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재물
[2168호] 2011.08.08

[인도, 중국과는 또 다른 대국] ⑧ 1947년 인도 독립하던 날 간디는 단식투쟁 중이었다

인도의 국부 간디, 중국의 국부 쑨원

최준석 편집장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물레를 돌려 실을 만들고 있는 간디 그림. 인도 구자라트주 아흐메다바드의 간디 아슈람에 전시돼 있다.
인도 특강을 할 때 물어본다. 인도인 중 기억나는 사람 이름을 얘기해보라고. 청중에게서 이름이 나오면 하나씩 칠판에 써나간다. 대개 다섯 명을 넘지 않는다. 한국인의 인도에 대한 평균 지식량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이 간디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국부라고 불린다. 원래 이름은 모한다스 간디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간디를 존경하는 인도인들이 부르는 말이다. 간디는 인도를 영국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독립국가로 이끌어냈다. 그 자신 새로 탄생한 나라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고, 정신적 지도자로 남았다. 그나마 인도의 국부는 인도가 독립한 지 5개월여 만에 제 국민의 손에 의해 살해됐다.
   
   중국의 국부는 쑨원(孫文)이다. 쑨원은 청조를 무너뜨리고 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지금은 대만으로 밀려난 국민당을 창당했다.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모두 쑨원을 국부로 존경한다. 아시아 두 대국의 국부는 동시대 사람이다. 간디가 1869년생이고, 쑨원이 1866년생이니 쑨원이 간디보다 3살 위였다.
   
   
   인도에서는 간디 존재감 약해
   
   인도에서 보면 국부 간디의 존재감은 의외로 약하다. 1948년이니, 64년 전 죽은 사람이어서 그런가 생각할 수도 있다. 인도 전역을 돌아다녔지만 간디의 동상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A K 암베드카르, 라지브 간디 등 수없이 많은 조각상이 있지만 간디 조각은 없다. 간디의 흉상을 본 기억은 그가 태어난 구자라트주에서였다. 인도 서남부에 있는 구자라트주의 대도시 아흐메다바드에서뿐이다. 그것도 간디가 세운 아슈람 내부에서다. 아슈람은 수행처를 가리킨다.
   
   인도 국부의 존재감을 인도 화폐에서 확인할 수는 있다. 동전은 물론 모든 루피화 지폐의 주인공이 간디다. 간디를 일상생활 속에서 떠올리는 경우란 국경일인 간디 생일 때다. 뉴델리 당국은 매년 10월 2일 간디 탄생일을 휴일 겸 국경일로 지정하고, 이날 업소의 술 판매를 금한다. 신문에 ‘드라이데이(Dry Day)’라며 술을 판매하지 못한다고 알리는 광고가 나온다.
   
   간디가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낸 건 그의 나이 78세이던 1947년이다. 그는 인도인을 대표하는 전국 조직인 인도국민회의를 이끌고, 자신보다 차세대 지도자인 자와할랄 네루, 파텔 등과 함께 영국과 싸워 독립을 얻어냈다. 인도가 독립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종료 2년 뒤인 1947년 8월 15일이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콜카타가 있는 벵골 지방을 차지한 1757년부터 따지면 190년 만이었다. 인도 독립일 택일은 인도의 마지막 영국 총독이 했다. 인도의 점술가들이 8월 15일은 길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인도 사람들은 길일을 많이 따진다. ‘상서로운’이란 뜻의 영어 단어 ‘auspicious’를 제일 많이 쓰는 영어권 나라가 인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자 인도의 지도자들은 제헌의회의 특별 회기를 8월 15일이 아닌, 8월 14일 밤 소집했다. 회의는 밤 11시에 시작됐다. 장소는 영국령 인도의 입법원 건물 내 회의장이었다.
   
   참석자들은 애국가인 ‘반드 마트람(Vande Matram)’을 합창했고, 인도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선열을 위한 묵념을 2분간 했다. 독립한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될 네루의 격정적인 연설이 있었다. 제헌의회의 특별 회기는 인도의 여성을 대표한 사람들이 인도 삼색기를 제헌의회에 증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날 밤 의사당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옛 무굴제국의 황성 레드포트에서 영국의 유니언잭이 내려지고 인도의 삼색기가 올라갔다. 1857년부터 휘날리던 영국 국기가 내려진 건 90년 만이었다.
   
   
   “사람들은 굶주려 죽는데 무슨 축하를…”
   
   인도의 역사학자 라마찬드라 구하(Guha)는 “인도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실수 없이는 끝나지 않는다”고 자신의 책 ‘간디 이후의 인도’에서 말하며, 그날 밤 벌어진 해프닝을 소개했다. 제헌의회 회의가 끝난 뒤 자와할랄 네루 총리 내정자는 각료 명단을 국가수반에게 제출했는데, 그게 빈 봉투였다. 소동이 벌어졌는데, 다행히 취임 선서를 할 시간 이전에 사라진 내용물이 발견됐다. 각료 명단에는 네루 총리 외에 13명의 각료 이름이 올라 있었다. 초대 내각에는 당적에 상관없이 가장 유능한 사람이 발탁됐다. 이는 인도국민회의와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주문이었다. 8월 15일 오전 8시30분, 전날까지만 해도 마지막 총독(Viceroy)이었고 독립한 인도의 초대 국가수반(Governor General)인 마운트배튼경 앞에서 내각은 취임 선서를 했다.
   
   간디는 인도 전역이 독립의 기쁨으로 들떠 있던 그날 수도 뉴델리에 없었다. 그는 인도의 동쪽 끝 콜카타에 있었다. 콜카타는 오늘날 웨스트벵골주의 주도다. 그는 어떤 독립 기념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독립 전날인 8월 14일 저녁에 웨스트벵골 주총리가 그를 찾아와 다음날 어떤 식으로 축하를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간디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굶어죽고 있다. 이런데도 축하하고 싶으냐”고 말했다. 간디의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인도의 주요 일간지 힌두스탄 타임스의 기자가 독립 관련 메시지를 요구해왔을 때 간디는 “그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he had run dry)”라고 응답했다. 영국의 BBC 기자가 간디의 비서를 통해 진정으로 인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부터 독립 메시지를 녹음하고 싶다고 하자, 간디는 자와할랄 네루 총리에게 가서 얘기하라고 말했다. 기자는 납득할 수 없었고, 다시 사람을 보내 메시지는 여러 언어로 옮겨지고 전 세계로 방송될 것이라며 다시 그의 메시지를 요구했다. 간디는 꿈쩍하지 않고 “그들에게 내가 영어를 안다는 걸 잊어버리라고 하시오”라고 냉담하게 말했다.
   
   
   독립기념일 24시간 단식
   
   간디는 독립일에 24시간 단식했다. 그는 오랫동안 인도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왔으나 독립은 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용을 수반했다. 독립은 바로 조국의 분단을 뜻했다. 지난 12개월 동안 힌두와 무슬림들은 인도 전역에서 끊임없이 충돌했다. 콜카타에서 1946년 8월 16일에 터진 유혈사태는 벵골 전역으로 확산됐고 서진을 시작했다. 유혈 충돌은 바로 옆의 비하르주로, 그 옆의 유나이티드프로빈스(United Province,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로, 마지막으로는 펀자브주로 옮겨붙었다.
   
   간디는 독립 예정일 2주 전 델리를 떠나 카슈미르에서 사흘간 머문 뒤 콜카타로 갔다. 종교 간 폭력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다. 8월 13일 오후 그는 콜카타 시내의 무슬림이 많이 사는 동네에 갔다. 사방이 다 뚫린 쓰러져 가는 가건물에서 콜카타의 유혈 충돌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8월 15일 오후가 되자 간디의 마음이 좀 풀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콜카타 시내에서 독립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힌두와 무슬림 할 것 없이 어울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광장에 가서 연설했다. 간디는 “오늘 보인 친목이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순간적인 충동에서가 아니길 믿고 싶다”고 말했다. 콜카타는 이날 대체로 평온했다. 콜카타가 속한 벵골은 독립으로 인해 이때 분단되고 있었다. 웨스트벵골은 인도, 벵골의 동부지방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 속하게 됐다.
   
   인도 전역을 보면 특히 펀자브주의 주도 라호르에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라호르는 콜카타와 같이 다종교·다문화 도시였다.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세운 바드샤 모스크가 있는 곳이고, 얼마전까지 시크왕국의 수도였으며, 최근에는 힌두 개혁주의 종파인 아리아 사마지의 본거지였다. 벵골의 분할은 8월 15일 이전에 영국식민 당국이 발표했으나, 펀자브의 분단은 아직 발표되지 않고 있었다. 불확실한 상황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콜카타에서 이뤄낸 작은 기적
   
   인도 독립 전해인 1946년 11월까지 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종교집단 간 충돌로 인한 사망자는 5000명이 넘었다. 펀자브는 1946년 말까지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인도 내 유일한 지역이었다. 1947년 독립과 분단이 다가온 5월이 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주 정부 권력이 바뀌면서 폭력 사태의 중심지가 됐다. 영국 상원에 제출된 한 기록은 1946년 11월 18일과 1947년 5월 18일 사이에 인도에서 4019명이 사망했고, 펀자브에서만 3024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벵골과 펀자브 두 지역은 공통점이 있었다. 두 곳 다 무슬림이 다수 주민이었고, 파키스탄은 자신의 영토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곳 모두 수백만 명의 힌두가 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두 지역 모두 분단됐다. 펀자브의 분단은 8월 16일 발표됐다. 8월에만 펀자브에서 1만5000명이 살해당했다고 역사학자 피트 리스(Pete Rees)는 기록했다. 펀자브 동쪽 인도에서는 힌두가 파키스탄으로 가는 무슬림을 죽이고, 펀자브 서쪽 파키스탄에서는 무슬림이 힌두와 시크를 도살했다. 유혈사태의 공포로 인해 수백만 명의 인구가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세간살이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떠나갔다. 역사상 이처럼 단기간에 많은 사람이 이주한 건 처음이라는 후대 역사가의 표현도 있다.
   
   간디는 여전히 콜카타에 있었다. 콜카타의 불안한 평온은 8월 31일 깨졌다. 힌두 청년 한 명이 무슬림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이에 대한 복수가 이어지며 유혈충돌은 확산됐다. 9월 1일까지 50명이 죽었다. 그날 밤 간디는 다시 단식을 결심했다. 간디는 이때 “내가 콜카타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펀자브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간디는 9월 2일 단식을 시작했고, 다음날이 되자 힌두와 무슬림 폭도들이 그에게 찾아와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았다. 간디는 3일간의 단식을 중단했다. 평화가 다시 돌아왔다. 영국 총독 마운트배튼은 무장을 하지 않은 한 명이 펀자브에 있는 병력 5만명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말을 했다.
   
   
   1월 30일 기도 모임 중 총성이 울리고
   
▲ 아흐메다바드의 간디 아슈람에 있는 간디 동상(왼쪽 사진)과 간디가 사용하던 방 내부 모습(오른쪽 사진).

   9월 7일 콜카타에서 4주를 머문 뒤 간디는 델리로 떠났다. 펀자브로 갈 생각이었다. 델리에 도착했을 때 이곳의 무슬림들이 두려워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간디는 최근 몇 주 새 최소 137개의 이슬람 모스크가 파괴됐다는 걸 들었다. 힌두와 시크 난민들이 무슬림의 집을 빼앗고 차지해 살고 있다고 했다. 무슬림들은 모두 델리 시내의 옛 왕성 중 하나인 푸라나 킬라로 피신했으며, 그곳에 6만명의 난민이 있었다. 간디는 푸라나 킬라를 방문해 무슬림들을 위로했다. 간디는 펀자브에 가려는 생각을 일단 중지하고 델리에서 9~10월 난민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했다. 무슬림에 대한 공격 행위가 늘어나자 간디는 또 단식을 시작했다. 1948년 1월 13일 간디는 델리에서 힌두와 무슬림이 평화롭게 형제로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간디는 파키스탄 정부에 대해서도 말했다. “내가 힌두와 시크의 인내심에 얼마나 더 의존해야 하느냐?” 파키스탄이 자국 내 소수 종교인인 힌두를 추방하는 일을 중단하라는 요구였다. 인도 정부는 간디의 또 다른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파키스탄에 5억5000만루피의 자금을 넘겨주기로 했다. 이 돈은 영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식민지 인도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 지불하기로 한 비용 중 파키스탄의 몫이었다.
   
   콜카타의 기적이 델리에서도 재연될 수 있을까? 급진 그룹의 지도자들은 간디의 단식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으나, 그들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간디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간디는 델리에 있는 백만장자 G D 비를라(Birla)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난민들은 그가 단식하고 있던 비를라의 집 인근을 떼지어 지나가며 “간디 죽어라”라고 외쳤다. 1948년 1월 20일에는 펀자브주에서 온 난민(마단 랄)이 간디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간디는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위협에 흔들리지 않았다. 1월 26일 한 기도 모임에서 간디는 이날이 1930년 이후 인도의 독립기념일로 어떻게 기념돼 왔는지를 말했다.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는 1930년 1월 26일 독립한다고 1929년 라호르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선언했었다. 간디는 이제 영국이 떠나 독립은 쟁취했고, 지난 몇 달은 매우 끔찍했지만 “최악은 지났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4일 뒤인 1월 30일 저녁, 그는 전날과 같이 기도 모임을 갖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이가 총을 뽑아 간디를 향해 쐈다. 간디의 늙은 몸은 힘없이 쓰러졌다. 국부를 죽인 살인범은 남부 푸네 출신 나투람 고드세였다. 그는 힌두였고 최상층 계급인 브라만 이었다. 무슬림을 간디가 두둔한 데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농촌 기아문제 나서면서 인도의 희망으로
   
   간디가 인도 독립운동사의 물줄기를 바꾼 건 1921년 인도국민회의 대회에서였다. 그는 당 대표에 선출되자 일부 명망가 중심의 시민운동 단체인 인도국민회의를 대중 조직으로 바꿨다. 가입비를 명목적인 수준으로 낮춰 문호를 열었다. 인도국민회의는 식민 당국으로부터 자치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 방식으로 ‘비폭력’을 명시했다.
   
   인도국민회의는 영국인 흄이 시작했다. 인도인의 식민지 통치 참여 확대를 목표로 1885년 12월 뭄바이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인도국민회의는 영국인이 설립했으나 이내 인도 지식인들이 인도의 미래를 논의하는 기구로 자리잡았다. 1921년, 설립 36년을 맞아 모한다스 간디라는 걸출한 인물이 당 지도자가 되면서 인도국민회의는 인도인을 대표하는 정치조직이 되었다. 신임 대표 간디가 주도하는 당 개혁에 인도의 젊은층은 환호했다. 전국에서 국민회의 입당 원서를 들고 몰려왔다.
   
   특히 간디의 비폭력·비협조 방식의 투쟁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인도인들도 일부 혼란스러웠으나 영국 식민 통치자들은 더욱 당황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 투쟁을 하는 방식을 이들은 유럽에서 접해본 적이 없었다.
   
   
   불가촉천민 위한 ‘하리잔 운동’ 펼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간디를 1930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타임지가 1931년 1월 5일자 잡지에서 간디에게 붙인 수식어는 ‘성인’이었다. 당시 타임의 기사를 잠시 인용해 보자. “전 세계적으로 이해의 큰 걱정은 대공황이었다. 메이저골프대회에서 4승한 로버터 타이어 존스 주니어가 올해의 운동선수가 되었다. (중략) 1930년 세계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그리고 절반가량은 옷을 벗은 갈색 피부의 남자를 발견한 건 한 감옥에서다. 모한다스 간디의 인도국민회의가 인도 독립을 공포한 건 정확히 12개월 전이었다. (1930년) 3월 그는 (중략) 영국이 신설한 소금세에 저항하기 위해 바다까지 행진을 했다. 5월 영국은 간디를 푸네에서 투옥했다. 지난주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고, 약 3만명인 그의 독립운동 회원은 다른 곳에 갇혀 있다. 대영제국은 여전히 그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다. 이는 제국의 최대 현안이다. (중략) 영국인 브레일스포드는 ‘인도에서 나는 누구도 다시 보기 힘든 걸 보았다. 봄베이(뭄바이의 옛 이름)는 두 개의 정부를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는 법적인 권력과 기구를 갖고 있고, 유럽인과 제복을 입은 인도인 세포이(군인들), 몇몇 재벌 그리고 무슬림 소수파의 고령자들의 충성을 받고 있다. 봄베이 인구의 나머지는 충성을 영국 정부의 너무나 많은 포로들 중 한 명인 마하트마 간디에 바치고 있다. 영국인 브레일스포드는 두 개의 정부 시스템이 있는 봄베이에서 인도 국민회의당 당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시위를 규제하고 경찰과 같이 행동한다고 표현했다. 간디의 여자 지지자들은 영국 상품을 팔고 있는 가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며, 인도인이 가게에 들어가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간다.”
   
   1931년 3월 영국 정부는 간디와 타협했다. 영국은 시민불복종운동을 중단하는 대가로 모든 인도인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간디는 런던에서 열린 원탁회의에 인도국민회의당을 대표해 초청받았다. 간디는 1933년에는 인도 내 불가촉천민의 차별 대우를 개선하기 위해 ‘하리잔 운동’을 벌였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때 인도국민회의당은 뭄바이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영국에 대해 ‘인도를 떠나라’고 최후 통첩을 했다. 이는 영어로 ‘Quit India Movement’라고 기록된다. 간디는 다시 투옥됐고, 간디가 후계자로 지명한 자와할랄 네루도 교도소에 들어갔다. 간디와 네루가 감방에서 손발이 묶여 있는 동안, 독립할 인도의 미래는 두 국가로 쪼개지는 쪽으로 정해졌다. 무슬림을 대표하는 인사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무슬림을 위한 나라가 별도로 필요하다고 영국을 집중 설득했다. 종교집단 간 유혈충돌을 선동해 두 집단이 공존할 수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간디가 1944년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인도의 분단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있었다. 식민지배자들을 무장투쟁이 아닌, 말로써 입으로써 몰아낸 간디였지만, 조국의 분단은 막을 수 없었다. 그 지점에서 간디는 쓰러졌다. 몸이 쓰러진 장소에서 간디의 정신은 영원의 시간 속으로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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