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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名家 <현대편>] (24) 이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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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162호] 201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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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家 <현대편>](24) 이태규

한국 과학기술계의 거목 아인슈타인과 교유 한국인 첫 노벨상 도전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이회창의 큰아버지 ‘리-아이링 이론’으로 세계 화학계의 주목받아 노벨화학상에 거론되기도

신기한 사물 보면 어린시절부터 물고 늘어져
프린스턴대 유학 후 일본에 양자화학 최초 소개
photo 이회경
학천(學泉) 이태규(李泰圭)는 한국과학기술계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1930년대 후반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아인슈타인, 테일러, 아이링 등 세계적인 학자들과 어울렸을 만큼 일찍이 이름을 날렸다. 이른바 리-아이링 이론으로 불리는 학설로 그는 세계 화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리’는 그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이 이론은 뉴턴역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던 분자세계를 방정식으로 풀이한 것이다. 1965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추천위원이 되었고, 그 자신 역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곤 했다.
   
   이태규는 1902년 1월 26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55번지에서 이용균과 밀양 박씨 사이의 6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6대 선조인 전주 이씨 소생(紹生) 대에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소생은 사헌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훗날 그의 덕행을 기린 성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끝내 사양했다. 이때부터 이태규의 가문은 예산에 뿌리를 내렸다.
   
   이태규는 형과 함께 집에서 부친께 한문을 배웠다. 부친은 조금만 실수를 해도 종아리를 때릴 만큼 엄한 분이었다. 가훈이기도 했던 부친의 좌우명은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었다. 이 정신은 어려움과 곤란에 처했을 때 이태규가 꿋꿋이 설 수 있는 힘이 되곤 했다. 반면 모친은 무척 자애로운 분이었다. 식구들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어려움까지 보살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곡식이나 물품을 나누는 일도 잦았다. 이태규의 외조부는 중추원의관을 지낸 분이었다.
   
   이태규의 바로 아래 아우인 이홍규(李弘圭)는 1949년 서울지검 검사로 시작하여 고검 검사, 광주지검장, 법무부 교정국장을 역임하고 1961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재임 시 그는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수사를 맡아 당시 정권 실세들의 배후 관련 사실을 파헤쳐 ‘대쪽 검사’ ‘척결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변호사 시절에는 무료 법률상담과 변론 활동을 벌인 공로로 199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이태규도 1971년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이홍규의 장남 회정은 미국 브라운대학 병리학부 교수를 거쳐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의대 교수, 삼성의료원 병리학과장을 역임했으며, 차남 회창은 대법원 판사·감사원장·국무총리를 거쳐 한나라당 총재를 역임했다. 3남 회성은 미국 뉴저지주 럿거스대학 경제학 박사, 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원을 거쳐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맡은 바 있고, 2008년 유엔기후변화정부간위원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4남 회경은 미국 뉴욕주립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KAIST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영균 전 서울대병원장이 장인이다. 그는 특히 이태규가 한국과학기술원에 부임한 후 함께 근무하며, 이태규의 임종을 지켜보는 등 친아들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태규의 막내동생 이완규는 삽교고 초대교장, 서울 경문고 초대교장, 배명학원 이사를 역임한 교육자이다.
   
    “이 박사 가문의 특성 중 하나는 친가와 외가를 막론하고 90세를 넘긴 사람들이 흔할 만큼 장수 집안이라는 점이다. 이태규 박사가 90세, 이홍규는 97세에 작고했다. 또한 가족 모두 키와 체격이 작다는 외형적 특징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나는 과학자이다’ 대한화학회 편저)
   
   부친께 동몽선습을 배운 이태규는 자치통감과 소학마저 독파했다. 다음 차례는 사서삼경. 하지만 부친이 이태규에게 갖다준 책은 ‘전등신화’와 ‘아라비안나이트’였다.
   
    “한문은 읽고 뜻을 아는 정도만 배우면 되니, 사서삼경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도포와 갓을 쓰고 의관을 갖추는 부친이 아니던가. 하지만 부친은 완고한 유생이기 전에 세상 물정에 민감한 실학파였다. 그 무렵 소설책 말고도 이태규가 호기심을 보인 것은 장날 구경이었다.
   
   한번은 장터 좌판에서 파는 병아리 중에 깃털 색이 약간 특이한 병아리가 한 마리 섞여 있었다. 이태규는 쭈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그 병아리만 바라보았다. 병아리 장수가 ‘“얘야, 도대체 뭘 그리 보는 거니?”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태규는 “저 병아리는 깃털 색깔이 다르니 행동도 다를 것 아니에요? 다른 병아리들과 어떻게 다른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이태규는 어려서부터 신기한 사물을 보면 예사로 넘기지 않고 ‘왜?’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태규는 1910년 예산소학교에 입학한다. 나이가 어려 제1호 청강생이었다. 그래서 늘 뒤에 앉아야 했지만 성적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는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5년에 경성고보(현 경기고)에 입학한다. 이태규가 화학에 취미를 붙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본 화학 선생님은 어느날 방과 후에 그를 따로 불렀다.
   
   “내가 지켜보니 너는 화학에 아주 관심이 많더구나. 이제부터는 나를 도와 화학실험 준비도 하고 함께 공부도 하는 게 어떻겠니?” 이태규는 흔쾌히 응했다. 이태규에게 화학을 평생의 연구 과업으로 삼게 한 일본인 호리 마사오(堀正男) 선생이었다.
   
   1919년 경성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태규는 이듬해 관비유학생으로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수업 첫날부터 그의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첫날 물리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들어와 영어를 썼는데, 그 말의 의미는커녕 무슨 알파벳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그가 경성고보에서 배운 영어라고는 수학과 과학 과목에 필요한 알파벳 ABCDEFGHIXYZ의 열 두 글자뿐이었다. 더구나 알파벳 필기체는 그때 처음 구경했다. 그는 한국인 선배인 최현배의 하숙집으로 찾아가 영어 선생을 소개받고 코피를 흘려가며 밤새워 공부를 하였다.
   
    “서울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한 신입생 때부터 외국 잡지를 읽기 위해 도서관에 자주 가곤 했다. 그때 우연히 발견한 것이 코피 흘린 자국이 선명한 노트 한 권이었다. 그 노트는 이태규 선생님께서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시절 밤을 새우며 공부하다가 남긴 흔적이었다. 고등학교 때 화학 교과서에 실린 선생님의 이론을 익히 본 바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감동이 더욱 컸다.”(김창홍·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2학년이 된 후 첫 시험 결과가 나왔다. 수석이었다. 그동안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을 했다. 공부라기보다 차라리 전쟁이었다.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노트에 수없이 흘렸던 코피 자국들. 남들은 영어 원서를 읽는데 알파벳부터 시작한 영어 공부. 배워보지도 못한 2차 방정식을 푸느라 혼자서 끙끙댔던 숱한 나날들.
   

   이태규의 졸업 성적은 전교 2등이었다. 2학년 이후 계속 수석을 했지만, 1학년 때 성적이 좋지 않아 2등이 된 것이다. 이어서 이태규는 교토제대 이학부에 입학한다. 당시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데가 없어 조선인 학생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이태규도 한때 방황하여 실의에 빠졌었다. 그러나 1년 선배인 이희준(토목과 3년)의 격려로 다시 마음을 잡는다. 그는 3학년 때 지도교수로 명망있는 호리바 신기치 교수를 만나 조선 최초의 화학박사가 된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리태규씨에게 리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리태규씨는 충청남도 례산 출생으로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광도고등사범학교를 마친 후 경도제국대학 리과 화학교실에서 삼 년간 수학하고 연구를 거듭하던 중 금번에 리학박사의 논문을 제출한 것이다. 금년 삼십사 세인 리씨는 조선이 낳은 최초의 리학박사로 각 방면에 기대가 자못 크다.”(조선일보 1931년 7월 20일자)
   
   이듬해 이태규는 절친한 친구인 시인 정지용의 중매로 박인근(朴仁根)과 전북 익산군에 있는 나바우성당에서 결혼한다. 신부는 제일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교토에 있는 헤이안 여자학원에 유학 중이었다. 그 전에 이태규는 정지용을 대부로 가톨릭을 믿게 되었다.
   
   1937년 초 교토제대에서 교수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실 분위기는 아주 냉랭했다. 사상 유례가 없었던 조선인의 조교수직 임용이 안건으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6년이나 부수(副手)로 있었던 이태규가 그 대상이었다. 호리바 교수가 벌떡 일어섰다.
   
    “이태규 박사는 우리 화학과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가 발표한 논문이나 그 동안의 연구 실적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6년간 화학과 부수로서 지내야 했습니다. 우리 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인재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도대체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습니까?”(‘나는 과학자이다’)
   
    1937년 4월 이태규는 일본 제국대학의 유일한 조선인 화학과 조교수로 임용된다. 그러나 당시 유럽이나 미국은 과학 분야에서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특히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는 세계적인 촉매학 권위자인 테이러 박사가 있었다. 촉매는 이미 이태규가 평생의 연구 과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였기에 그쪽으로 관심이 기울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에게는 장학금을 주지 않아 난감하였다. 다행히도 일본에서 금강제약을 경영하던 전용순씨가 여비 전액을 부담하겠다고 나섰고, 미국에서의 학비와 생활비는 김연수씨가 부담하기로 하여 1939년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프린스턴대학에서의 이태규는 아인슈타인 박사를 비롯하여 헨리 아이링 교수, 1949년에 일본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유가와 히데키 박사 등 세계적 석학들과 교유·연구한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양자화학을 하게 된 이태규는 후에 교토제대로 돌아가 이에 대한 강의를 함으로써 일본에 양자화학을 도입한 선구자가 된다.
   
   교토대 교수로 있던 이태규는 1945년 광복을 맞아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귀국했다. 당시 미 군정하에서 문교부 장관을 맡고 있던 유억겸이 몸소 나와 그를 맞았다.
   
    “얼마나 선생님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시는군요. 이렇게 와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이태규는 우선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장을 맡았다. 뒤이어 서울대 초대 문리과대학장을 맡아 과학교육에 진력한다. 또한 조선화학회를 서둘러 창설한다. 학회가 만들어져야 연구 풍토가 활성화되고 기초과학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이태규는 국립서울대안을 반대하는 좌익계열의 투쟁에 휘말려 사임한 후, 1948년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떠난다.
   
    이태규가 서울대 문리과대학장을 맡고 있을 당시 이승기 박사가 서울대 화학공학과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이태규와 같은 교토제대를 졸업하고 비날론 연구로 명성을 날린 화학자였다. 두 사람은 그후 각각 다른 길을 걷는다. 이태규가 미국 유타대학 연구교수로 간 반면 이승기는 6·25전쟁 때 월북했다. 하지만 북한의 이승기 박사가 7·4남북공동성명을 위해 평양에 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이태규의 안부를 물어볼 만큼 두 사람은 서로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사이였다. 이태규의 자제인 이회인 박사는 자신이 어렸을 때 이승기 박사가 집으로 자주 찾아와 예뻐해주었다고 기억한다. 또 이태규는 교토제대 교수 때부터 우장춘 박사와도 가깝게 지내 이태규의 가족들이 부산 피란시절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는 제자들과 함께 돈을 모아 건네주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 이태규 박사 이야기를 하는 조카 회경씨.

   “국보급 학자는 나라가 보호해주어야 하거늘 가족들을 이렇게 모른 체하고 있다니….”
   
   이태규가 가족의 생사를 맡기고 새로운 각오로 연구에 몰두하여 발표한 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아이링 이론’이었다. 점성(粘性) 물체의 흐름 성질을 연구하는 분자점성학의 기초가 되는 이론으로 이태규와 아이링 박사는 한때 노벨화학상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이태규는 1950년에 유타대학 연구교수로 정식 임명된다.
   
    “우리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미국 대학의 연구교수로 문리과대학의 이태규 박사가 정식 초청되어 과학 한국의 명성을 세계에 떨치게 되어 기대되고 있다. 즉 미국 유타대학교 총장으로부터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전달된 공식 서한에 의하면 우리나라 화학계의 권위자로서 재작년 9월에 도미, 유타대학교에서 양자화학과 고분자화합물의 분자 구조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오던 이태규 박사가 금년 6월에 동대학 초청 연구교수로 정식 임명되었다 한다.”(조선일보 1950년 6월 14일자)
   
   이태규의 유타 생활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규칙적이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하면 오전과 오후 한 번씩 학생회관에 가서 커피를 마실 뿐 종일 연구실에 있었다. 점심과 저녁은 5분 정도 걸어가 집에서 먹었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연구실에 나와 새벽 1시에야 퇴근했다.
   
   강의에 임하는 태도도 아주 철저했다. 칠판에 판서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커다란 종이에 미리 써가지고 와서 칠판에 걸어 놓고 강의를 했다. 논문을 정리할 때도 꼼꼼하기로 유명했다. 학생들이 제출한 논문을 검토할 때 단어 하나, 쉼표 하나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이태규가 있는 유타대학에는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숱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한상준·장세헌·김각중·전무식·권숙일·이용태 등 30여명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이태규는 1973년 한국과학원 명예교수로 초빙된다. 기초과학을 튼튼히 하기 위해 한국이론물리화학연구회를 창설하는 등 원로 과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태규는 1992년 10월 26일 대전 한국과학원 연구실에서 퇴근한 후 별세했다.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서울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이태규는 1남3녀를 두었다. 장남 회인(75·서울대, 유타대 물리학과 졸업)씨는 유타대에서 응집물질 및 통계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주립대 로렌스리버모어국립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은퇴한 후, 동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욱경(66·서울대 음대, 미 홀리네임스대 석사, 동 대학 피아노과 교수)씨와 결혼하여 아들 연(46·MIT대 컴퓨터 사이언스-전기공학과학과 석사), 딸 영(하버드대 경제학과 졸업)씨를 두었다. 이태규의 맏딸 주혜(76·서울대, 유타대 영문과, 애리조나대학원 졸업)씨는 스캇대일 커뮤니티대 일본어 교수로 크리스토퍼(작고·유타대 건축학과 교수 역임)씨와 결혼했다. 이태규의 차녀 신혜(작고·피츠버그대 생화학과 교수 역임)씨는 최승철(75·미 칼테크대 졸업, 샌디에이고대 수학박사, 웨스팅하우스 연구원 역임)씨와 결혼하여 영(41·MIT대 졸업,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브라운대 경제학과 교수), 윤(39·칼테크대, 일리노이대 물리학 석사, 컴퓨터회사 시스템 아키텍트)씨 형제를 두었다. 이태규의 3녀 정혜(66·버클리대, 유타대 수학석사, 케미컬뱅크 부사장 역임)씨는 폴 페인(유타대 수학석사, 존슨&존슨 자문역)씨와 사이에 딸 태미(러처스대 석사), 아들 태연(코넬대 석사)씨 남매를 뒀다.
   
내가 본 학천 이태규
   
   이용태 퇴계학연구원 이사장
   
   내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강사로 있던 시절 이태규 박사님이 조교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조순탁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유타대로 유학하게 되었다. 1966년 미국으로 향하는데 박사님은 유타에 오기 전에 버클리에 들러서 컴퓨터를 먼저 배워오라고 지시하셨다. 박사님은 나를 반겨주시며,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자상하게 보살펴 주셨다. 박사님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셨다.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는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듯이 아주 겸손하게 미리 준비를 다 하셨다. 한번은 시험 10분 전까지 강의실에 오라고 했는데, 내가 그만 조금 늦고 말았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이 자리에 앉기 전에 시험지를 미리 배포해 놓고 기다리셨다. 내가 한시를 한다니까 아호를 지어달라고 하셔서, 즉석에서 ‘학천(學泉)’이라고 지어 드렸다. 그분 덕분에 배운 컴퓨터 실력으로 내가 삼보컴퓨터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세계적 과학자 밑에서 공부하게 된 인연을 나는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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