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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9호] 201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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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家 <현대편> - 후예와 자취로 본 인물이야기] ② 박열

천황암살 기도하다 체포 “난 조선민족의 대표” 사모관대 입고 재판받아

김덕형  언론인· ‘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일본을 움직인 10대 여장부’ 가네코와 동지이자 연인
수감 중 특별대우 논란 日 헌정회 내각 총사퇴 불러
▲ 광복 후 출옥했을 때의 박열. photo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박열(朴烈)은 일본 천황 일가족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내각총사퇴까지 몰고 온 풍운아다. 박열은 이 사건으로 장장 23년간 옥고를 치른 후 광복 한국에 돌아와서는 때때로 총리·장관 물망에 오르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는 1902년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샘골(현 문경시 모전동)에서 아버지 박지수(朴芝洙)와 어머니 정선동(鄭仙洞)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함양 박씨)은 전통적인 유가 가문으로 존경을 받아오던 지방 명문이었다. 모친의 꿈에 어느 날 밤 청룡·황룡이 오두막집 방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어 박열을 낳았으며 얼마 후에 아버지가 별세해 그는 유복자처럼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노송과 아름드리 삼나무가 산머리를 뒤덮고 있는 이 고을은 수려한 산야의 기운이 늘 가득하여 드맑은 정기에 휩싸여 있다. 그가 태어난 오두막집은 너무 낡아 허물고 10년 전 문경시가 복원했다. 2002년에 착공한 박열 의사 기념공원은 오는 9월에 개관할 예정이다.
   
   “고향에는 현재 집안이 모두 떠나 살고 가네코 여사(박열의 동지)의 묘소가 있어 그분을 흠모하는 일본 관광객이 연 500명쯤 오고 있지요. 기념공원이 완공되면 연 2000명쯤 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가네코 여사는 ‘일본을 움직인 10대 여장부’라고 하여 그분에 대한 일본인들의 추모 열기는 대단하니까요.”
   
   기념공원 공사를 맡은 박성진(50) 예문관 사장은 같은 집안이기도 하여 박열의 추모 사업에 더욱 관심이 크다고 했다. 기념사업회는 현재 박인원 이사장(전 문경시장)이 이끌고 있다.
   
   박열은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 한문을 배우다가 아홉 살 때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새벽밥을 먹고 통학했다. 박열이 소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어느 한국인 교사가 자기는 이때까지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 교육을 시켰노라고 울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박열은 이 선생님으로부터 반일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가난한 중에서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대구로 가서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관비로 공부할 수 있는 경성고보 사범과(지금 경기고)에 입학한다. 그러나 박열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하신문을 발행하고 격문도 살포하는 등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경성고보 시절 박열은 심리학을 가르치던 어느 일본인 교사로부터는 그의 생애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대역사건’(1911년)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10년 일본 메이지(明治) 천황의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수백 명이 검거되어 고토쿠 등 12명이 사형을 당한 사건이었다. 박열은 후일 “그 선생은 자기는 일본인이지만 실은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인의 적(籍)을 초월한 세계인이라고 하여 나의 사상 형성과정에 큰 힘이 되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후 박열은 도쿄로 건너가 천황제에 맞서 사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다짐한다. 신문배달을 비롯하여 식당종업원·막노동꾼·우체부 등의 일을 하면서 세이소쿠(正則) 영어학원에 적을 두고 상급학교 진학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박열은 동지 20여명과 ‘혈거단(血擧團)’이란 청년단체를 조직한다. 그 목적은 재일 조선인 중에 행실이 불량하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을 불러내 응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독립운동 원칙은 철저한 실천성으로 다져졌다.
   
   박열이 혈거단 이름으로 실력 행사를 한 사건 하나. 장덕수가 러시아로부터 6000원인가 얼마를 받아서 유흥비로 썼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장덕수가 마침 도쿄 간다(神田)의 보정(寶亭)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박열은 동료들과 함께 몰려가 장덕수를 폭행하고 이로 인해 니시간다 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했다.
   
▲ 광복 후 재일거류민단창단식에 참석한 박열(가운데). photo 이수완
이 무렵 박열은 ‘못된 조선놈’이란 욕설이 담긴 제호의 잡지형 월간지 ‘불령선인(不逞鮮人)’을 발행했다. 검열당국이 그러한 욕칭을 비꼬는 투로 사용하고자 한 낌새를 알아채고 발행을 불허하자, 박열은 역시 일어로 ‘못된 놈’이란 뜻이 담긴 ‘후토이(太い) 센징’으로 바꿨다. 이 제호도 금지하자 ‘현사회(現社會)’로 고쳤다.
   
   내용은 일제 사회제도에 대한 신랄한 공격과 조선 식민통치에 대한 격렬한 반대 논설로 채웠으며, 독립운동과 사회사상운동 동향에 관한 보도도 곁들였다. 인쇄소에서 제본되어 나오자마자 곧 압수되고 발매금지되기 일쑤였으나 박열은 잡지발행을 계속했다. 그는 출판비용 조달과 잡지보급 등 주로 대외업무를 담당했고, 동지로 만난 일본인 가네코 아야코(金子文子)가 잡지편집과 원고집필 등 주로 내근을 했다. 가네코는 문필력이 뛰어나고, 학식도 수준 이상이어서, 박열의 논설기사 중 대부분이 그녀가 대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들은 동지이자 연인으로 동거생활을 했으나 살림에 쪼들렸던 모양이다. 네 살 위였던 박순천(첫 야당 당수를 역임한 인물)에게 누이라고 부르며 돈을 자주 꾸어가곤 했다고 한다. 이때 게이오대학에 재학 중이던 변희용(성균관대학 총장 역임, 박순천의 남편)은 박열의 흑도(黑濤)회원이었다. 변희용은 박순천과 결혼 전이었다. 그가 박순천의 생일선물로 당시 12원이나 하는 값비싼 책을 사준 일이 있었다. 박열이 돈을 꾸러가서는 현금이 없다고 하면 그 책을 전당포에 맡기고 5원을 변통해 쓰고 뒤에 다시 찾아다 돌려주곤 하던 가화(佳話)도 남겼다.
   
▲ 광복 후 이승만 박사를 예방한 박열. photo 이수완
박열의 천황제거작전은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우선 궁성우편배달부로 위장취업하는 데 성공한다. 감시의 눈길이 잘 미치지 않는 신분으로 매일 궁성을 출입하면서 천황의 동정과 출행하는 경로 등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는 사이에 마음속으로 혁명가를 낭창(朗唱)하면서 울분을 달래기도 했다. 나중에 사건이 터진 후 예심판사의 질문에 박열은 이렇게 답했다.
   
   “일본인 동지와 결탁하여 무사히 우편배달부 시험에 합격한 후 그 명의의 면허증으로, 한국인인 내가 배달부의 사무를 대행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야. 바보처럼 덤비기만 하는 이가 빠진 황궁 경찰쯤이야 문제가 아니야.”
   
   마침내 1923년 9월 1일 도쿄 일원에 이른바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미증유의 재앙 속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일본인 민간단체인 자경단(自警團)이 무고한 한국인을 3000명이나 학살한 참변이 일어났다. 이처럼 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한 중에 박열은 9월 3일 일제에 의해 대역사건 혐의로 검거된다. 혐의는 이 해 가을 거행할 예정이었던 황태자 히로히토(裕仁·당시 병으로 쓰러진 부왕인 다이쇼大正를 대신하여 섭정)의 혼례식에 즈음하여 박열이 천황과 황태자를 암살할 목적으로 김중한(박열의 흑우회 동지)에게 폭탄을 구해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형법(제27조)은 저격 대상이 황족인 경우에는 비록 예비행위일지라도 대역죄가 성립되게 규정하고 있었다. 박열은 동지이자 애인인 가네코와 함께 구속되어 예비심문을 거쳐 재판을 받았다. 그는 1926년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거침없는 언동으로 일제의 만행을 비웃었다. 박열은 우선 ‘대심원 특정법정의 공판에 앞서 1925년 9월 한국인의 자존심을 일본인에게 알리는, 일본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다음의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나 박열은 피고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다. 너 재판관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인 이상, 나는 조선민족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이다. 천황을 대표하는 일본의 재판관이 법관을 쓰고 법의를 입는다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을 쓰고 조선의 왕의를 입는 것을 허락할 것.
   
   둘째, 나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이 조국 조선을 강탈한 강도 행위를 탄핵하고자 법정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관이 일본 천황을 대표해서 나의 질문에 답변하라.
   
   셋째, 나 박열은 일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로 말하도록 해달라.
   
   넷째, 일본의 법정이 일본 천황을 대표한다고 해서 재판관은 높은 곳에 앉고, 일본 천황에게 재판받는 나 박열은 낮은 곳에 앉는 터이다. 그러나 나는 소위 피고와는 다른 사람이다. 때문에 내 좌석을 너희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어 달라.
   
▲ 눈 덮인 박열 생가. 2000년에 문경시가 복원했다. photo 이수완
이러한 기상천외의 당당한 요구조건에 대해 대심원 심판부에서는 여러 날 고심 끝에 첫째와 둘째 조건은 들어주기로 했다. 셋째 조건은 통역을 두는 것이 도리어 의사소통을 어렵게 한다고 해서 거부됐고, 넷째 조건은 세평이 있기 때문에 참아달라고 재판장이 부탁하여 박열이 철회하였다.
   
   박열은 후세(布施辰治) 변호사가 서울에서 구해온 조선시대의 관복과, 신랑이 혼례 때 예복으로 입던 사모관대 차림으로 법정에 출정한다. 또 재판장은 박열을 피고라고 하지 않고 ‘그편’이라고 부르고 박열은 재판관을 ‘그대’라고 호칭했다. 실로 일본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대심원은 1926년 3월 25일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어 10일 뒤 무기징역으로 형을 낮추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익세력과 군부는 이를 극렬히 반대하면서 내각에 대한 탄핵 움직임까지 보였다. 이에 더해 이른바 괴사진 춘화(春畵)사건마저 일어나 정국(政局)을 뒤흔들었다.
   
   문제의 사진은 박열이 형무소 안에서 책을 들고 있는 가네코를 포옹하고 있는 듯한 장면을 찍은 것으로, 박열의 한쪽 팔은 책상을 이용해 턱을 괴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 팔은 가네코의 어깨를 안고 있어 마치 그녀의 젖가슴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야당이던 정우회(政友會)는 집권당인 헌정회에 대한 공격자료로 이 사진을 이용했다. 이 사진을 넣은 괴문서를 만들어 정계와 언론기관 등에 뿌렸다. 그 문서에는 박열과 가네코가 극악무도한 국적(國賊)임에도 불구하고 국사(國士) 이상으로 대우해서 옥중 특별실에 기거하게 하며 결혼식에 이어 동거생활까지 시키고 감형의 은전까지 베풀었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으로 헌정회 내각은 총사퇴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네코가 4개월쯤 뒤 옥사한 사실을 알게 된 박열은 애통한 나머지 옥중에서 한동안 단식을 했다. 가네코의 유해는 박열의 맏형 정식씨와 조카(형래)에 의해 그녀가 사랑하던 박열의 고향 선산인 경북 문경군 팔령 2리에 묻히게 된다.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아키타 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한국거류민단장으로 추대되며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귀국한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서울 장충동에 있는 친지집에서 은거하다 납북되어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별세했다. 1989년 3월 1일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박열은 출옥 후 일본에서 출감 1주년 기념특집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국제신문 여기자 장의숙과 결혼했다. 그때 박열의 나이 47세, 장의숙(張義淑)은 29세였다. 장의숙은 도쿄여자대학을 막 졸업한 1947년에 결혼하여 남매를 낳았다.
   
▲ 박열의 자료를 설명하고 있는 장남 영일씨와 며느리 혜정씨. photo 이수완
아들 영일(榮一·62)씨는 일본에서 고교를 마치고 한국으로 와 육사(26기)에 첫 합격해 준장으로 예편했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영일의 육사 입학 당시 보증을 섰던 김병휘(90·육군소장 예편) 장군의 딸 혜정(60·이화여대 피아노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창해(34·인하대 병원 전문의)와 현해(33·서울시 공무원) 형제를 낳았다. 박열의 딸 경희(61·일본 오미린대 졸업)씨는 이일수(60·사업)씨와 결혼하여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살고 있다.
   
   마침 남아공에서 휴가차 귀국한 영일씨 부부를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만났다. 윤곽이 크고 부리부리한 무사풍의 눈매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엿보였다.
   
   “어려서부터 당당하게 살라고 하셔서 그렇게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살고 있을 때 납북되신 부친께서 조국에 가서 봉사하라는 전갈을 인편을 통해 전해 오셨고… 저도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당당한 군인 기질을 좋아해 육사를 지망하게 됐지요. 동포로서는 첫 번째 생도인 데다 아버지 때문에 주위의 주목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겠지요. 육사 교육이 민족적 긍지를 심어줘서 열심히 사는 인생의 바탕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부인 김혜정씨는 “동기생 부부모임에서도 남편이 생도 시절 완전무장을 하고 구보할 때 요령을 피울 줄 몰라 뒤처진 남편을 도우려고 동료들이 함께 뛰곤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거들었다.
   
내가 본 박열
   
   1948년 건국 후 서울 충무로의 당시 한미호텔에서 만난 박열 선생은 참으로 당당하고 침착해 보였다. 듣던 대로 자그마한 키에 탄탄한 몸집, 불그스름한 안색은 의지 굳은 투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서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정치 투쟁이 아니라 자주독립사상으로 무장한 기반 위에 국가의 기틀을 다져가는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광복 후 출옥하자마자 그분은 우선 재일조선인연맹을 조직하여 이끌면서 좌우갈등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동포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자 재일 좌익들은 ‘박열이가 옥중에서 전향했다’ ‘친일 행동을 했다’는 등 온갖 모함을 해댔다. 23년간이나 옥살이를 한 그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줏대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민족의 자주독립만을 강조했다. 어떻게 그 긴 옥살이를 이겨냈느냐는 물음에는 반드시 살아서 나간다는 신념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냉수마찰을 했노라고 답했다. 그분의 주체적 자주·자유 사상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더욱 절실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문창 (85·국민문화연구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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