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뉴엘의 명품시계 복합매장인 ‘크로노다임’.
에비뉴엘의 명품시계 복합매장인 ‘크로노다임’.

전쟁이다. 전쟁이라는 말 외에 그 어떤 표현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다. 롯데·신세계·현대 그리고 갤러리아까지 2011년 가을, 백화점에서는 지금 명품시계 입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진원지는 서울 중구 소공동의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 명품시계 복합 매장인 ‘크로노다임(Chronodigm)’을 비롯해 ‘브레게(Breguet)’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 등 일반인에겐 이름도 생소한 명품시계 브랜드가 줄줄이 입점해 있는 에비뉴엘은 한발 더 나아가 2012년 상반기까지 시계 전문 매장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이에 뒤질세라 현대백화점도 명품시계 시장 공략에 적극적이다. 증축공사가 진행 중인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점은 공사가 마무리되는 9월 말에 맞춰 명품시계 매장을 두 배 이상 확대한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 본점도 지난해 6월 리뉴얼에 맞춰 6개 브랜드를 추가 입점시킨 데 이어 11월에는 현존하는 시계 브랜드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블랑팡’ 단독매장을 국내 최초로 오픈한다.

신세계백화점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 중구 충무로1가의 본점 지하 1층 시계 편집매장인 ‘드로어써클’에는 세계 톱 브랜드들이 들어와 있고, 9월 말 입점이 예약된 브랜드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신세계 강남점 역시 내년 상반기에 명품시계 매장을 두 배 넘게 확장한다.

갤러리아백화점은 매장을 넓힐 계획은 아직 없지만 비장의 카드로 ‘파텍 필립’을 내세우고 있다. 최고의 시계 브랜드로 남자들의 꿈인 ‘파텍 필립’은 그동안 소공동 롯데호텔 내에 있는 매장에서만 판매돼 왔을 뿐 정식 매장은 없었다.

백화점들이 명품시계 공략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현대백화점 서울 무역센터점 로열부티크 담당자 류재철 과장은 “수입 자동차가 순식간에 국내에서 대중화된 것처럼 명품시계도 빠른 속도로 일반인에게 퍼져나가고 있다. 과거에는 50대 이상의 중장년층 이상이 명품시계를 주로 찾았지만 요즘에는 30대 직장인도 명품시계를 많이 구입한다. 1000만원대 이하로, 명품시계 중에서는 비교적 저렴한 시계를 구입하는 이들은 돈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다른 데 쓸 돈을 아껴서 시계를 구입하는 진짜 매니아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의 명품시계 담당 바이어인 김신욱 대리는 “시계 구입을 위해 목돈을 마련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애완동물에게 밥을 주듯 매일 아침 명품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또 과거에는 시계의 외관만 보고 구입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제는 시계 안쪽에 있는 무브먼트(기계장치)에 관심을 두고 구매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들이 명품시계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각 백화점의 매출이 말해주고 있다. 롯데백화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명품시계 매출 증가율이 2009년에는 18%, 2010년에는 30.9%, 2011년 1월부터 7월까진 36.7%로 확대되었다. 그중 5000만원 이상 1억원 이하의 고가 시계 매출은 전년보다 20% 이상 증가했으며 고객 문의 또한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1억원 이상의 초고가 시계 판매율도 전년 대비 40% 이상 늘었다. 신세계백화점 역시 2008년 이후 매년 30%가 넘는 매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현대백화점도 2011년 8월 16일까지 명품시계 매출은 전년 같은 시기와 대비해 49% 신장했다고 발표했다.

한번 명품시계에 맛을 들인 사람은 두 번째, 세 번째 시계를 찾게 된다. 지난 8월 30일 에비뉴엘 명품시계 매장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남성은 “명품 구두나 가방은 일반 직장인들도 무리해서 돈을 모으면 살 수 있다. 그런데 시계는 아무나 살 수 없다. 중년이 젊은 사람들보다 더 멋있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시계다”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대표라고만 밝힌 이 남자가 이날 구입한 시계는 ‘브레게’였다. 브레게는 2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정통 스위스 시계 브랜드로 시계 하나의 평균 가격은 2000만~5000만원이다.

블랑팡 빌레레 미닛리피터 시계
블랑팡 빌레레 미닛리피터 시계

서울 압구정동에 사는 30대 후반의 전문직 남성 K씨. 6년 전 결혼 예물로 받은 롤렉스시계를 차고 다녔는데 최근 새로운 명품시계를 사고 싶어 안달이 났다. K씨는 “백화점에 갈 때마다 카드를 긁고 싶은 유혹을 참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40대 중반의 사업가는 “사업가라면 자신에게 맞는 시계를 선택할 줄 아는 안목도 지녀야 한다. 사업 때문에 처음 만난 파트너가 나와 같은 브랜드의 시계를 차고 있다면 일단 그 사람에게 신뢰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손목에는 예거 르쿨트르가 채워져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까르띠에나 롤렉스, 불가리 등에서 예물시계를 구입하기 위해 백화점 시계 매장을 찾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물 이후 두 번째 명품시계를 구입하기 위해, TV나 잡지 속 연예인이나 명사가 찼던 시계를 구입하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그 시계를 구입하기 위해, 그리고 세계에서 100개 혹은 200개만 한정 생산되는 시계를 구입하기 위해, 다시 백화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백화점의 시계 매출이 매년 평균 30% 정도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명품시계 담당 바이어부터 시계 브랜드 매니저와 홍보 담당자 그리고 시계 전문 기자들까지 모두 입을 모아 “대한민국의 시계시장은 아직은 시작 단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기존의 클래식 스타일이나 남성적 스타일의 스포츠 시계에서 나아가 퍼페추얼 캘린더(윤년까지 인식해 날짜를 표시하는 장치), 투르비옹(중력으로 인한 오차까지 잡아내는 장치) 등의 복잡한 기능이 탑재된 컴플리케이션 시계(다양한 기능이 첨가된 시계)의 수요가 늘어나는 성장기에 곧 들어설 것으로 그들은 예상한다.

롯데백화점의 선전포고

시계의 심장인 무브먼트부터 케이스·스트랩 등 시계 안에 들어가는 거의 모든 부품까지 자체 생산하는 몇 안 되는 시계 브랜드 중 하나인 예거 르쿨트르의 브랜드 매니저 이일환 부장 역시 “컴플리케이션 시계나 고가의 한정 생산 시계 등 나만의 시계를 찾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며 앞으로 국내에도 시계를 모으는 그룹이나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무엇보다 과거 2~3년간의 한국 시계시장의 성장률을 감안할 때 향후 국내 시계시장은 적어도 지금보다 7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며 핑크빛 전망을 내놓았다.

명품시계 매니아들의 증가에 맞춰 백화점들의 브랜드 입점 경쟁도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MD 개편에 들어간 백화점은 바로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이다. 2005년 오픈 당시 에비뉴엘에는 ‘크로노다임’이라는 시계 복합 매장이 있었다. 세계 3대 시계 브랜드 중 하나인 브레게 최초의 한국 매장 역시 에비뉴엘에 있었고, 이후 오데마 피게를 비롯해 장동건과 고소영의 예물반지로 유명해진 쇼파드(Chopard), 랑에 운트 죄네(A Lange & Sohne)까지 에비뉴엘은 대한민국 기계식 시계 열풍의 진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점 이후 몇 차례에 걸친 매장 개편을 통해 기계식 시계 브랜드를 입점시켜온 에비뉴엘은 2012년 상반기까지 시계 전문 매장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에비뉴엘 백화점 김신욱 대리는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는 롤렉스(Rolex)로, 기존 시계 편집매장인 크로노다임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롤렉스의 비중을 높일 예정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영국 런던의 매장을 벤치마킹해 국내 최고의 매장으로 탈바꿈할 준비에 한창이다. 스위스의 롤렉스 본사와 매장 도면에 관해 시시각각 의논하며 국내 최고의 시계 매장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새로워진 크로노다임 매장은 10월 말 오픈 예정이다”라고 말하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개점 당시 단독 부티크로 있다가 스와치그룹의 복합 매장인 ‘에콰시옹 두탕(Equation du Temps)’으로 자리를 옮겼던 브레게가 단독 매장을 오픈 준비 중이고 젊은 남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IWC와 25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 클래식 시계의 대명사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도 단독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고 설명했다.

제니스  ‘엘 프리메로 스트라이킹 10th’  1400만원
제니스 ‘엘 프리메로 스트라이킹 10th’ 1400만원

국내에 처음 론칭하는 ‘제니스(Zenith)’도 에비뉴엘에 첫 번째 매장을 연다. 제니스는 기존 크로노다임에서 판매하던 태그 호이어(TAG Heuer)와 브라이틀링(Breitling), 해리윈스턴(Harry Winston) 등의 브랜드를 함께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시계 편집 매장을 9월 말께 선보일 예정이다.

에비뉴엘의 이번 매장 개편의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개점 당시 최고 규모로 기계식 시계 판매처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에비뉴엘은 2009년 대대적으로 매장을 개편한 갤러리아와 본점·무역센터점·목동점 등 각 지점에서 각개전투처럼 일어난 현대백화점의 명품시계 브랜드 입점 경쟁에 비해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 부정출발로 아쉬움을 샀던 우사인 볼트의 시계로도 유명한 위블로(Hublot)도 에비뉴엘에 국내 최초의 단독 부티크를 열 예정이다. 2009년 10월에 국내 론칭한 위블로는 올해 작년 같은 기간 대비 200%의 매출 신장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시아 시장에서도 놀라운 증가 속도라 할 수 있다. 30대 후반부터 40대의 남성들이 주 고객층인 위블로가 강북에 첫 단독 매장을 여는 것에 대해 위블로의 브랜드 매니저인 장지선씨는 “에비뉴엘은 진정한 시계 애호가들이 찾는 국내 최고의 명품관이다. 유행에 민감한 고객들이 많은 강남과 달리 강북의 보수적 취향을 가진 고객들이 위블로를 선택한다면 의미있는 성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위블로는 에비뉴엘 단독 매장 오픈에 앞서 지난 8월 19일 문을 연 현대백화점 대구점에도 입점하면서 서울뿐 아니라 지방까지 매장을 확대했다.

현대백화점 “우리도 질 수 없다”

현대백화점은 압구정 본점뿐 아니라 무역센터점과 목동점 그리고 가장 최근에 오픈한 대구점까지 명품시계 시장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5월 무역센터점에 예거 르쿨트르(Jaeger Lecoultre) 매장을 낸 데 이어 8월 19일 오픈한 대구점에는 앞서 언급한 위블로를 비롯 크로노스위스(Chronoswiss)와 IWC, 바쉐론 콘스탄틴 등의 명품 시계 매장을 330m²(100평)나 내줬다. 명품시계에 대한 수요가 서울에 비해 현격히 적은 지방의 시장 규모를 볼 때 100평이라는 크기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현재 증축공사가 진행 중인 무역센터점은 공사가 마무리되는 9월 말에 맞춰 기존 260m² 안팎인 명품시계 매장 면적을 두 배 이상 키운 660m² 규모로 확대할 계획이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사업가와 금융업계 종사자 등이 주로 찾는 무역센터점은 기계식 시계 판매가 유난히 잘되는 곳으로, 증축에 따른 시계 브랜드 규모 확대는 당연한 수순이다.

현대백화점은 이에 앞서 지난해 압구정 본점을 리뉴얼하면서 브라이틀링, 태그호이어, 위블로, 율리스 나르덴, 크로노스위스, 파르미지아니 등 6개 브랜드를 추가 입점시킨 바 있으며 11월에는 현존하는 시계 브랜드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블랑팡(Blancpain)이 단독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신세계백화점 “진정한 명품을 보여주마!”

에비뉴엘의 예거 르쿨트르 매장
에비뉴엘의 예거 르쿨트르 매장

신세계백화점은 본점에 바쉐론 콘스탄틴과 IWC 매장을 지난 6월 7일 열었다. 파텍 필립(Patek Philippe), 브레게와 함께 세계 3대 시계 브랜드로 꼽히는 바쉐론 콘스탄틴과, 중장년층 남성에게 특히 인기가 높은 IWC가 신세계백화점에 오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브랜드 직영 매장이 아닌 ‘드로어써클(Draw a Circle)’이라는 시계 편집 매장 안에 오픈했다. ‘드로어써클’이란 이름은 모든 시곗바늘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오는 9월 23일 지하 1층의 공간을 확대해 율리스 나르덴(Ulysse Nardin), 자케 드로(Jaquet Droz), 예거 르쿨트르를 추가로 입점시킬 예정이다.

드로어써클은 국내 최초의 시계 전문 온라인 커뮤니티인 ‘타임포럼’을 다년간 운영해 온 김인식 대표가 운영한다. 오픈 당시 업계의 관심을 받은 드로어써클은 내년 상반기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매장을 한 개 더 열 예정이다. 김 대표는 “지금은 낯선 드로어써클의 이름을 시계 애호가들뿐 아니라 일반 고객에게도 익숙하게 하기 위한 마케팅을 준비 중이다. ‘드로어써클’을 싱가포르의 ‘아워글라스(Hourglass)’나 미국의 ‘토너(Tourneau)’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계 편집 매장으로 키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명품시계 브랜드로 꼽히는 롤렉스도 8월 25일 신세계 영등포점에 국내 10번째 공식판매점 ‘카이로스(Kairos)’를 오픈하면서 서울 서남부 지역과 영등포역을 오가는 지방 고객까지 공략하고 있다. 위블로를 비롯해 신세계백화점 지점 중 명품시계 브랜드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강남점 역시 내년 상반기 명품시계 매장을 2배 넘게 확장할 계획을 밝혔다.

갤러리아 “우린 히든카드가 있다”

에비뉴엘과 현대, 신세계에 비해 갤러리아백화점은 2011년 하반기 대대적인 브랜드 재조정 계획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시계업계가 갤러리아백화점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파텍 필립의 정식 매장이 오픈하기 때문이다. ‘롤스로이스급 시계’로 종종 비유되는 파텍 필립은 자타공인 최고의 시계 브랜드로 그동안에는 소공동 롯데호텔에 있는 시계 매장에 쇼파드와 함께 판매되고 있었다. 일절 언론 홍보나 마케팅 활동 없이 소극적으로 시계만을 판매하던 파텍 필립이 쇼파드의 국내 정식 리테일러인 우림FMG를 통해 갤러리아백화점에 단독 매장을 개점한다는 소식은 시계 애호가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여러 정황을 미루어 봤을 때 백화점의 시계전쟁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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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프리랜서·전 에비뉴엘 패션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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