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조각가 권치규·김경민의 마당 넓은 집에는 곳곳에 부부의 작품이 놓여 있다.
부부조각가 권치규·김경민의 마당 넓은 집에는 곳곳에 부부의 작품이 놓여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남긴 말이다. 같은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부부조각가 권치규(45)와 김경민(40), 이들은 행복한 부부이다.

미술계에서 소문난 잉꼬 부부인 이들은 젊은 작가와 중진작가를 잇는 40대 대표작가로 꼽힌다. 권치규는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폭넓은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고, 김경민은 일상에서 건져낸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작품들로 아트페어·상업화랑에 단골 초대되는 인기작가이다. 혹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에서 양복 차림으로 벤치에 벌렁 드러누워 낮잠 자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지? 서울 코엑스 현대백화점 옆에 넥타이 고쳐 매고 서류가방 흔들며 출근하는 ‘롱다리’ 거인은? 바로 김경민 작가의 유쾌하고 발랄한 작품들이다.

이들처럼 부부작가가 동시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 주목을 받기는 쉽지 않다. 한 사람이 성공하면 다른 한 사람은 그 그늘에 가리기 십상이다. 그늘에 묻히는 사람은 십중팔구 가사와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부인 쪽이다. 하지만 그 공식은 이들 부부에게만은 예외이다. 김경민은 작가 이전에 세 아이의 엄마이다. 연년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딸, 4학년 아들이 있고 막내 딸이 이제 7살이다. 한창 엄마 손이 필요한 나이다. 부부는 “작품보다 아이들 잘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부부가 잘 키운다는 것은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아니다. 부부는 아이들이 아파트의 편리함보다 자연의 소중함을 먼저 알기를 바란다. 학원 순례에 찌들기보다 땀 흘리며 실컷 뛰어놀기를 바란다. 도시 아이들의 흰 피부보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이 훨씬 건강하다고 믿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그런 집이다.

헛간 같은 창고에서 신혼살림

김경민의 작품 ‘꿈꾸는 세상’
김경민의 작품 ‘꿈꾸는 세상’

경기도 고양시 일산 동구 문봉동. 일산보다는 파주가 가까운 변두리 동네다. 아파트 숲인 일산 시내에서 불과 10~20분 거리지만 풍경은 전혀 다르다.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에 직접 집을 짓고 지금껏 살고 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는 주변이 모두 논밭이었다는데 지금은 조립식 공장건물이 즐비하다. 이들의 집 뒤편은 야산으로 연결돼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마치 애니메이션 세트장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키가 4m를 훌쩍 넘는 남자가 감색 양복을 입고 막 집을 나서고 있었다. 테라스에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목을 빼고 앉아 망원경으로 집안을 엿보고 있고, 건물 옥상 난간엔 웬 남자가 걸터앉아 태평하게 책을 읽고 있다. 잔디밭에 팔자 좋게 누워 있는 남자도 있다. 엉덩이 쳐들고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내밀고 있는 커플도 있다. 마당 한쪽엔 스테인리스로 만든 나무도 놓여있다. 조각가 부부의 집답게 정원과 건물 곳곳에 부부의 작품을 세워놓은 것이다.

1320㎡의 땅에 건물은 두 채.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층집과 4~5m 높은 곳에 세워진 2층 높이의 건물이 부부의 공동 작업실이다. 10년 전이면 젊은 예술가 부부의 살림살이가 어땠을지 빤한데, 어떻게 이런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부부의 시작은 창고였다. 블록 벽돌로 지어 겨울이면 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헛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부부의 말을 들어보자.

김: 창고에 살았다고 하면 불쌍하게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힘들지 않았어요. 늘 그렇게 작업해왔고, 조각하려면 으레 그러려니 여겼죠.

권: 산에서 나무 해다 난로 때고 살았어요. 나무꾼과 선녀였죠. 하하.

김: 작업만 할 수 있다면 평생 그렇게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행복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권: 주인이 번듯한 창고를 지은 덕분에 1년 만에 헛간 신세는 면했죠. 주인이 고맙게도 창고 안에 방까지 만들어줬어요.

김: 그 방에서 둘째까지 낳았어요. 게다가 창고 작업실은 후배 작가들의 아지트였어요. 그 후배들까지 다 거둬 먹였어요.

부부가 그렇게 신혼을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부부는 결혼식에 전혀 돈을 쓰지 않았다. 결혼반지도 없고 결혼식도 구민회관에서 무료로 올렸다. 양쪽 집안이 가난했던 것도 아니었다. “결혼식에 쓸 돈을 아껴 땅을 사라”는 것이 부모들의 생각이었다. 결혼식 비용으로 일산 가좌지구에 땅 3300㎡(100여평)를 사두었다. 땅이 있으니 창고에 살아도 마음은 든든했던 것이다. 가좌지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땅값이 올랐다. 2001년 그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아이들은 실컷 놀아야죠!

창고에 살다 10년 전에 직접 지어서 들어온 집. 살림집과 작업실이 있는 건물 두 채로 이뤄져 있다.
창고에 살다 10년 전에 직접 지어서 들어온 집. 살림집과 작업실이 있는 건물 두 채로 이뤄져 있다.

큰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 일산 시내 아파트로 옮긴 적이 있었다. 학교 다니기도 편하고 아파트에 가면 친구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웬걸, 아파트 놀이터에 놀러 나오는 아이들이 없었다. 해 넘어가도록 밖에서 놀고 있는 이 집 아이들이 오히려 아파트 아줌마들에게는 ‘이상한 집 아이들’이었다. 어느 눈 오는 날은 이웃주민이 전화를 걸어오기까지 했다. “눈도 오고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아이가 집에 안 들어가고 밖에서 놀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걱정되지도 않느냐”는 것이 용건이었다.

“내 교육관과 안 맞았어요. 나는 아이들이 세상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컸으면 좋겠어요. 사람에 대해서도 경계가 없었으면 해요. 아파트촌에서는 왜 그렇게 담을 쌓아놓고 사는지, 서로 그어놓은 선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이 동네에서는 학교가 끝나면 학원이 아니라 마음대로 뛰어노는 것이 당연한 일이에요. 눈 오면 스키복 입고 나가 비탈길에서 미끄럼 타고 놀고, 가난한 집 아이든 다문화가정 아이든 똑같은 친구예요. 이런 생각이 여기선 지극히 평범한 건데 아파트촌에 갔더니 다른 엄마들 사이에서 내가 별나고 특별한 엄마가 돼 있더라고요.”

권치규도 아이들 문제는 이런 엄마의 교육에 100% 맡기고 있다. 부부는 아파트 생활을 1년 만에 정리하고 다시 이곳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초등학교는 학년당 학생 수가 10여명이 전부이다. 한 반이 그대로 6학년까지 올라가니 형제처럼 지낸다. “아들인 둘째는 학교 끝나면 책가방 던져놓고 나가서 놀다 지치면 기다시피 집에 들어와요. 그래도 제 할일은 다 하고 자더라고요. 우리 아들 덕분에 학교에서 얼굴색이 다른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왕따당하는 일이 없어졌대요. 그 아이들보다 우리집 아이 얼굴이 더 새카맣거든요. 하하. 원시적으로 크고 있지만 내공이 쌓여 언젠가는 개과천선할 거라고 믿어요.”

작품 속에 가족이 들어있다

권치규·김경민 부부의 공동작업실.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작업을 거들어주기도 한다.
권치규·김경민 부부의 공동작업실.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작업을 거들어주기도 한다.

김경민이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권치규는 연필을 들고 공과금 고지서에다 스케치를 하다 한마디 거든다. “진짜 잘해요. 자기 일이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 일이 먼저예요. ‘잘한다 잘한다’ 내가 계속 최면을 걸어줘요.”

‘똑소리 나는 엄마’ 김경민은 마당 넓은 집에서 방목하듯 세 아이 키우며 지지고 볶고 사는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냈다. 결혼 전에 김경민은 사회적인 주제를 가지고 제법 굵직한 작업을 했다. 육아 때문에 큰 작품을 할 수 없으니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아내 작은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작품세계가 확실해지고 따뜻해졌다. 일상에서 포착한 사람들의 표정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조각들은 마치 삽화를 보는 듯하다. 김경민 조각들의 낯익은 표정에 사람들은 배꼽을 잡는다. 김경민 작품의 모델은 대부분 남편 권치규와 아이들이다. 튼튼한 팔뚝의 엄마 뒤에 업혀 있는 아빠와 세 아이, TV리모컨 들고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있는 아빠를 표현한 작품에는 모두 권치규가 들어있다. 권치규는 “내 동상이 전국에 세워져 있다”고 농담을 한다. 얼마 전 자동차쇼에 가서 레이싱모델을 보고 넋을 잃고 있는 권치규의 모습 또한 여지없이 김경민의 눈에 걸렸다. 그 모습을 지금 작품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 작품은 오는 7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 선컨템포러리에서 열릴 전시회에서 선보인다.

김경민이 아이들과 작품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바깥일은 모두 권치규가 맡고 있다. 아내가 참석해야 할 자리도 권치규가 가면 ‘김경민’으로 절반은 인정이 된다. 이를 테면 ‘얼굴마담’인 셈이다. 김경민의 몫까지 뛰어야 하니 권치규의 바깥 활동은 많을 수밖에 없다. 부부의 역할 분담은 확실하다. 부부가 같은 일을 하니 늘 붙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부를 물어야 할 정도로 얼굴 볼 새가 없다. 김경민은 매주 하루는 강원대에 가서 강의를 하고 사흘은 홍익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권치규 또한 그동안 박사논문에 매달리랴, 두 사람 바깥일 챙기랴, 정신없이 바빴다. 김경민에 이어 오는 9월에 전시도 계획돼 있다.

우리에게 작업은 숨을 쉬는 것

권치규의 작품 ‘Life-시선’
권치규의 작품 ‘Life-시선’

부부의 작품은 전혀 다르다. 권치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이 많다. 집의 형상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묻기도 하고 상생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시장에 커다란 집 한 채 들여놓고 관객의 발길을 붙잡은 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작품세계는 다르지만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조력자다. 권치규는 “처음부터 아내 작품의 팬이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김경민은 “남편 작품이 꼭 내 작품 같다”며 애정을 표현한다. 힘들 땐 서로 작품을 거들기도 한다.

창고에 살 때부터 후배들 거둬 먹인 부부의 마당엔 지금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작업 도와주는 제자들이 북적이다 보니 넓은 식탁도 늘 꽉 찬다. 세 아이들은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배려를 배운다. 그 일상과 관계들은 부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간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꾸는 부부가 말했다. “우리에게 작업은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서로의 작업은 이해를 넘은 삶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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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집
황은순 차장대우 /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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