유물관이 있었다. 유물관 내 유리관 안에는 때가 묻어 검은빛이 도는 원본 난중일기가 여러 권 진열되어 있었다. 세어보니 모두 7권이었다. 을미일기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을미일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순신 연구자들은 알고 있었으나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을미일기 분실’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도 검색 문건에서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건 잘 보이지 않는다. 송대성 현충사관리소 기획운영과장은 주간조선과 만나 “지금 을미일기가 사라진 사실이 일반인에게 알려져 논란이 되면 영영 이 충무공의 일기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우리도 일기가 유실된 시점은 정확히 모른다. 다만 최근 지역 내 유력 문중에서 ‘난중일기’를 봤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추적 중에 있다. 국보인 난중일기를 찾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이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자료를 인멸하거나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을미일기가 사라진 시점은 분명치 않다. 난중일기 중 을미일기의 존재가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는 마지막 시점은 1795년 조선 정조 때다. 당시 정조는 이 충무공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난중일기의 친필 초고본을 바탕으로 이 충무공 전서를 편찬케 했는데 이 충무공 전서에는 을미일기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후 을미일기가 계속 존재했다는 여타 공식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을미일기 유실 시점으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일제강점기다. 1920년대를 전후해서 난중일기를 갖고 있던 이 충무공의 직계 자손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종손이었던 고(故) 이종옥씨(충무공 13대손)는 가문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정치적 탄압을 겪던 그는 만주로 이사를 가게 됐고, 이 과정에서 이 충무공 등 조상이 남긴 보물급 유적들을 충남 아산시 염치읍의 유력가 집안 중 하나에 넘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현충사 측은 보고 있다.

실제로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는 이종옥씨가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가깝게 지냈던 아산 염치의 풍천 임씨 집안에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들을 다수 넘겨준 것을 최근 확인했다. 김상구 현충사관리소장은 “풍천 임씨 집안의 자손인 임창웅씨가 현재 염치읍에 살고 있는데 그는 1979년 이 충무공의 국보급 문화재인 사부유서 등을 우리에게 기증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 집안에 한 궤짝 분량의 이씨 집안 고서 및 교지들이 보관돼 있어 최근 이를 확인한 바 있다”고 말했다.

임씨 종가, 충무공 유적 6궤짝 보관

현충사 측에 따르면 풍천 임씨 집안은 숙종 때부터 고위 관직을 여러 명 배출한 지역 내 유력 가문이다. 현충사가 있는 아산시 염치읍 일대는 임씨 종중의 본산이기도 하다. 특히 이종옥씨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던 임창웅씨의 할아버지는 학문하는 선비로서 역사에 대한 인식도 남달랐다고 한다. 임씨의 할아버지는 지역에 학교를 건립하는 등 독지가로 평판을 얻기도 했다. 때문에 임씨의 할아버지가 이씨 종가에 유·무상의 경제적 지원을 하는 대신 이씨 종가에서 맡긴 충무공의 유적들을 보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현충사의 판단이다.

실제 임창웅씨의 주장에 따르면 임씨 조부가 생전에 보관하고 있던 이씨가의 유물이 무려 여섯 궤짝 분량이나 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한 궤짝을 임씨의 할아버지가 임종 직전 임씨에게 유산으로 물려줬다고 한다. 하지만 임씨가 유산으로 받은 궤짝에서는 이 충무공의 사부유서 등 보물급 자료들이 나왔지만 난중일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송대성 과장은 “최근 임씨 집에 가서 직접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홍패(과거급제 교지), 녹패(급여 교지), 사부유서, 칙령 등 125점의 유물들이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난중일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일제시대 번역본에도 누락

충남 아산 현충사 유물관에 전시된 7권의 ‘난중일기’ 원본.
충남 아산 현충사 유물관에 전시된 7권의 ‘난중일기’ 원본.

현충사 측은 임씨 집안에 나눠서 보관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나머지 다섯 궤짝의 덕수 이씨 종가 유물에 사라진 을미일기가 포함돼 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현충사 측은 조만간 나머지 다섯 궤짝에 대해서도 조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송 과장은 “임씨 가문에 양해를 구해 이 충무공 관련 유적을 한번 살펴볼 계획이다. 임창웅씨가 과거에 ‘일기’라고 쓰여 있는 고책자를 할아버지 댁에서 봤다고 전해 왔다. 개인 소유로 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충사 측은 1590년대에 일기를 쓴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임씨 종가에서 일기라고 적힌 책자가 있다면 충무공의 을미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 역시 “을미일기 1권이 통째로 사라졌다면 누군가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러 폐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세대를 거치면서 한문으로 적힌 난중일기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 가치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난중일기라는 명칭은 실제로 임진왜란이 발생한 지 200년이 지난 1795년 정조가 붙인 명칭이다. 실제 난중일기 표지에는 ‘일기(日記)’라고 적혀 있고 이 충무공이 작성했다는 표식도 없다.

정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의 기간에 을미일기가 사라졌을 것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1935년경 조선총독부의 난중일기 번역 작업에서 간접적으로 근거한다. 조선총독부는 난중일기 초고본을 빌려 일본어로 번역을 했는데, 이 번역본에도 을미년에 작성한 일기 부분은 없다. 이에 따라 당시 총독부에는 을미일기 초고본이 전달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의도적으로 을미일기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이때 을미일기는 이씨 종가의 손을 떠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대성 현충사 과장은 “현실적으로 보면 일제 치하에서 종가를 떠난 것으로 보는 시각이 가장 유력하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에선 을미일기가 일본으로 넘어갔을 개연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스님은 “종가에 불이 난 적이 없고 이씨 종가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료를 외부에 넘겨주기라도 했다면 돌고 돌아 결국 일본의 손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우선 국내에 소장 가능성이 있는 곳을 먼저 찾아보는 게 급선무겠지만 해외 반출자료도 찾아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 관리 당국도 일본이 난중일기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점에 예의주시하고 있다. 문화재청 한 관계자는 “당시 난중일기는 일본에서 욕심을 많이 냈던 유적이다. 한·일 전쟁사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이 충무공에 대한 존경심도 상당했다”고 말했다. 이런 관심을 반영하듯 난중일기는 우리말로 번역되기에 앞서 조선총독부가 일본어로 먼저 번역했다.

1967년 한 차례 난중일기 도난사건

지난 12월 8일 사라진 ‘을미일기’의 행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상구 현충사 관리소장. 현충사 관리소는 문화재청 소관 부서다.
지난 12월 8일 사라진 ‘을미일기’의 행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상구 현충사 관리소장. 현충사 관리소는 문화재청 소관 부서다.

난중일기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갈 뻔한 적이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당시 이 충무공의 종가는 국내 은행은 물론이고 일본계 은행에서까지 상당한 대출을 받았다. 종손이 부채를 갚지 못하면서 이씨 종가의 토지와 유물들이 압류 또는 경매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1931년 동아일보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이 충무공유적보존회가 설립돼 국민적 성금운동이 일어났고 이 충무공의 유적이 보존될 수 있었다. 현충사 송대성 과장은 “당시 성금액은 모두 1만6000원이 넘을 정도로 큰돈이었다. 이씨 종가가 진 빚 2300원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 현충사에 건물을 짓는 등 충무공을 기리는 보존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1967년 발생한 ‘난중일기 도난 사건’ 당시 을미일기가 사라졌다는 관측도 있다. 이는 을미일기가 당시까지 존재했다는 걸 전제로 한 주장이다. 이씨 종가에서 관리하던 난중일기는 1967년 12월 31일 새벽 유근필 등 절도범 일당 6명에 의해 도난당했다. 당시 절도범들은 난중일기를 훔치기 위해 치밀하게 현장을 답사하고 범행에 착수했다. 이들은 난중일기를 당시 돈으로 1000만원 정도에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가 열흘 만에 극적으로 검거됐다. 유근필은 부산지역 표구업체를 돌며 골동품 중개상을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난중일기를 비닐에 싼 채 공범의 집 고추장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담화문을 발표하며 난중일기를 훔친 일당을 검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 대통령은 1967년부터 이 충무공에 대한 성역화 작업을 지시하는 등 이순신 장군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김원배 당시 수사연구관이 작성한 수사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대통령 담화가 있던 날 서울시경에는 30명의 형사들로 이뤄진 ‘국보 도난사건 특별수사전담반’이 꾸려졌다. 치안국 수사지도과 계장 등 실무진이 현장에 급파돼 수사지휘가 이뤄졌을 정도로 분위기가 엄중했다. 수사팀은 골동품 판매상과 동일 수법의 전과자 등 수천 명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실시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담화를 발표한 뒤 난중일기를 찾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됐고 청와대 민정비서실과 경찰 등에 제보가 쏟아졌다. 익명의 제보에 의해 덜미가 잡힌 절도범들은 난중일기가 도난된 지 10여일 만에 모두 검거됐고 도주했던 공범 양모씨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부산의 한 산기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도난 사건 이후 난중일기는 지난 2000년 데이터베이스 작업이 이뤄질 때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보물급 ‘우의정교지’ 등도 사라져

1969년 이 충무공에 대한 성역화 작업이 완료되기 전까지 이순신 장군의 유적 관리는 종가가 했다. 성역화 작업의 일환으로 난중일기 등 유물 19점과 고택, 임야, 묘소 등 유적을 문화재청에 기탁하는 방식으로 관리권이 정부로 넘어왔다. 현재 종갓집에는 현충사관리소에 맡긴 유적 외에도 수백 점의 고서가 소장돼 있다. 최근 종갓집을 리모델링 하는 과정에서 컨테이너에 쌓여 있던 고서 중 소장가치가 높은 370여점은 관리를 위해 문화재청이 추가로 기탁받았다. 현충사 측은 “을미일기와 더불어 보물급인 우의정교지, 감결(전쟁에 임하는 결의서) 등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까지 있는데, 실물이 사라진 경우가 더 있다”고 말했다.

최근 덕수 이씨 종가의 후손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부인 최모씨는 이 충무공의 고택과 토지 등을 매각하려다가 덕수 이씨 종친회와 법적 분쟁까지 했다. 일부 유물도 매각이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회는 종부를 상대로 유체동산점유이전 및 처분금지가처분 신청을 내 승소한 바 있다.

시민단체에선 개인의 소유지만 역사적 가치를 고려할 때 이 충무공의 유적을 정부가 전담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 난중일기 등 충무공과 관련된 모든 유적은 종부 최모씨 소유로 돼 있다. 이로 인해 최씨는 법적으로 해당 유적을 언제든 매각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혜문 스님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종가에서 현충사 매점을 운영할 권리를 주는 등 보상 차원의 배려를 했던 적이 있다. 종가와 협의를 해 국민적 영웅의 유적들이 사라지거나 매각될 수 있는 허점을 정부가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난중일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진중(陣中)에서 쓴 일기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됐다.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 난중일기의 구성을 보면 1권 임진일기(1592~1593) 27장, 2권 계사일기(1593) 30장, 3권 갑오일기(1594) 52장, 4권 병신일기(1596) 41장, 5권 정유일기(1597) 27장, 6권 속정유일기(1597~1598) 20장, 7권 무술일기(1598) 8장으로 돼 있다. 1595년 작성된 을미일기는 분실된 상태다.

정조는 1795년 윤행임과 유득공을 시켜 이 충무공의 친필 초고본을 바탕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했다. 본래 충무공은 일기를 썼을 뿐 따로 이름을 달지 않았다.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8권을 수록한 뒤 공식명칭이 됐다. 난중일기는 전투 준비상황, 군기 통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뇌, 가족에 대한 사랑, 왜군에 대한 적개심 등 개인적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역사적 가치가 높다.

사라진 을미일기의 내용

정적 원균·권율에 대한 감정 기록된 듯

사라진 을미일기 초고본은 지금 남아 있는 난중일기 7권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08년 4월 ‘충무공유사’에서 을미일기 내용 중 32일치 분량을 찾아낸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 소속 노승석 교수는 “을미일기에는 정적인 원균과 권율 등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 감정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 교수가 찾아낸 을미일기 32일치 분량은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보다 100년 앞서 난중일기 초고본을 바탕으로 작성된 ‘충무공유사’에 포함돼 있었다.

난중일기는 정조 때인 1795년 왕의 지시로 ‘이충무공전서’라는 새로운 형태로 정리됐다. 당시 정조는 왜구의 침략을 격퇴한 이 충무공의 공적을 기리고 후대에 전수하기 위해 초고본을 기초로 전서를 편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난중일기와 전서의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충무공이 개인적 입장에서 작성한 일부 내용들이 누락되거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각색된 부분이 상당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충사 송대성 과장은 “임금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성된 전서였기 때문에 왕에게 누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제외됐을 것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도 걸러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순신은 동인이었으나 이를 작성한 집권세력이 서인이라는 점에서도 편찬자의 의도가 반영됐을 개연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을미일기가 발견될 경우 그동안에 출판된 이 충무공 관련 서적이나 역사적 자료들의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현충사 측이 난중일기의 초고본을 찾기 위해 그동안 상당한 공을 들여온 것도 이처럼 을미일기가 가진 역사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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