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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名家 <현대편>] (27)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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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165호] 201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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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家 <현대편>](27) 이병도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90세에도 ‘한국유학사략’ 출간
100여권 저서·논문 남겨, 미국역사학회 회원에도 선임
photo 이태녕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는 한국 사학계의 태두(泰斗)이다. 그는 일제하 진단학회(震壇學會)를 창설하여 일제에 맞서는 ‘한국학의 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문교부 장관, 학술원 회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등의 중책을 맡아 대한민국의 교육·학술·문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문헌과 사료를 바탕으로 삼는 실증사학을 정립하였다. 그의 학맥을 잇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학자의 대다수가 그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병도는 1896년 8월 14일(음력)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천리 노곡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鳳九)와 경주 김씨 사이의 5남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병도는 우봉 이씨로, 고려 명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공정이 시조이며 조선 숙종 때 이조·형조판서를 지낸 농재공(農齋公) 이익(李翊)의 후손이 번성했다. 이병도는 농재공의 10세손이다. 이병도의 맏형 병묵(丙默)은 영천군수와 승지를 지냈으며 그 아들 재령(宰寧)의 부인이 윤보선 전 대통령의 동생 계경(桂卿)이다. 둘째형 병훈(丙薰)은 구한말 부위(副尉)로, 그의 딸 인남(寅男)이 민복기 전 대법원장의 부인이다. 셋째형 병희(丙熙)는 명필가로 유명하며 넷째형 병열(丙烈)과 함께 이왕직의 예절을 맡아보는 전사(典祀) 벼슬을 지냈다. 이병도의 누이동생이 윤치영의 첫 부인이다.
   
   이병도는 10대 중반까지 집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15세에 부인 조남숙(趙南淑)과 결혼한다. 처가는 평양 조씨로 장인 조성근(趙性根)은 구한말에 육군참장을 지낸 무관이었다. 부인은 진명학교에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워 영어회화에 능통했다. 영어를 잘하는 부인과 신식 공부를 하는 처남에게 자극받아 신학문을 접한다. 가족 몰래 보광학교 중동학교, 일본강습소 등에 다닌다.
   
    “1910년 한 가을날 15세의 소년 이병도씨가 우리집에 와서 나의 누나와 혼례의 예식을 올렸다. 이로써 그이는 나의 매부가 된 것이다. 그때 우리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머리를 깎았는데, 내 주먹만한 상투를 하고 관을 쓴 새 신랑의 머리는 좀 서툴러 보이기만 하였다.… 혼인 후 어른들의 신랑 평은 양호하였다. 나이 어린 데도 인사성이 바르고 행동거지가 숙성하다고 칭찬이 대단했다. 일찍이 한문 공부를 많이 했고, 또 엄격한 구식가정에서 훈육을 잘 받아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유감없는 구식박사가 된 것이다.”(조백현 학술원 회원 ‘이병도 선생 추모문집’)
   

   1915년 보성전문을 거쳐 와세다대학에 진학한 이병도는 일본사 교수인 요시다 도고 박사가 쓴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이라는 책을 읽고 ‘한국인에 의한 한국사’ 전공의 길을 택한다.
   
    “그는 보전에서 만국공법에 흥미를 느꼈고, 그것이 통신강의록 입시준비를 통한 일본 대학 유학으로 이어져, 당초 서양사를 공부하려 했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한국사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인 교수로부터도 자극을 받아, 결국 한국사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고구려 대수당(對隨唐)전쟁에 대한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하고 대학을 졸업했는데, 23세 때였다.”(‘앞서 가신 회원의 발자취, 이병도 선생’ 대한민국학술원 2004)
   
   1919년 졸업 후 귀국하여 이병도는 와세다 대 1년 선배인 최두선 중앙고보 교장의 알선으로 그곳의 교원이 되어 역사와 지리를 담당하고 영어도 가르친다. 이즈음 안서 김억(김소월의 스승)의 요청으로 문학 동인지 ‘폐허’에도 참여한다. 또 중동학교에까지 야간 강사로 출강하였는데 격무로 건강을 해쳐 요양을 받기도 한다.
   
    “선생은 일찍이 일정하의 암흑기에 비록 빈한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시 냉돌과 빈대를 벗삼아 학구에 전념하여야 했고 시종 내 나라 역사 연구를 일인에게 맡길소냐며 민족적 항쟁심과 소명감에 투철하였으며, 30대 중반에 한때 중병을 이겨낸 후로는, 평생 주(酒)·연(煙)에 조심함은 물론 아침 세수 시 전신마찰과 시간 반 정도의 조조(早朝) 산책을 게을리하지 않는 등 오로지 극기와 절제의 노력으로써 일관하였음을 알아야 한다.”(‘역사가의 유향’ 진단학회편)
   
   이병도는 젊은 시절 늑막염을 앓은 후부터 평생 한겨울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냉수마찰을 하는 의지와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의 아호의 유래에 대해 제자 허선도 교수가 ‘추념문집’에서 밝히고 있다.
   
    “선생의 아호 두계(斗溪)는 처음에 杜桂(桂洞에서 杜居하는 學人)에서 출발하여 삼청동으로 이사한 후 그곳(三淸洞·서울 북쪽, 北은 北斗와 通)에 두거(杜居)한다는 뜻에서 동음이의의 斗溪로 정하셨다 한다. 그러나 우리 후학들은 모두가 이를 ‘두고계장(斗高溪長)’, 즉 북두(北斗)와 같이 높고 장강(長江)과 같이 길다는 뜻에서 그 의의를 찾고 있다.”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자 도쿄제대 조선사 교수였던 이케우치의 추천으로 직장을 옮긴다.
   
    “그는 교원의 자리를 벗어나 연구자로서의 지위와 기회를 얻은 셈인데, 당시 한국사 연구자료가 거의 일제 관변 측에 독점되어 있는 현실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병도는 전임자인 수사관보(修史官補)의 자리에서 22개월 만에 물러났다.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일본인들 틈새에서 연구와 편찬 업무도 힘겹고 불편하였을 것이다. 다만 무급촉탁으로 자료 이용의 길은 열어두었다.”(‘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일조각)
   
   이병도는 일인들만 볼 수 있던 규장각 도서를 많이 접해 한국사 연구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 경력은 후일 식민사관 논쟁의 빌미가 된다. 이후 이병도는 계몽사학자인 이능화, 안확, 황의돈, 권덕규, 문일평, 이중화 등과 학문적 토론을 하며 스스로 ‘7인 그릅’으로 불렀다.
   
   이병도는 1934년 진단학회 설립을 주도하며 국내 최초로 본격적인 학술지를 발간하여 일제 학계에 당당하게 맞선다. 황국사관에 젖어 있던 일본 사학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우리 고유의 국명인 ‘진(震)’과 단군의 ‘단(檀)’을 합해 ‘진단학회’로 한 것이다.
   
    “진단학회는 3·1운동 이후 고조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결실로 세워졌다. 이 무렵 한국인으로서 그 방면에 뜻을 두고 일본의 대학에 유학하거나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에서 수학한 젊은 학자들이 점차 등장하면서 학술연구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
   
   우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한 손진태·김상기·이상백·이선근 등이 이병도의 후배로서 한국사 연구에 뜻을 둔 사람들이었다. 한편 경성제대 출신으로는 조윤제·이희승·이숭녕·방종현 등이 한국어·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한국사 분야의 신석호, 미학 미술사 방면의 고유섭, 농업 경제를 연구하는 박문규도 있었다. 또 연희전문 문과 교수로 백낙준·최현배·김윤경·이윤재도 참여하여 실로 당시 한국학 분야를 망라한 걸출한 학회였다. 찬조회원으로는 ‘7인 그룹’의 선배 계몽사학자와 조만식·김성수·송진우·윤치호·이광수 등 사회적 명망가 26명이 참여하였다. 이병도는 창설 당시부터 진단학회를 국제적 시야에서 폭넓게 운영하며 주목을 받는다.
   
   1945년 8월 16일 진단학회는 총회를 열고 재건에 착수한다. 정치단체도 아닌 학술단체의 이처럼 빠른 순발력이 놀랍다고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동면해 온 한국학자들의 학구 의욕이 얼마나 절실했던지를 실감시켜 주는 구체적 사례인 것이다. 이병도가 그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이병도는 또 국사 강의에 큰 힘을 쏟는다. 일제는 일찍부터 교육과정에서 한국사를 배제하였고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연구조차 금지시켜 광복 후 한국인의 대부분은 한국사에 까막눈이었다. 그러므로 진단학회에는 국어와 국사 강의 요청이 폭주하여, 이병도는 김상기·신석호와 함께 여러 차례 국사 강의에 나선다. 특히 국사를 가르칠 교수 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강습회도 수개월 동안 개최한다.
   
   이병도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창설에도 힘쓴다. 광복과 더불어 거의 일본인 일색이었던 교수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경성제대는 폐쇄되고 서울대가 그 뒤를 잇는다. 문리과대학에 사학과가 설치되어 이병도가 주임교수로 이끌어 간다. 교수진은 이병도를 비롯하여 손진태·이인영이 한국사를 맡았으며 뒤에 유홍렬과 강대량이 추가되었다. 동양사는 김상기와 김종무·김성칠·김일출이 담당하였으며 서양사는 김재룡이 전임을 맡았다.
   
   이병도는 1947년에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을 맡아 대학의 연구·학습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쓴다. 그는 서지학에도 깊은 식견을 지녀 그전에 이미 서지학회를 조직하여 학술잡지 ‘서지’를 간행한다. 특히 서울대 중앙도서관은 경성제대가 소장했던 규장각도서라는 큰 보물을 이어받아 관리하였기 때문에 그 소임은 막중했다. 그는 6·25전쟁을 맞아 1·4후퇴 때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을 부산으로 소개하여 안전하게 보존했다.
   
▲ 두계 이병도 이야기를 하는 아들 태녕씨(왼쪽)와 손자 웅무씨.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갔던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돌아와 이번에 실물이 공개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파리도서관에 가서 귀환에 애써온 박병선 박사가 선친 생전에 출국신고차 오셨어요. 그 자리에서 선친께서는 외규장각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시고 그 반환전략도 상세히 일러주셨지요. 그런 인연 때문에 최근 와병 중인 박병선 박사 살리기 모금운동을 조선일보가 벌였을 때 우리 형제 가족들도 발벗고 나섰지요.”(3남 태녕씨)
   
   이병도는 1949년 연구서로 ‘고려시대의 연구’(을유문화사)와 ‘조선사대관’(동지사)를 낸다. ‘고려시대의 연구’는 이병도가 오랫동안 쌓아온 고려의 지리·도참사상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종합·발전시켜 체계화한 것이다. 이 연구는 독창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광범한 문헌 검토와 현지조사를 거듭한 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사대관’은 이병도 자신이 쌓아온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체계화한 개설서이다.
   
   이병도는 1954년 서울대 대학원장이 되며 1960년에 초대 학술원 회장이 된다. 이해 4·19혁명 뒤에는 문교부 장관이 되어 사태수습에 힘쓴다. 당시 고위공무원을 모두 교수직에서 발탁하여 화제가 된다. 차관에 이항녕 고려대 교수, 고등교육국장에 김증한 서울대 법대 교수, 편수국장에 전해종 서울대 문리대 교수, 문화국장에 김은우 이화여대 교수, 과학교육국장에 최상업 서울대 문리대 교수, 사회교육국장에 조병욱 서울대 사대 교수를 임명하여 마치 ‘교수 내각’ 같다는 평을 받았다.
   
    “그때 허수반은 당시 고려대 총장으로 있던 유진오 선생에게 4·19학생혁명이 고려대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을 들어서 문교부 장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유 총장은 학교를 떠나기 어렵다고 사의를 표했다. 그래서 허수반의 보성전문 동기동창인 이병도 선생에게 문교부 장관을 맡겼다. 강경하게 사양하시다가 할 수 없이 문교부 장관이 된 이병도 선생은 유진오 선생에게 당신이 맡아야 할 직책을 내가 맡게 되었으니 그 대신 차관을 고려대에서 보내라고 요청하셨다. 유 총장은 나를 불러 그 동안의 경과를 말하고 차관으로 가라고 하였다.… 이병도 장관의 시정방침은 철저한 민주화였다. 우선 학생들을 통제하던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단체를 자율화시켰다.”(이항녕 ‘역사가의 유향’)
   
   이병도의 제자로는 전해종·고병익·한우근·민석홍·김원룡·이기백·김철준·윤무병·노명식·조항래·김재만·차하순·민두기·이태진·최몽룡·민현구 등이 있으며, 모두 학계의 중진들이다. 이병도는 27권짜리 ‘한국사대관’ 등 100여권의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이 중에도 ‘한국유학사략’은 90세에 출간한 역저로 꼽힌다. 중국의 호적박사에 이어 아시아인에게 단 한 자리만 배정된 미국역사학회의 회원으로 선임되기도 한다.
   
   이병도가 이처럼 방대한 연구업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학구적 입장에서 70년에 걸쳐 오로지 한국사 연구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재야사학자들의 모함과 눈총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실증사학의 방법을 고수하여 정통사학의 기틀을 다지고 고수해온 집념이 열매를 맺은 셈이다. 그는 평생 엄격한 학문의 길을 다지고 가르쳤다.
   
    “이병도 선생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학생 시절에는 어려운 전공서적을 읽도록 해야 하네. 한 권을 정독하는 데 1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힘들여 읽은 책의 내용이 일생 동안 머리에 간직되는 것일세.’”(강신항 ‘역사가의 유향’)
   
   이병도는 1989년 8월 14일 서울 한국병원에서 별세해 경기도 용인 선산에 안장된다. 이병도는 조남숙과 사이에 5남4녀를 두었다. 이병도의 장남 기녕(작고·경성의전 졸업, 소르본대 의학박사)씨는 핵산연구의 선각자로 서울대 의대 교수와 대한생화학회 회장을 지냈다. 모수미(85·숙명여대, 매사추세츠대학원 졸업, 서울대 가정대 교수 역임)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맏아들 영무(67·미시간대 교수, 이학 박사)씨는 강일희(64·캘리포니아의대 외래교수)씨와 결혼했으며, 차남 웅무(65·이학 박사, 아주대 교수 역임, 팝스 대표이사)씨는 김웅수 장군(전 6군단장, 예비역육군소장)의 딸인 김미영(61·미국에서 석사학위 )씨와 결혼했으며, 딸 인혜(70·서울대 문리대 졸업, 와이오밍대 생물학 박사)씨는 지태화(71·서울대 생물학과 졸업, 와이오밍대 교수)씨와 결혼했다.
   
   이병도의 차남 춘녕(95·구주제대농화학과 졸업, 서울대 농대 학장 역임)씨는 임옥순(87)씨와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장인 임명재는 경성의전 교수와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지냈다. 장남 장무(66·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 졸업, 아이오와주립대 공학박사)씨는 서울대 총장을 지냈으며 이옥희(서울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차남 건무(64·서울대 고고학과 졸업)씨는 중앙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박명숙(홍익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딸 영주(54·숙명여대, 연세대 대학원 졸업, 사회과학도서관 실장 역임)씨는 부남철(외국어대 정치학 박사, 외국어대 교수)씨와 결혼했다. 이병도의 3남 태녕(87·서울대 화학과 졸업, 이학 박사)씨는 서울대 교수 문화재위원으로 8만대장경의 보존작업에 참여하였다. 권하자(79·이화여대 약학과 졸업)씨와 사이에 1남3녀가 있다. 아들 경무(53·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충북대 의대 교수이며, 장녀 미경(54·서울대 농대 농학과 졸업, 농학 박사), 2녀 선경씨(서울대 음대 졸업, 보스턴대 음악학 박사), 3녀 희경씨(이화여대 영어교육과 졸업, 런던대 미술학 박사)가 있다. 4남 동녕(84·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런던대 플라즈마물리학 박사)씨는 포항대 교수를 지냈으며 김용우 전 국방장관의 딸 김미희씨와 결혼해 2남1녀를 뒀다. 장남 명무(48·밴더빌트대, 노스웨스턴대 의대 졸업), 차남 진무(46·코넬대 의대 졸업)씨와 딸 은규(50·메릴랜드대 졸업, 의학 박사)씨가 있다. 이병도의 5남 본녕(76·하버드대 물리학 박사)씨는 MIT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이유한(MIT석사)씨와 사이에 2남이 있다. 장남 계무(MIT대 졸업,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씨는 미라이스대 교수, 차남 도무씨는 MIT대 분자생물학 박사이다. 이병도의 장녀 순경(91·경기여고 졸업)씨는 화가 장욱진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운경(서울여의전 졸업, 한국병원 부원장 역임)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민헌기씨와 결혼했다. 3녀 승희(73·세종대 졸업)씨는 임종도씨와 결혼했으며, 4녀 계희(70·서울대 졸업)씨는 황천봉씨(서울대 정치학과 졸업)와 결혼했다.
   
내가 본 이병도
   
   민현구 고려대 명예교수
   
   두계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대학에 입학하여 국사 과목을 수강하면서이다. 두 번째 시간을 마치자 곧 4·19혁명이 발생하였고, 선생님께서는 뒤이어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하셨기 때문에 우리 학년이 선생님의 강의를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 학기부터였다. 문리대(서울대) 7강의실은 넓은 교실이었지만 다른 과 학생들이 많이 몰려와 늘 붐볐다. 그러나 대가였던 선생님은 우리와 너무 먼 거리에 계셨고, 당신의 저서인 ‘국사대관’을 불러주시고 보충설명을 하시는 강의 내용도 우리에게는 너무 어렵고 궁벽진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멀고 높은 데 계시는 외경스러운 존재였고, 접근이 불가능한 거인이었다.
   
   몇 해 뒤에 나는 선생님의 주례로 혼인을 하였고, 다시금 여러 해 뒤에는 두계학술상을 수상함으로써 선생님의 커다란 은덕을 입게 되었다. 두계 선생님은 진단학회를 늘 분신처럼 여기셔서 당신의 사재를 진단학회에 내놓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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