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원작을 사서 읽었다. 독서력이 지극히 떨어지는 필자이지만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원래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데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을 모니터하려고 기다리다가 우연히 ‘해품달’ 첫회를 시청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에 매료됐고 지금은 수요일·목요일 밤마다 만사를 제쳐두고 본방사수하게 됐다.

그런데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이 절체절명의 클라이막스에서 이제 뭔가 제대로 일이 벌어질 만하면 화면이 멈추고 음악과 함께 끝나버린다. 맛뵈기로 보여주는 다음주 예고도 애간장만 더 태울 뿐이다. 결국 다음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아예 책을 구입했다. 책장은 또 얼마나 빨리 넘어가던지 읽으면서도 안타까웠다. ‘벌써 이만큼 읽었네. 얼마 안 남았네. 아껴서 읽어야 하는데….’ 다음 장이 궁금하니 읽기를 멈출 수가 없고 줄어드는 페이지에 마음이 불편했다. 진정한 먹보는 빵을 울면서 먹는다고 한다. 한 입 먹으니 너무 맛있지만 한 입만큼 줄어든 빵을 보고 슬퍼서 울고 또 한 입 먹고 작아진 빵을 보고 또 울고. ‘해품달’을 읽는 내가 그런 꼴이었다.

시시할 것 같지만 결론을 다 알고 드라마를 보는 맛도 쏠쏠하다. 우선 마음이 편해진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 또 어떻게 사랑이 이뤄지는지 알기에 ‘저러다 주인공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며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 또한 ‘저 부분은 원작이 더 나은데’ ‘저 배우 연기가 달리네’ ‘소설엔 없는 걸 기발하게 표현하네’ 하면서 혼자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고 책을 안 읽으면 미처 알아채지 못할 복선과 행간을 읽는 맛도 있다.

‘해품달’이 시청률 40%를 넘어서며 국민드라마 반열에 들어섰다. 성인배우들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안겨주고 떠난 명품 아역 연기자들은 차세대 주자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주인공 이훤 역할을 맡은 김수현은 여성 시청자들을 ‘훤앓이’로 빠져들게 만들며 CF 몸값을 두 배 이상 끌어올렸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정은궐 작가의 원작소설도 방송 전보다 열 배 이상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 1위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방송국 안에서는 광고시장 최고 불황기인 1월에도 CM 완판으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보통 사극은 역사적 사실(fact)에 작가적 허구(fiction)가 결합한 ‘팩션(faction)’의 형식으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재현하지만 ‘해품달’은 처음부터 100% 픽션이다. 역사에는 없는 ‘이훤’이란 가상의 왕을 설정하고 사랑이야기를 풀어간다. 역사적 배경이나 인물에 얽매이지 않다 보니 전개도 자유롭고 말랑말랑해질 수 있다. 여기에 만화 같은 판타지와 보는 눈을 훈훈하게 해주는 꽃도령들의 비주얼을 버무린다. 그러다 보니 사극엔 관심 없던 여성 시청자와 10대 청소년까지 TV 앞으로 불러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제 정통 사극보단 해품달류의 ‘로맨스 사극’이 대세가 됐다.

특히 ‘해품달’이 시청자들의 절대지지를 받는 것은 ‘역경극복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훤과 연우(한가인 분)가 사랑 좀 하겠다는데 왜 이리 훼방꾼들이 많은지. 상상 가능한 방해 장치가 총동원된 듯하다. 왕실의 권력싸움에 연우는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같은 편이라 믿었던 사람들은 죽거나 악의 축과 한 패가 된다. 액받이 무녀의 신분으로 왕과의 사랑도 시작부터 고생길이 훤히 내다보인다. 그나마 사랑의 떡잎이 싹트고 기억이 되살아나려는 찰나 새로운 태클이 걸린다. 연우를 둘러싼 배다른 형과의 삼각관계도 골치인데 여기에 또 호위무사까지 뛰어든다. 도대체 이뤄질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사랑을 원천봉쇄해 놓고 ‘이래도 계속 사랑할 테냐?’ 으르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이런 역경 종합선물세트에 굴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장벽을 극복해 나가는 주인공들의 사랑에 시청자들은 감동받고 전폭적 응원을 보낸다. 폭풍 앞에 불씨는 꺼져가도 다시 되살아나리란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힘. ‘해품달’의 인기 비결이다.

‘쿨한 사랑’이 멋져 보이는 요즘이다. 주위에선 사랑에 목숨 걸지 말라고 한다. 상처받기 쉽기 때문이다. 집착하면 찌질해 보이고 첫사랑에 연연하면 못나 보인다. 하지만 사랑이 쿨해질수록 ‘해품달’ 같은 사랑이 그리워진다.

권석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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