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1차대전 참전용사
14살 때 해군 입대
무공훈장만 9개
지난 5월 5일 11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마지막 1차대전 참전용사 클로드 스탠리 슐스. 구미 언론의 부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참전용사들이고, 특히 장수한 인물들이 부각된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5일 11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마지막 1차대전 참전용사 클로드 스탠리 슐스. 구미 언론의 부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참전용사들이고, 특히 장수한 인물들이 부각된다. ⓒphoto 뉴시스

1차·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5월 5일 호주 퍼스(Perth)에서 84세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사망. 1901년 3월 3일생으로 110년 인생을 살다간 평화주의자.

미국 신문·방송에 나오는 부음으로, 망자(亡者)와 관련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군(軍)’ 관련 업무가 아닐까 싶다. 베트남 참전용사,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군인, 군 업무 관련 민간인, 군수 관계자…. 이들 가운데 특히 참전용사 관련 부음은 전체 부음 10개 중 적어도 1~2개에 달하는 듯하다.

참전용사 부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이 많았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반대로 참전용사가 있었기에 평화가 보장됐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진다. 역설적이지만 참전용사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존경받는 사회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이다. 경제 수치로서가 아닌, 국가의 품격에서 본 진짜 선진국의 모습이다.

평화를 보장하는 참전용사는 반드시 장군 출신일 필요는 없다. 총알을 뚫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는 일병 출신의 참전용사가 있었기에 산 아래 평화가 한층 고맙게 느껴진다. 영미권 부음에 등장하는 참전용사의 특징 중 하나지만, 주인공은 대대장이나 유명한 전략가가 아닌 하사관, 소대장, 보병에 맞춰진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클로드 스탠리 슐스(Claude Stanley Choules) 부음에 대한 일차적 관심은 기사가 아닌 지면 한가운데 실린 흑백사진에서부터 시작됐다. 빛 바랜 사진 속에 담긴, 영국 해군 군복을 입고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이. 110세 인생이라는 타이틀을 단 부음 한가운데 있는 사진이 ‘해군 군복을 입은 어린이’라는 사실이 다소 의외로 느껴졌다. 언젠가 누구에게나 닥칠, 사후(死後)에 필요한 ‘영정’으로 군복을 입은 어린이 사진이 등장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기사에 참전용사란 말이 없다면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해 맞춘 전쟁놀이용 옷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군복과 어린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두 조합에 대한 궁금증은 사진이 찍힌 1915년부터 올해 어린이날까지 이어진, 결코 짧지 않은 110년 인생을 돌이켜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지구를 통틀어 1차 세계대전 참전 마지막 생존자인 슐스의 인생은 바로 그 사진 한 장에 전부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호주 국적으로 유명을 달리한 슐스는 원래 영국 퍼쇼(Pershore)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다.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50㎞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5살 이후 철이 들면서 배운 첫 번째 거짓말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이었다. 배우가 되려고 가출한 어머니를 위해 지어낸 말이다.

20세기 초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어둠도 강하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내부에는 빛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가난하고 갈 곳 없는 14살 소년을 반기는 곳은 군대뿐이었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으로 어린 나이에 입대할 수가 있었다.

소년이든 장년이든 적과 싸울 수 있는 남자는 모두 전쟁터에 동원됐다. 함대포 사격 요원으로 일한 슐츠는 1918년 전쟁 내내 무적함대로 통하던 독일 해군의 항복 조인식을 자신의 배에서 지켜본다. “독일 전함이 안개를 뚫고 나타났지만, 국기를 내리고 대포도 쏘지 않았다. 항복이었다.” 슐스는 17살 나이로 역사의 증인이 된다.

슐스는 이후 영국 해군에서 폭발물 관련 교관으로 일한다. 호주에 6주간 교관으로 파견된 것은 1926년이다. 80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인 에셀(Ethel)을 만난 것은 그즈음이다. “첫눈에 사랑한다고 느꼈다. 만난 지 10주 만에 결혼했다.” 98세를 일기로 2003년 세상을 먼저 떠난 부인은, 생애 마지막 날에도 슐츠와 손을 꼭 잡았다고 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슐츠는 부인을 따라 아예 호주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국적을 옮긴 것이다. 직장(?)도 영국 해군에서 호주 해군으로 바꾼다. “영국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호주에서는 나를 상당히 알아줬다.”

해군 복무 중 40대로 접어들면서 슐스는 다시 전쟁에 휘말린다. 2차 세계대전이다. 어뢰정 함장과 호주 서부지역 폭발물 제거 책임자로 일하면서 독일과 일본이 감행할지도 모를 만약의 공격에 대비했다.

41년간 지속된 해군 생활을 마감한 것은 1956년 55세 되던 때이다. 새로 시작한 일도 또 바다와 관련된 업무였다. 경찰로서 해군기지 주변을 경비하는 일이었다. 10년간 경찰로 일하는 동안 부인과 함께 배를 타고 다니며 낚시를 즐겼다고 회상한다.

50대, 60대도 아닌 ‘인생은 70대부터’라고 말한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슐스가 아닐까 싶다. 70대로 들어서면서 슐스는 인생의 무대를 바다에서부터 ‘세계’로 옮긴다. 먼저 오랫동안 꿈꾸던 저술 활동에 들어간다. 결코 어리지 않은 세 자식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생과 경험을 녹음기에 담았다. 1910년대의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고치는 과정 속에서 자서전이 나오기까지 30년이 걸린다. 2009년 출간된 자서전의 제목은 ‘최후의 마지막 인물(The Last of the Last)’이다. 자서전이 영미권 군사(軍史)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연하다. “나는 시작은 아주 좋지 않았다(Poor). 그러나 끝은 좋았다.” 출간기념식 때 ABC TV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다.

슐스는 영국과 호주로부터 무려 9개의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다. 그러나 군을 떠난 뒤 호주 정부가 요청한 승전 퍼레이드에도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승전 관련 강의도 거부한 평화주의자로 남는다. 전쟁을 찬미하는 그 어떤 생각이나 행동에도 반대한다는 것이 슐스의 신념이었다. 미국의 43대 대통령 부시의 이라크 공격 당시 마지막까지 전쟁에 반대한 인물은 야전장군 출신의, 당시 국무장관이던 콜린 파월이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부하들을 생각하면 누가 전쟁을 원하겠는가.” 파월의 이 말처럼 10대 때부터 전쟁을 경험한 슐스 역시 전쟁의 잔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서방권 부음을 읽을 때 주목해야할 부분은 ‘얼마나 장수했는가’라는 점이다. 뉴욕타임스 부음의 대부분은 90세 가까이 산, 장수자의 부음을 중심에 둔다. 예외는 있지만, 유명하고 훌륭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일찍 세상을 떠난 인물은 부음 대상에서 제외된다. 논리나 업적이 아닌, 장수야말로 보통 사람들이 가장 따르고 싶은 ‘가장 인간적인 관심’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슐스는 참전용사로서가 아니라 장수의 상징으로도 세계적 지명도를 갖고 있다. 언론의 각종 인터뷰 속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하기에 그렇게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꾸준히 숨을 쉬면 된다.” 슐스가 던진 대답은 장난인 듯하면서 자신의 장수 비결을 알려주는 핵심이기도 하다. 슐스는 항상 웃고, 사람들에게 조크를 던지는 재미있는 인물로 살아왔다. 죽을 즐겨 먹고, 평소 망고 주스와 초콜릿을 가까이 하지만, 장수의 가장 큰 비결은 항상 웃는 낙관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한 여자와 만나 80년간 변치 않고 살아온 ‘일편단심 민들레’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장수의 비결이기도 하다.

슐스의 부음은 호주·영국만이 아닌, 적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 50여개 나라의 신문·방송에 실렸다. 장수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청춘을 바친 참전용사이었기에 추모의 열기가 한층 뜨겁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국군 참전용사에 대한 존경과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슐스의 부음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한층 더 깊게 와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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