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허재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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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제12구 샤랑통(Charenton)이 주최하는 샤랑통살롱전이 한국의 무명작가를 올해의 명예작가로 초대했다. 5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샤랑통살롱전은 매년 각국의 작가를 초대하고 그중 한 명을 명예작가로 선정한다. 명예작가에게는 특별전시를 열어주고 시장상을 수여한다. 오는 1월 20일부터 2월 12일까지 특별전시를 하게 된 행운의 한국작가는 정산(靜山·속명 김연식·65) 스님이다. 국내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작가가, 그것도 미술교육이라고는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스님이 어떻게 프랑스 화단의 초대를 받게 됐을까.

3년 전에 첫 개인전을 열고 화가로 신고식을 치른 정산 스님의 이름 앞에는 ‘매니큐어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정산 스님은 물감이 아닌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린다. 재료의 독특함도 눈길을 끌지만 여성의 욕망이 농축된 매니큐어와 남자 스님의 조합이라니, 어째 심상치 않다. 정산 스님을 만나 매니큐어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가출, 그리고 16세의 출가

정산 스님의 본업은 화가가 아니라 사찰음식 전문가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사찰음식전문점 ‘산촌’을 운영하면서 동산불교대학 사찰음식문화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다. ‘눈으로 먹는 절 음식’ ‘북한의 사찰음식’ 등 사찰음식 관련 책도 네 권이나 펴냈다. 음식점 ‘산촌’은 미국 신문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아시아 톱10 음식점’에 꼽힐 만큼 외국인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인터뷰를 위해 ‘산촌’을 찾아간 날도 외국인 관광객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샤랑통 시장한테 초대장이 왔는데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깜짝 스타가 된 연예인처럼 길거리 캐스팅된 셈이죠.” 정산 스님은 ‘화가 데뷔’도 ‘샤랑통살롱전 캐스팅’도 뜻하지 않게 이뤄졌다고 말했다.

“음식이 색과 맛이 어우러진 예술이듯 그림도 다르지 않다. 내겐 요리·그림이 똑같은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정산 스님이 매니큐어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설명하자면 평범하지 않은 출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는 어머니가 세 분이었어요.” 정산 스님은 전남 여수의 손꼽히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지만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스님의 어머니 외에도 부인이 두 명 더 있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할 때면 늘 나를 무릎에 눕히고 춘향가의 한 대목인 ‘쑥대머리’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웬일인지 어린 내 귀에는 울음처럼 들렸어요.” 어머니의 슬픔을 엿보고 자란 아들은 내성적이고 침울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책만 읽었어요. 세계 명작부터 어른들 연애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죠. 또래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하고만 놀았어요. 학교에서 친구들은 나를 왕따시킨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내가 친구들을 왕따시켰어요. 햇빛보다 달빛이 좋았어요. 온갖 치부를 다 드러내는 햇빛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달빛에 위로받던 소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집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다. 결심에 불을 붙인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천경자 화백의 첫 수필집 ‘유성이 흘러간 곳’이었다. 책 구절 중 ‘붉은 동백 숲 앞을 지나가는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 ‘제주도 정방폭포 뒤에 있는 정방사의 저녁 예불 종소리’라는 대목에 마음을 빼앗겼다. 소년은 정방사로 가서 스님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달 후 집을 나와 목포에서 제주행 배를 타고 정방사로 갔다. 정산 스님에게 천경자 화백은 그림에 눈을 뜨고 출가를 이끈 인생 멘토였다.

정방사에 오고 며칠 후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아버지 때문에 집을 나왔다는 이야기를 써서 보내며 찾지 말라고 했죠. 앞으로 누나와 동생들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돼달라는 부탁도 했어요.”

편지 한 통 보낸 이후 집을 찾은 것은 10년 뒤 스님이 돼서였다. 갑자기 집 생각이 간절했다. 집을 나올 만큼 미웠던 아버지도 보고 싶었다. 한 달을 참다 집을 찾았다. “여기저기 기워진 승복을 입은 모습을 본 누나가 ‘지금 이 차림이 뭐냐? 알고 온 것이냐?’고 묻더라고요. 웅성웅성 사람들이 나오는데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어요. 다음날이 아버지의 삼오제였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돌아가셨대요.”

음식의 색과 향에 빠지다

정방사에서 1년을 보내고 부산에 있는 큰 사찰인 범어사로 가서 본격적인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나이가 16살이었다. 당시 정식으로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3년간의 행자 생활을 거쳐야 했다. 채공(나물 만드는 행자), 갱두(국 끓이는 행자), 공양주(밥 짓는 행자)를 3년 동안 두루 거치면 비로소 사미계를 받는다. 정산 스님은 행자 생활을 하면서 음식의 색과 향에 빠져들었다. 사찰 음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3년이 돼서 계를 받고 자청해 3년을 더 부엌에서 보냈다. 행자 중 음식솜씨가 가장 뛰어나면 별좌가 되고 그 다음은 절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는 원주가 된다. 사찰음식은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지 않고 별좌와 원주의 지휘 아래 손끝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 불교에서는 식욕을 인간의 오욕(五慾)으로 꼽기 때문에 버려야 할 것이지 남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입으로, 손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찰음식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국에 있는 24개 교구 본사를 다니면서 원주를 자청하고 사찰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음식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사찰음식전문가가 됐다. 부산 대각사에서 사찰 음식 공개 강좌를 열기도 하고 부산일보에 ‘절따라 맛따라’라는 제목으로 1년 동안 연재를 하기도 했다. 정산 스님은 “사찰음식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을 한 것이 국내에서는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의 색과 맛을 지닌 사찰음식을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1980년 인사동에 ‘산촌’을 차렸다. 주변에서는 “누가 돈 주고 나물을 사먹겠느냐”면서 고개를 저었다. 소속 종단인 조계종에서도 “스님이 무슨 식당이냐”면서 펄쩍 뛰었다. 다행히 정산 스님의 생각을 믿어준 사람이 자금을 대줘 식당을 시작했다.

정산 스님은 요즘 사찰음식 대중화에 불만이 많다. “사찰음식이 전해져 오는 곳은 세계에서 한·중·일뿐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사찰이 산으로 들어가면서 독특한 음식문화가 잘 보존됐어요. 겸손하고 은은한 색과 맛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음식이에요. 무명·삼베와 같은 맛이랄까. 지켜야할 소중한 음식문화를 놔두고 ‘세계화다, 대중화다’ 내세워 화려하게 색을 넣고 치장을 해서 자꾸 변질시키고 있어요. 출처도 없는 음식이 사찰음식으로 둔갑하고 있으니 안타까워요.”

음식과 그림의 뿌리는 하나다

성냥갑 한쪽 면에만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려 만든 정산 스님의 작품. 다른 쪽에서 보면 그림이 보이지 않아 무(無)와 유(有)가 공존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성냥갑 한쪽 면에만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려 만든 정산 스님의 작품. 다른 쪽에서 보면 그림이 보이지 않아 무(無)와 유(有)가 공존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철따라 새로운 식재료를 찾아 전국의 산하를 누비다 자연의 풍광에 매료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먹으로 그리기도 하고 물감으로 그리기도 하고 손 가는 대로 그렸다. 정산 스님에게는 음식의 색과 그림을 그리는 색이 한 뿌리였다.

“10년 전쯤이었어요. 음식점에 놔뒀던 도자기가 깨졌는데 여직원이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더라고요. 매니큐어를 빌려 깨진 부분에 발랐더니 감쪽같이 붙어요. 신기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감보다 색깔도 훨씬 다양하고 내구성도 뛰어나잖아요. 알고 보니 지금까지 나온 매니큐어 색깔이 600여가지나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음식점 한쪽에 앉아 시간이 날 때마다 접시에도 그리고, 타일에도 그리고, 작은 성냥갑에도 그렸다. 음식점에 온 손님 중 한 명이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이기태씨라고 했다. 이씨는 “프랑스에서 좋아할 그림이다. 전시를 해 보지 왜 혼자서만 그리고 있느냐”고 말했다. 정산 스님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거니 흘려들었다. 1년 후쯤 손님 중에 미술평론가라는 사람이 또 그림을 보더니 “전시 한번 해보지 그러느냐”고 말했다. 1년 전 이씨의 말이 떠올랐다. 2007년 공화랑에서 첫 전시를 열었다. ‘스님이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화제가 됐다. 한 매니큐어 회사에서는 작업에 필요한 매니큐어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자신감이 붙었다. 첫 전시 이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유(有)와 무(無)의 경계를 넘고 물질과 공(空)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1년여의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수만 개에 달하는 성냥갑이 큰 벽면을 채우고 있는 설치 작품이다. 성냥갑 한쪽에만 그림을 그려놓아 다른 쪽에서 보면 하얀 성냥갑만 보인다. 흰 면만 보이는 곳에서 시작해 반대쪽으로 걷다보면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두 번째 전시 때 갤러리 한쪽 벽면에 가로 840㎝, 세로 270㎝ 크기의 거대한 성냥갑 작품을 걸었다. 무심코 작품을 따라 걷던 사람들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작품을 신기해 했다. 소문이 나면서 작가들도 찾아와 “재미있다” “고생했다”면서 격려를 해주고 갔다.

세 번의 전시를 할 때마다 맨 처음 용기를 주었던 프랑스의 이씨에게 작품 도록을 보냈다. 재주를 아까워 한 이씨가 기회 있을 때마다 정산 스님의 작품을 프랑스 화단에 알렸다. 그렇게 작품 사진을 본 샤랑통살롱전 측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샤랑통살롱전에는 130여명의 작가가 작품 한 점씩을 출품한다. 명예작가인 정산 스님에게는 별도로 25m의 공간을 마련, 20여점의 작품이 걸린다. 이번 특별전에도 2만여개의 성냥갑을 이용해 만든 가로 5m가 넘는 설치 작품이 전시된다. 샤랑통 시당국은 정산 스님의 전시 안내장에 “한국에서 온 김연식 작가의 작품은 다양한 색채, 대담한 형태와 빛을 이용한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작품으로 관람객들을 명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어떤 작품들은 하나의 꽃이 그래픽적인 기호를 가진 형태로 변하면서 모네의 연꽃 시리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고 평했다. 유명한 원로작가들을 초대작가로 선정했던 샤랑통살롱전이 이례적으로 한국의 무명작가를 초대한 것은 학력·경력 등 작가에 대한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산촌’ 3층에 있는 작업실을 가보니 색색의 매니큐어 병이 가득했다. 매니큐어 회사에서는 아예 재료를 큰 병에 담아 제공해 주는데 부족한 색깔은 명동에 있는 화장품 가게에서 구입한다. 스님이 매니큐어를 몽땅 사가니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고정관념을 깨고 사고의 확장을 열어주는 것이 예술이고 보면 기존 화단의 기준과 재료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버린 정산 스님의 행보 자체가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니큐어의 화려함 속에 숨은 ‘무상(無常)’을 보여주고 싶다는 정산 스님의 예술이 어떻게 진화해 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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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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