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초청 국빈 만찬이 열린 백악관 이스트룸. ⓒphoto AP·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 초청 국빈 만찬이 열린 백악관 이스트룸. ⓒphoto AP·연합뉴스

미국 동부 시간으로 10월 13일 오후 6시 30분부터 시작된 이명박 대통령 초청 백악관 국빈 만찬은 버락 오마바 대통령으로서는 다섯 번째, 역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로 치러진 행사다.

만찬 메뉴의 구체적인 내용은 만찬 시작 1시간 전에 공표됐다. 워싱턴포스트와 요리·포도주 매체들은 곧바로 ‘호외’로 메뉴를 알려줬다. 국빈 만찬은 워싱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다. 국빈 만찬에 초대되는 사람은 양국 관계에서 가장 파워가 있는 실세를 의미한다. 전부 230여명이 초대됐지만 양국 간의 각료를 뺄 경우 초대객은 180명 정도에 불과하다.

만찬 파티가 부부 동반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90명이 리스트에 올라간다. 90명 안에 들어가기 위한 온갖 로비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만찬을 들러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갔다’는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초대장은 만찬 하루 전날 개인적으로 전달된다.

이번 국빈 만찬은 보통 때처럼 세 코스로 이뤄졌다. 미식 대국 이탈리아나 프랑스 대통령이 올 경우 4개, 또는 5개 코스가 나온 적도 있지만 3개 이상은 예외적이다. 먼저 처음 나온 것은 호박죽이다. 한국식 요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꿀을 바른 크랜베리(Craneberry)와 버지니아 특산 햄, 호박씨앗, 크렘프레시(Crme fraiche)가 호박죽 안에 녹아들어가 있다. 크랜베리는 신맛이 강한 열매로 작은 앵두를 연상하면 된다. 원래 성스러운 동물인 학(crane)이 좋아하는 열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크렘프레시는 신맛을 내는 프랑스 스타일의 버터라고 보면 된다. 30% 가까운 지방을 가지고 있어 한국인이 먹으면 위에 부담을 느낄 만한 무거운 재료다.

70세인 이 대통령의 나이를 감안하면 아무것도 없이 그냥 호박죽만 녹여서 먹는 것이 가장 먹음직스럽게 느껴졌을 듯하다. 불필요한 재료를 너무 많이 넣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세 개 코스 가운데 백악관이 가장 신경을 써서 만든 요리가 아닐까라고 판단된다. 요리에 사용된 재료의 대부분이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경작한다는’ 백악관 밭에서 수확된 것이기 때문이다. 1주일 전 미셸이 수확에 나설 때 모습은 거의 생중계에 가깝게 미국 전역에 보도됐다. 호박, 크랜베리, 꿀, 호박씨앗 모두가 정원에서 수확됐다. 아마 식사 도중 오마바가 자신의 부인 자랑을 이 대통령에게 열심히 했을 것이다.

메뉴에 일본어 표기

두 번째 코스가 나왔을 때 한국인 손님들의 기분은 아마 별로였을지도 모른다. 특히 한식 세계화에 힘을 쏟고 있는 김윤옥 여사의 경우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쌀식초를 조금 넣고 꽁치의 사촌쯤인 케퍼린 생선의 붉은 알(卵)이 실린 밥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 음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일본 초밥의 범주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작은 생선 알로 뒤덮인 ‘캘리포니아롤’이라 불리는 초밥을 연상하면 된다. 케퍼린이 아니라 아예 ‘마사고(Masago)’란 영어로 표기한 일본식 발음의 단어가 메뉴 속에 있고, 초밥 옆에 담긴 얇게 썬 무 샐러드도 메뉴에 ‘다이콘(大根)’이란 일본식 발음으로 명기돼 있다. 다이콘이 아닌 영어로 화이트 래디시(White Radish)라 불렀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미련이 남는다. 일반적으로 무가 미국인 사이에서 다이콘이라 불린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어인 케퍼린 대신 마사고를 메뉴 속에 명기한 것은 국무부 한국담당관과 백악관 의전팀의 ‘심각한’ 실수라고 볼 수 있다. 오바마를 한국 청와대에 초대해 메뉴 속에 아메리칸파이가 아닌 잉글리시파이라는 이름의 음식을 제공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일왕을 백악관에 초대해 오사케(お酒)가 아닌 소주(Soju)라는 술을 대접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세 번째 메인요리로 등장한 것은 텍사스 쇠고기 스테이크다. 생강과 오렌지를 섞은 소스도 마련했다. 스테이크 요리 옆에는 케일과 호박을 약하게 불에 익혀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카우보이 텍사스가 자랑하는 최고의 쇠고기를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악관은 두 번째 코스요리 때와 똑같은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쇠고기를 ‘와규(和牛)’, 호박을 ‘가보챠(カボチャ)’라는 일본 발음으로 메뉴에 올렸기 때문이다. 와규는 맥주를 마시면서 먹는 방목되는 소고기로, 연하고 부드러워 일본 최고의 쇠고기로 꼽힌다. 텍사스 거주 일본인들이 일본 품종을 들여와 기른, 미국에서 가장 비싼 쇠고기가 텍사스 와규이기도 하다. 보통보다 값이 3~4배 비싸다. 고급스럽고 맛있는 요리지만, 만찬장의 한국인들에게는 정답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요리장은 필리핀 출신

현재 백악관의 요리장은 2005년부터 일하고 있는 필리핀 출신 크리스테타 코메르포드(Cristeta Comerford)이다. 필리핀인 모두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로, 1962년 마닐라에서 태어나 요리사로 일하다가 23세 때 미국으로 건너왔다. 어느 정도 미국 요리에 익숙하겠지만, 기본은 필리핀 맛이다. 미각은 보통 6세를 전후해 결정된다고 한다. 아무리 서구화됐다 하더라도 강한 향신료를 기반으로 한 필리핀 요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005년부터 백악관에서 일하게 된 것은 텍사스 출신으로 강한 맛을 즐기는 부시의 입맛을 만족시켜 줬기 때문이다. 필리핀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음식은 일본 음식의 한 부류로 보여질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일본 요리는 최고급 요리로 인식되고 있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한국 대통령 부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고급 재료를 쓴다는 의미에서 일본 이름의 메뉴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선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수를 넘어 결례까지 간 것이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 초청 백악관 만찬 때도 후 주석의 자리번호를 중국인들이 꺼리는 4번으로 배정했다가 나중에 중국대표단이 정식 항의한 일이 있었다.

디저트는 초콜릿과 배

디저트로는 초콜릿과 얇게 썬 배가 제공됐다. 입에 넣으면 부서지는 얇은 엿 같은 느낌을 주는 아몬드가 버무려진 브리틀(Brittle)도 나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백악관 국빈 만찬 때 나왔던 금강산을 모티브로 한 큰 복숭아 디저트와 달리 간단하고 적은 양으로 제공됐다. 백악관의 수석 파티셰는 2007년부터 일해온 윌리엄 요세스(William Yosses)다. 뉴욕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인 불리(Bouley)에서 일하다가 백악관으로 스카우트됐다. 불리는 음식보다 각종 디저트와 빵이 더 유명한 곳이다. 단맛이 강하고 버터가 많이 들어간 무거운 맛의 디저트라는 기억이 남아 있다. 얇게 썰어놓은 배가 어느 정도 입맛을 개운하게 해줄지 모르지만, 분위기만이라도 위에 부담을 덜어주는 디저트였으리라 판단된다.

만찬 메뉴는 전체적으로 미셸 오바마의 정원에서 자란 채소와 미국 최고의 재료를 섞은 건강식으로 차려졌다. 직접 요리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기농 자연산 채소를 즐기는 미셸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요리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워싱턴 1급 레스토랑에서 만들 경우, 3개의 만찬 코스와 디저트의 가격은 어느 정도나 될까? 추측하건대 대략 1인당 100달러 수준이 아닐까 판단된다. 유기농 야채와 와구만으로도 이미 60달러가 넘을 수 있다.

이번 국빈 만찬에서 한 가지 불만은 포도주다. 메뉴에 ‘요리에 맞게 미국산 포도주가 제공될 것’이란 설명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준비됐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곧 밝혀지겠지만,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행여 과음할까봐 걱정이 돼 적당히 넘어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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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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