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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名家 <현대편> - 후예와 자취로 본 인물이야기] ① 철기(鐵驥) 이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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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138호] 201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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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家 <현대편> - 후예와 자취로 본 인물이야기]① 철기(鐵驥) 이범석

명동 舊중국대사관이 生家 20세 때 청산리전투 진두지휘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일본군, 50만량 내걸고 지명수배 원시림 들어가 수렵으로 군자금까지 마련
한국광복군에 참여 미군과 국내 진격작전도

광복 후 조선민족청년단 창설 회원 130만명 넘는 최대조직 급성장
1948년 대한민국 초대 총리 발탁
▲ 광복군 제2지대장 시절의 철기 이범석 photo 백산서당
철기 이범석은 약관 20세인 1920년 청산리전투를 지휘하여 항일무장독립투쟁 사상 최대의 대첩을 이룩한 전설적 영웅이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40대에 환국해서는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맡아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방대한 조직으로 뿌리를 내린 민족청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철기는 1900년 10월 20일(음력) 궁내부 농상공부 관리(정3품) 이문하(李文夏)와 연안이씨 사이의 2녀1남 중 막내로 서울 용동(지금의 명동, 중국대사관 건물 뒤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만년에 구술한 자서전 우등불에서 다음과 같이 집안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내가 광평대군(세종의 5남)의 17대손에 해당한다는 것과 특별히 우리 증조 할아버지께서 조선조 판서를 지내셨느니 또는 부패한 국정을 시정할 양으로 임금께 직간을 하다가 득죄를 하게 되어 10년 동안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셨느니 하는 말들이 전해져 내려왔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했고 나라를 위해서 강직하고 정의에 사는 집안이었으며 명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말썽만 피우던 개구쟁이
   
   철기의 부친은 10여명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켰다. 철기는 이 중 구한말 군에 입대한 정태규란 자의 늠름한 모습에 매료됐는데 그가 일제의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사살되자 몹시 격분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이사해 살던 초동 뒷골목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일제 통감부가 있어, 심한 장난꾸러기였던 철기는 일본아이들과 곧잘 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개구쟁이였던 그의 장난기는 강원도 이천보통학교로 진학하자 (부친이 1912년 이천군수로 전근)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고무총을 잘 쏘는 철기가 어느날 거리에서 금융조합의 일본인 이사장이 당나귀를 타고 오는 것을 보았다. 사격 목표물은 당나귀의 국부. 명중하는 순간 당나귀가 펄쩍 뛰며 나뒹굴자 당나귀 주인은 당나귀 발밑에 깔린 채 머리가 깨져 출혈이 낭자하게 되었으니 집에서는 그 치료비를 무느라 힘들었던 모양이다. 악동들과 함께 뱀장어를 잡아오던 길에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에게 다가가 미끌미끌한 뱀장어를 항문에다 집어넣어 죽게 하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도 크게 가책을 느끼면서 집에 들어선 순간 홧김에 부친께서 던진 쇠막대기를, 말리던 계모가 맞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철기는 계모 김씨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각성하게 되었다. 이어 뜨거운 향학열에 불타게 되고 마침내 14세 때 경성제일고보(지금의 경기고)에 입학한다. 강원도에서 3명 뽑히는 최우등생으로 데라우치(寺內)총독상을 타고 무시험 입학이 허용됐다. 이곳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모였으나 일인 교사들의 노골적인 식민지 동화교육에 반발하여, 당시 YMCA 청년회관에 다니던 청년들과 어울려 유도를 배우고 일본 학생들에게 싸움을 걸어 가면서 그나마 치솟는 항일의식을 달래곤 했다.
   
   그러다가 1915년 여름 한강에 수영하러 나갔다가 몽양 여운형을 만나게 된다. 여운형의 설득으로 중국 항일전선으로의 망명을 결심하는 인생의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철기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뜻을 부친께 말씀드렸으나 부친은 오히려 철기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결혼을 서둘렀다. 그런데 혼인 후 사흘 동안 신부가 통 말이 없어 양가집 딸이어서 부끄러워 하는 줄 알았으나, 아내의 혀가 짧아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여운형과 운명적 만남
   
▲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시절의 철기. photo 백산서당
잘못된 혼사는 철기로 하여금 오히려 미련을 버리고 망명을 재촉하는 계기가 됐다. 여운형과 만주 봉천에서 만나기로 기약을 한 철기는 이해 11월 신의주로 가서, 수학여행을 왔다가 길을 잃은 것처럼 가장해 봉천까지 가 여운형이 묵고 있는 고려여관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철기는 큰누나의 남편인 신석우(임정 요인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지었으며, 후에 귀국해 조선일보 사장 역임)가 상하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하이행을 결심한다.
   
   상하이 시절 신규식의 주선으로 운남 육군강무당에서 2년6개월간의 사관교육을 받은 후 1919년 3월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 무렵 자신의 호도 지었다. 강인함을 뜻하는 ‘철(鐵)’자는 비스마르크를 연상해 자신이 고르고, ‘기(驥)’자는 육군강무당 기병과 구대장으로 철기를 매우 총애했던 서가기(徐家驥)의 ‘驥’자를 따서 철기(鐵驥)라고 하였다.
   
   1919년 3·1운동 발발 소식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철기가 상하이로 돌아오자 그의 늠름한 모습을 본 임정 요인들은 철기를 서간도 유하현으로 파견해 군사조직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10월 일본군 대규모 토벌대(총병력 2만명)가 독립군 부대를 추격하여 청산리계곡으로 접근해 오자, 독립군은 부대를 2개 제대로 나누어 편성한다. 본대인 제1제대는 훈련이 부족한 대원들과 노약자로 편성하여 사령관 김좌진이 직접 지휘하고, 제2제대인 연성대원 600명 정예부대는 철기의 진두 지휘하에 일본군 추격에 대항할 후위대로 청산리 백운평 위쪽 골짜기 입구에 매복했다.
   
   “독립군 부대가 혼비백산하여 모두 도주했다”는 현지 주민들의 역정보를 믿고 방심한 일본군 토벌대인 산전보병연대 안천 전위중대가 독립군 포위망인 백운평 골짜기로 들어오자, 일본군 지휘관(安川 소좌)을 겨냥한 이범석의 “사격 개시!” 조준사격 명령을 신호탄으로 600여정의 소총과 4정의 기관총 및 야포 2문으로 기습공격을 개시하여 단 20여분의 교전 끝에 일본군 전위부대 200여명을 섬멸했다. 뒤이어 도착한 일본군 토벌대는 포위를 시도했으나 또 다시 3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마침내 숙영지로 패주했다.
   
   뒤이어 벌인 천수평, 어랑천 전투 등 청산리전에서 일본군 전사자만 모두 12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처럼 그동안 소규모 유격대로 인식되어 그 존재조차 미미했던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 대규모 토벌대와 대등한 혈전을 벌여 격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열망과 백절불굴의 감투정신이 전세계를 경악시키는 징표가 됐다.
   
   임정 대통령으로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던 이승만 박사는 청산리 항일대첩 뉴스에 감격하여,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최고급 파커 만년필을 격려서신과 함께 인편으로 철기에게 보내오기도 한다. 이 박사는 서신에 이렇게 썼다. “이제는 나도 전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 수 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오.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 그 후 매년 겨울철이면 미주 한인 동포와 친지들에게서 헌옷을 수집하여 독립군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러시아 여성 갈리나와의 사랑
   
▲ 부인 김마리아와 외아들 인종. photo 백산서당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는 “한국 독립을 적극 후원해 주겠다”는 러시아 적군파의 감언이설에 속아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러시아 백군(白軍)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때 철기는 기병연대장으로 활약한다. 고려혁명군 후신인 합동민족군의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근무하던 그는 1925년 1월경 러시아 적군파의 무장해제에 저항하다가 이마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완쾌 후 만주 군벌 장종창(張宗昌)의 막료(소령)로서 직업군인 생활을 할 때 러시아 여성 갈리나와 진한 로맨스도 벌이기도 했다. 광복군 시절 철기의 부관이었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철기에게 들은 러브스토리를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철기는 장종창 막료의 한 사람으로 국경선에 배치된 병력 상황을 순시하다가 우연히 갈리나를 만난 것이다. 황야를 스치는 바람결을 타고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그 여인이 바로 갈리나였으며, 그녀는 니코르스키에서 오빠(백계군 중대장)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가 오빠를 찾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망명 러시아인들의 파티에 나갔다가 비밀리에 감추어 두었던 1년을 쓰고도 남을 막대한(그녀의 전 재산) 돈을 깡그리 도둑맞았던 것이다. 이 가련한 여인에 대한 동정이 사랑으로 변한 것이지만 망명이란 처지가 더욱 그들을 가깝게 만들었던 것이다. 철기는 그녀와 몇 달 동안 동거생활을 하다가 7월에 김좌진 장군의 급전을 받고 단장(斷腸)의 마음으로 이 여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용맹하고 수많은 사경을 넘어온 철기였건만 갈리나와의 비련을 술회할 적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가엾고 나약한 젊은 여인을 거친 만주황야에 떨어친 자신의 비정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철기의 일생이야말로 전쟁(war)과 술(wine)과 여인(woman)으로 수놓은 3W의 전형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인간으로서의 철기에 날이 갈수록 매료되었던 것이다.” (長征, 김준엽 지음)
   
   1925년 8월 혁명동지 김마리아(러시아로 이민 간 고려족으로 혁명군 장교 역임)와 결혼했을 무렵이었다. 만주의 일본영사관과 중국동북군(사령관 장학량)이 청산리대첩의 주역인 철기의 목에 50만량의 현상금을 내걸고 지명수배해 철기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철기는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며 대흥안령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자르고 찍고 눈 위로 끌고가 서까래를 올려 통나무 오두막집 살림을 차렸다. 생계가 막연해서 고심했으나 마침 출중한 사격술을 알아본 사냥꾼들과 곧 친해져 철기는 수렵으로도 상당한 군자금을 마련할 만큼 특유의 야인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후 수배가 풀려 중국 지방군 장령으로 지원해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다 마침내 1941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참모장에 취임한다. 한·중연합작전을 이유로 중국군 현역 장성이 참모장으로 파견되자 제2지대장으로 전임, 미국 OSS(CIA 전신)와 제휴하여 국내 진격작전을 지휘한다.
   
   1945년 광복군 참모장(중장 승진)에 복귀하고 국내정진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한국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8월 18일 미군과 함께 여의도로 환국하나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중국으로 귀환한다.
   
   1946년 일단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자 철기는 ‘무엇보다도 먼저 새나라 건설의 역군을 양성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국가지상(國家至上)과 민족지상의 기치를 내걸고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을 창설한다. 철기가 단장에, 안호상이 부단장에, 백낙준·김활란·현상윤 등이 이사로 참여한다. 아울러 비(非)정치, 비군사, 비종파를 단시(團是)로 한다.
   
   “오늘날의 한국은 1919년의 독일과 같소.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과 민족적 불화, 경제적 곤궁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오. 청년들의 단결이 민족해방의 관건이 되오. 지도자의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요. 우리는 그들에게 명령에 복종하는 것, 실천적인 능력의 함양과 도덕심의 회복 등을 교육하려 하고 있소. 장개석의 신생활운동과도 같은 것이오.”(이범석, 1946년 11월 7일 ‘시카고 선’과의 인터뷰)
   
   독립군, 중국군, 광복군에 복무하면서 익힌 조직원리로 다진 족청은 창단에서 해체되기까지 2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130만이 넘는 한국 최대의 조직으로 급성장한다. 우선 제1기 훈련생 200명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조직망을 확대한다.
   
   “1946년 11월 수원의 옛 일본군 병원 자리에서 훈련받았지요. 2만명의 지원자 중 200명이 선발된 우리들의 자부심은 컸지요. 정인보·안호상·설의식·홍종인·고승제·조동필씨 등 강사진도 쟁쟁했지요. 특히 철기 선생님의 민족윤리 강의는 청산리 영웅에 걸맞은 애국심이 철철 넘치는 지성과 야성을 겸비해 더욱 깊은 감명을 주었고… 솔선수범으로 10리 길 수원성까지 함께 구보를 하셨지요. 이렇게 2개월간 숙식훈련을 받았습니다.”(서영훈 전 적십자사총재)
   
   
   손자, 美 해병대 복무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에 발탁된 철기는 대북첩보 수집부서인 국방부 제4국 창설문제로 미국 고문단들과 갈등을 빚어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게 된다. 6·25전쟁 수개월 전에는 국무총리직마저 물러난다.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중·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육사 8기생들이 단위 전투부대를 진두지휘하면서 온몸으로 지킬 수 있었던 사례도, 8기생을 1600명으로 미리 대폭 증원한 철기의 선견지명이었던 셈이다.
   
   1961년에는 충남에서 참의원으로 압도적으로 당선되나 곧이어 5·16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자 정치활동이 금지된다. 1963년 철기는 국민의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으로 야당지도자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1972년 5월 11일 서울성모병원에서 서거해 국민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다. 당시 조선일보는 ‘크나큰 민족의 별이 지다’라는 제목하에 ‘장례행렬에는 장군의 애마 설희가 주인 없는 안장을 걸친 채 영구를 뒤따라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철기의 후예는 독립운동 중에 낳은 외아들 인종(仁鍾)씨가 미국에 가서 살다가 몇 해 전에 작고했다. 손자 규준(揆俊)씨는 회사원, 규원(揆元)씨는 미 해병대(대위, 헬기조종사)에 복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기의 정신적 후예인 민족청년단 출신 인물들은 실로 재재다사다. 학계에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조일문 건국대 이사장, 군부에 최영희·민병권·박임항·노재현 장군, 이재형·백두진 국회의장, 유창순 국무총리, 안춘생 광복회장, 장준하 의원, 김철 사회당수, 부완혁 사상계 발행인, 노태준 태양신문 사장. 여성 첫 훈련생(7기)으로는 이희호 여사(고 김대중 대통령 부인)와 김정례 보사부 장관이 있다. 강영훈 장군이 기념사업회를 10년간 끌어왔으며, 현재 서영훈, 김정례씨가 이사장, 회장직을 맡고 있다.
   
   5·16 후 이른바 족청계 음모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김정례씨는 “우리는 조직망이 강하다고 오해받아 역대 정권에서 견제받고 소외되어 왔다”면서 그럴수록 더욱 철기의 큰 뜻을 후세에 알리는 데 널리 앞장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철기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 광복청년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는 정준(丁俊)씨는 “철기정신을 오늘의 시대정신에 걸맞은 이념으로 발전시켜 나가도록 널리 의논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본 철기
   
   소설·작곡·붓글씨 능한 재주꾼
   
   광복군 시절부터 철기 장군을 부관으로 모셔오면서 나는 그분의 애국심에 늘 감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배웠다. 그분의 세심한 배려나 일에 대한 치밀한 사전 계획성과 과감한 추진력, 그리고 사후의 분석과 검토 등 일이란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가를 배워 일생의 고귀한 지침으로 삼아오고 있다. 모든 일에 기관장은 솔선수범하며, 어려운 일일수록 기관장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고, 공이 있으면 모두 소속원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분은 술과 담배와 차를 남달리 즐겼으며 중국요리 솜씨도 일류였다. 가끔 OSS 미국 측 장교들과의 파티에서는 그분의 요리 솜씨에 모두가 경탄하였는데, 만주나 외몽골에서 왜놈들의 추적을 피하는 동안에 익힌 것이었다. 문학 소양도 있어 ‘톰스크의 연인들’이라는 소설도 써냈으며 음악도 좋아해 작곡도 하셨다. 붓글씨도 훌륭했으며, 어학 재간도 탁월하여 중국어·러시아어·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OSS와 합작한 다음에는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험악한 고투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우연히 만난 여인들과의 로맨스를 하나도 감추지 않고 모두 들려주기도 했다. 그처럼 격의 없고 소탈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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