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 재임대업체 ‘리브’사건 피해자 5만명 넘어
중국 밀항 후 2년째 오리무중 피해자들 “권력과 조폭이 도와”
조희팔 다단계 금융사기 사건의 피해자들. ⓒphoto 이재우 조선일보 기자
조희팔 다단계 금융사기 사건의 피해자들. ⓒphoto 이재우 조선일보 기자

“왜 경찰들이 잡을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4월 4일 경북 구미에 사는 이순향(여·62)씨는 기자의 전화를 받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이씨는 ‘건국 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이라는 조희팔(53) 금융사기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2008년 6월 이씨는 친구의 권유로 의료기 재임대(역렌털) 업체인 ‘리브’에 돈을 털어넣었다. 노후자금이나 벌어볼 요량이었다. 이씨가 투자한 돈은 2억4000만원가량.

2억4000만원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때 죽은 큰딸의 보상금이었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다. 구미에는 ‘센터’라고 불린 사무실까지 있어 이씨는 그곳에 출근했다. 투자 초기 ‘의료기 재임대 수익’이란 돈이 이씨 계좌로 꼬박꼬박 입금됐다. 하지만 5개월 후인 2008년 11월 조희팔의 유사수신 사기행각이 드러나고 조씨가 중국으로 튀자 상황이 달라졌다.

매일 출근하던 ‘센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투자한 돈은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이씨의 통장에 남은 돈은 62만원. 이씨는 현재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 있는 복지관에서 요양사로 일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목욕을 시켜주는 것이 이씨의 일이다. 봉사활동이나 할 요량으로 딴 요양사 자격이지만 지금은 이씨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당시 충격 이후 이씨의 남편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벌이가 신통치 못해 남편의 입원비는커녕 약값 대기도 벅차다. 양념과 밑반찬은 그나마 주변에서 보내주는 것으로 먹는다. 이씨는 “구미에만 피해자가 200명가량은 되는데 얼마나 로비를 했기에 정부에서 꼼짝도 하지 않느냐”며 “우리 딸의 피 같은 돈인데 조희팔이를 꼭 붙잡아달라”고 울먹였다.

의료기 재임대 내걸고 의료기 팔아

조희팔 금융사기사건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고 있다. ‘리브’라는 의료기 재임대업체 회장을 지낸 조희팔은 2004년부터 2008년 11월까지 4조원가량을 끌어모은 뒤 중국으로 도주했다. 피해금액 4조원은 2007년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제이유(JU)그룹 주수도 회장의 다단계 사기 피해금액 2조1000억원의 2배에 달한다. 수사당국에 따르면 피해자와 가족들은 전국에 걸쳐 5만여명이다.

조씨는 “의료기를 투자자에게 판매한 후 이를 다시 회수해 찜질방, PC방 등에 재임대해 올리는 운영수익을 투자자에게 지급한다”고 주장하며 돈을 끌어모았다. 대당 가격만 220만~440만원에 이르는 골반교정기, 다이어트기, 찜질기 등을 매입한 투자자들은 조씨의 업체에 기기를 재임대했다. 투자 초기엔 수익금이 꼬박꼬박 입금되자 점점 투자자들이 늘어났다.

조씨 금융사기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김영호(40)씨. 경북 구미에 사는 김영호씨가 날린 돈은 원금만 2억3000만원이다. 김씨가 지인의 소개로 조씨의 의료기 임대업에 투자한 것은 2007년이다. 식당을 운영한 적이 있는 김씨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조씨 회사의 지역 대표로 한 전직 경찰간부도 등재돼 있어 안심하고 발을 들여놓았다.

장사 경험이 있는 김씨는 의료기 임대업이 커피자판기 임대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김씨의 농협계좌에는 임대 수익금이 매일매일 찍혔다. 이후 김씨가 2억3000만원까지 투자를 늘리자 사건이 터졌다. 김영호씨는 “사건이 터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범인이 안 잡히냐”며 “조희팔이 밀항 때도 해경이 도와줬다는 말이 있었는데 일부러 안 잡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고 말했다.

“태안 해경, 조씨 밀항 방치했다”

‘왕회장’으로 불린 조희팔은 2008년 12월 9일 충남 태안군 안면도 인근의 마검포항에서 2.5t 소형선박을 타고 중국으로 달아났다. 조씨의 밀항을 도왔다는 양식업자 박창희씨는 조희팔이 밀항하기까지 전 과정을 2009년 한 시사주간지에 털어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박씨는 “태안 해경이 조씨의 밀항을 알았으면서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조씨에 대한 피해자들의 소송은 지금도 계속된다. 조씨의 주 활동무대인 대구에서만 60건, 전국적으로는 150건에 달한다. 대구지법은 지난 2월 13일 피해자 이모(55)씨 등이 조희팔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후순위 투자자의 투자금으로 선순위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며 투자자를 속인 조씨는 원고에게 4000만~1억원씩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도망간 조씨가 붙잡힌다 하더라도 쏟아부은 돈을 받아낼 방법이 없어 막막하다. 돈이 아직 남아있다는 소문은 있으나 확실치 않다. 피해자 김영호씨는 “조씨의 계열사가 있었으나 모두 타인명의로 돼 있어 법적 소송을 해도 받아낼 수 없었다”며 “현재로서는 조씨를 잡은 뒤 합의를 통해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씨 사건 피해자들은 ‘바른가정경제실천을 위한 시민연대(바실련)’를 구성해 검찰과 경찰의 조씨 검거를 촉구하고 있다. 인천과 대구, 부산 등지에 지부까지 두고 있는 바실련의 회원 수는 7500여명. 피해가족 중 한 명인 김상전 바실련 대표는 장모가 10억원 상당의 피해를 입은 다음 생업을 팽개치고 바실련을 이끌고 있다.

김상전 대표는 “사건규모나 피해자 수에 비해 검찰과 경찰이 사실상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며 “최근 대구·경북 지역에서 조희팔에게 도움을 줬다는 제보가 들어오는 등 권력과 조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정황증거가 있어 향후 야권과도 공조해 조희팔을 끝까지 추적해 잡아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밀항 때 강희락이 해경청장”

그나마 피해자들은 조씨 사건의 몇몇 핵심인물들이 붙잡히는 데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지난해 1월 조씨 사기사건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김근호(44)씨를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붙잡았다. 김씨는 조씨가 설립한 ‘리브’의 경영고문으로 재직한 최측근이다. 다단계 유사수신에 깊이 관여하며 서울과 수도권을 관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김씨는 조씨의 밀항과정에서 경찰 관계자를 매수하는 역할을 맡아 로비자금 5억원을 집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당초 조씨와 함께 밀항하려던 김씨는 높은 파고로 밀항에 실패하고 국내에서 은신해 왔다. 최측근 김근호의 검거 직후 조씨도 곧 붙잡힐 것으로 알려졌으나 또 1년이 흘렀다.

2008년 12월 밀항한 지 2년여가 넘도록 조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현재 조희팔 사기사건을 전담하고 있는 곳은 대구지방경찰청과 충남 서산경찰서다. 하지만 수사기관에서는 조희팔의 정확한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 피해자는 “조씨가 당초 중국으로 밀항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필리핀 보라카이에 있다는 말도 들린다”고 말했다.

특히 조씨의 유력 은신처로 거론되는 중국과 필리핀은 우리 수사당국과 사법공조가 원활치 못해 범죄자들의 국외도주가 이어지는 곳이다. 익명을 요구한 충남 서산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대구·경북·부산 지역에도 피해자가 많아 대구지방경찰청과 함께 사건을 나누어서 담당하고 있다”며 “중국이나 필리핀은 우리 경찰의 수사권이 미치지 못하고 조씨 검거전담팀을 꾸려 해외로 출장을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라서 수사가 늦어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당국의 수사의지에 대한 불신이 상당하다. 피해가족 중 한 명이자 바실련 부산지역 대표를 맡고 있는 전세훈(30)씨는 “조희팔이 밀항할 때 해경청장이던 강희락 청장이 함바비리 때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냐”며 “사건 규모에도 불구, 중앙에서 수사하지 않고 지방에만 맡기는 등 수사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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