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 전 총영사가 덩신밍씨와 지난해 12월 22일 상하이 밀레니엄호텔 13층 라운지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photo 연합뉴스
김정기 전 총영사가 덩신밍씨와 지난해 12월 22일 상하이 밀레니엄호텔 13층 라운지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photo 연합뉴스

기자가 김정기(51·金正基) 전 상하이 총영사와 관련된 ‘스토리’를 접한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여권 핵심부에 정통한 정치권 인사는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김정기씨가 상하이 한국 총영사로 간 직후부터 여러 가지 말들이 나왔다. 상하이 시당국에서는 어떻게 외교관 경력도 없고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을 중국의 경제수도 총영사로 보낼 수 있느냐고 불쾌하게 생각했고 한국 정부에 불만이 많았다. 김정기 총영사는 부임하자마자 상하이시 당총서기와 면담을 요구했지만 상하이시 당국에서 단독으로 만나주지 않았다. 이러자 김 총영사가 식사 자리에서 중국 정부에 대해 거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같이 합석한 사람이 듣기에도 민망한 이야기였다. 김 총영사는 또 여러 자리에서 상하이 총영사로 나오게 된 것을 불만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언행은 해외공관장으로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김정기씨가 상하이 한국 총영사로 발령받은 것은 2008년 5월로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였다. 김씨는 지난 2월 말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정체불명의 중국 여성 덩신밍(鄧新明)과 상하이 총영사관 사이에서 벌어진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당시의 총영사 김정기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씨는 이 사건이 터지자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은 정보기관의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자신과 갈등 관계에 있던 국정원 출신의 부총영사가 자신이 갖고 있던 권력 핵심 전화번호를 덩씨에게 흘렸다는 것이다. 김 총영사는 국정원에서 파견 나온 부총영사와 반목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외교관·공직 경력 전무한 총영사

김씨는 이와 함께 “덩씨는 상하이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총영사 시절 김씨는 덩씨의 영향력 덕분에 주요 면담을 성사시켰다고 했다. 2008년 5월, 신정승 주중대사 부임 이후 상하이 당서기와 시장 동시 면담을 가능케하는 데 덩씨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2008년 8월, 10월 이상득 의원, 오세훈 시장 등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역시 김 총영사는 덩씨를 통해 당서기를 만나게 해주었다.

상하이시 당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상하이주재 한국 총영사와, 권력 실세와의 관시(關系)를 자랑하는 정체불명의 여성 덩신밍씨. 김씨가 덩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도가 성립된다. 외교관 경력은 물론이고 공직 경력도 없는 김씨가 어떻게 중국의 경제수도 상하이 총영사가 될 수 있었을까. 이번 사건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그는 알려진 대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진영에 몸담았다. 그의 이력서에는 한나라당 정치대학원 국제정치학 교수, 중국 베이징대학 동방학연구원 연구교수, 이명박 대통령 예비후보 국제위원장, 이명박 대통령 후보 서울선거대책위원회 조직본부장 등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대선 공신이라는 이유 로 상하이에 한국 대표로 나가게 된 것이다.

김정기씨는 1980년대 후반 대학가를 휩쓴 베스트셀러 영어교재 ‘거로 워크숍’의 저자이다. 거로는 김씨의 아호. ‘거꾸로’를 줄여 ‘거로’로 지었다. 거꾸로 된 삶을 바로 세워놓겠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한 아호였다. 그의 토플·토익 강의는 대학가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거로출판사를 차린 김씨는 ‘거로 워크숍’이 100만부 이상이 팔리면서 이름을 얻고 큰돈을 벌었다.

김씨는 매우 특별한 입지전적 경력의 소유자다. 김씨 자신이 언론에 밝힌 경력은 이렇다.

가난한 독학생에서 영어강사로 성공

김씨는 1960년 경남 거제 출생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 때 단신으로 상경했다. 대입학원에서 칠판을 닦고 수강생을 관리하는 조교로 취직해 학원강의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겨울철 난방이 꺼진 강의실에서 새우잠을 청하며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그는 어깨 너머로 강의를 들었고, 영어를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져 1981년 또래 대학생을 가르쳤다. 198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뉴욕주립대 정치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이때까지 하루 세 끼를 다 먹어본 일이 없다. 4시간 이상 편히 누워본 일도 없었다. 유학 시절 그는 틈틈이 귀국해 강좌를 맡았고 교재를 집필했다. 덕분에 학비도 벌고 결혼도 했다. 1991년 귀국해 영어강의와 교재를 쓰는 일에 집중했다.

그는 1997년 변신을 시도했다. 통상전문 국제변호사가 되겠다며 미국 로스쿨에 입학한다고 언론에 밝혔다. 당시 김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OECD 회원국이 된 이상 선진국과의 통상마찰을 피할 수 없다”면서 “탁월한 협상능력, 법률적 지식과 논리를 갖춘 전문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미국 시라큐스대학 로스쿨에 들어갔다 1년을 마치고, 밀워키시에 있는 마켓대(Marquette University) 법학대학원으로 옮겼다. 이후 그는 “마켓대 법학대학원에서 협상법을 전공한 뒤 밀워키 지방법원 중재변호사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2001년 3월 김씨는 한국사이버대학교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당시 두 명의 후보를 놓고 최종 경합을 벌였는데, 김씨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교수 경력이 없는 김씨가 사이버대학 초대 학장으로 선출된 데는 그의 입지전적 경력이 사이버대학과 어울린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정치권에 관여하고 있었다. 1997년 6월 미국 로스쿨 유학 직전, 그는 ‘민주당 총재 정치담당 특별보좌역’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녔다. 당시 야당은 김대중씨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이기택씨가 이끄는 꼬마 민주당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기택씨는 1997년 8월까지 민주당 총재로 있었다. 김씨의 ‘민주당 총재 정치담당 특별보좌역’ 명함은 이기택씨의 민주당을 뜻한다. 정치경력이 없는 그가 이런 명함을 갖게 된 데는 이기택 총재와의 사적 인연이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기택 총재와 동서지간이다. 이기택 총재의 부인 이경의씨는 여동생이 한 명 있는데, 김씨가 이 여동생과 결혼했다.

1997년 12월, 민주당은 대선 직전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당시 민주당 소속으로 합당에 반대한 노무현·김정길씨 등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김씨는 동서인 이기택씨를 따라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김씨는 노원병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열린우리당 임채정 후보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

야인으로 있던 이기택씨가 고려대 후배인 이명박 후보진영에 합류한 것은 2007년 7월이었다. 이씨는 중앙선대위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김씨의 이력서에 따르면, 김씨는 이기택씨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캠프에 합류하기 전에 이명박 후보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태광그룹과도 집안으로 얽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이기택씨는 총리급인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임명됐다. 김씨는 원외위원장으로 18대 총선에 공천신청을 했으나 홍정욱씨에게 밀렸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공천 탈락한 김정기씨를 상하이 총영사로 내보냈다. 또한 이기택 수석부의장의 아들 성호씨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취직했다. 2009년 이성호 행정관은 홍보지침 이메일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인물이다. 이성호씨는 미국 드렉셀대 MBA 출신으로 대통령 비서실에 들어오기 전 태광그룹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은 이씨의 고종사촌. 이호진 회장의 모친인 이선애씨의 남동생이 이기택 수석부의장이다.

상하이 총영사관 스캔들은 표면적으로는 외교부의 치욕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스캔들의 본질은 MB정부의 총체적 국정난맥상이 또 한번 곪아터진 것이다. 외교 문외한인 정치권 인사를 캠프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로 해외 공관장으로 내보냈고, 해외 공관의 기밀 누설을 관리해야 할 국정원은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 이런 해외 공관이 과연 상하이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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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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