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8일 인천 앞바다의 미해군 수송선. 상륙을 기다리는 미육군 7사단 병사들과 카투사들이 빼곡하게 갑판 위에 있다. 해병대 선도 부대가 9월 15일 상륙작전에 성공한 뒤라 여유가 있어 보인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1950년 9월 18일 인천 앞바다의 미해군 수송선. 상륙을 기다리는 미육군 7사단 병사들과 카투사들이 빼곡하게 갑판 위에 있다. 해병대 선도 부대가 9월 15일 상륙작전에 성공한 뒤라 여유가 있어 보인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지난 5월 26일자 조선일보를 받아든 독자들은 1면 사진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집 떠난 지 62년…. 2만㎞를 돌아온 귀향’이라는 제목 아래 유엔 깃발이 그려진 직사각형 상자 9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공군 특별기편으로 5월 25일 성남 서울공항에 안착한 유해 12구였다. 사진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북한 땅에 집단 매장됐던 국군 전사자 유해 12구가 25일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북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것은 1953년 휴전 이후 처음이다. 이들의 유해는 북한에서 미군 유해발굴 작업을 하던 미국이 하와이로 이송해 DNA 감식을 통해 6·25전쟁 당시 미군에 배속된 한국 군인인 카투사(KATUSA)로 최종 확인됐다. 12인의 국군용사는 전사한 지 62년 만에 약 2만㎞의 여정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영면에 들게 됐다.’

카투사를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카투사가 6·25전쟁 때 미군과 함께 북한군과 맞서 싸우다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매우 드물다.

이 기사는 카투사들이 전사한 북한 땅이 바로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수많은 카투사가 죽어갔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정말 극소수다. 유해 12구 중 김용수 일병과 이갑수 일병의 유해만이 신원이 확인됐다.

카투사는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과의 합의에 따라 만들어졌다. 6·25전쟁 3년 동안 4만3000여명이 참전했고, 이 가운데 9000여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1950년 8월 15일, 한·미 카투사 합의

기자가 6·25전쟁 당시 카투사들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은 부산UN기념공원에서였다.(주간조선 2011년 5월 2일자 보도) 부산UN기념공원 상징묘역에 가면 카투사 묘 36기가 있다. 이들은 모두 1950년 9월 2~10일에 경남 창녕과 영산 일대에서 사망했다. 경남 창녕과 영산은 낙동강 유역. 카투사들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다 북한 공산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미군 소속이다 보니 국립묘지 대신 부산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미육군 7사단 카투사들이 1950년 8월 23일 일본 후지산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미육군 7사단 카투사들이 1950년 8월 23일 일본 후지산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1950년 7월 말, 이미 대한민국의 국토 대부분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부산에 임시수도를 정한 우리 정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치고 결사항전을 치르고 있었다.

카투사가 되는 경로는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산에 있던 육군보병학교 등에서는 전선에 내보낼 단기 초급장교를 모집해 훈련시키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이와 함께 학도병을 포함한 일반병을 모집해 간단한 기초훈련을 시킨 뒤 낙동강 방어선 일대로 내보냈다. 일단 초기의 카투사는 부산에서 군에 지원한 일반병 중에서 무작위로 선발되어 미군에 배속했다.

지난 5월 25일 대한민국에 유해가 되어 귀향한 이갑수 일병은 1950년 당시 34세였다. 당시 이갑수는 결혼해 처자식이 있는 상태로 부산에서 입대했다. 이갑수가 군에 들어갈 당시 딸 숙자는 일곱 살, 아들 영찬은 세 살이었다. 현재 딸 숙자는 69세, 아들 영찬은 65세다. 영찬씨는 경남 양산에 산다. 영찬씨는 전화통화에서 “세 살 때 일이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를 통해 이갑수 일병의 가족사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미육군 7사단 17연대 병사들과 카투사들이 1950년 11월 21일 압록강변 국경도시인 혜산진에 들어가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미육군 7사단 17연대 병사들과 카투사들이 1950년 11월 21일 압록강변 국경도시인 혜산진에 들어가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이갑수는 1917년 경남 창령에서 났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의 한복판. 조부 이천계는 아들 둘(갑수·종수)과 딸 하나(석남)를 두었다. 조부는 솔가해 창령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한동안 살았다. 광복 이후 조부는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부산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이갑수는 일본에서 결혼했다.

부산에 살 때 북한이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켰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딸 숙자는 아버지를 기억했다. 숙자씨는 “비가 오면 길이 진흙탕이 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출근길에 나를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셨다”면서 “그때 아버지 등에 업혀 느꼈던 온기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갑수는 8월 16일 군에 입대하자마자 미 7사단 카투사로 배속됐다. 미 7사단은 일본 패망 이후 일본에 주둔하는 일본 점령군이었다. 갑작스러운 한국 파병 결정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 한 명당 한국군 한 명을 붙여주는 ‘버디 시스템(buddy system)’을 고안해냈다. 이게 카투사였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미군이 작전을 수행하려면 한국 물정과 한국어를 하는 병력이 필요했다.

미 7사단과 함께 인천 상륙

미육군 7사단과 카투사들이 1950년 10월 29일 함경남도 이원항에 상륙하기 위해 해군수송선에서 상륙정으로 옮겨타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미육군 7사단과 카투사들이 1950년 10월 29일 함경남도 이원항에 상륙하기 위해 해군수송선에서 상륙정으로 옮겨타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당시 미 7사단은 일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카투사들은 후지산 산록에서 기본 훈련을 받았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8월 16일부터 24일까지 부산항에서 요코하마항까지 미군함을 타고 이동한 카투사는 총 8600명에 달한다.

카투사가 일본에서 훈련을 받은 사실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월드피스자유연합(WPF·이사장 안재철 02-701-4548)이 지난 5월 펴낸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이라는 사진자료집에 들어 있다. 이 사진 자료집에는 미국 종군기자가 촬영한 6·25전쟁 초기부터 종전까지의 사진 1150여점이 실려 있다. 재미동포인 안재철 이사장은 워싱턴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6·25전쟁 사진 2만여점을 구해 이 중 일부로 2008년 ‘생명의 항해’라는 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생명의 항해’는 흥남철수작전의 전후를 다룬 책이다. 안 이사장은 ‘생명의 항해-6·25전쟁 사전전’을 4년째 전시 중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철수한 미군이 북한의 피란민 1만4000여명을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태워 남쪽으로 피란시킨 사건을 다룬 게 ‘생명의 항해’다.

일본 후지산 근처에서 카투사 장병이 훈련받는 사진은 1950년 8월 23일에 촬영한 것이다. 사진 설명은 이렇게 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이 일본 후지 기지에서 미 육군 7사단 소속 병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고 있다.’ 국군들은 제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고 두발 모양도 제각각이다. 군인들 뒤로 야전막사들이 보인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도 있다.

같은 카투사라도 입대 시기에 따라 배속된 미군 부대가 달랐고, 이와 함께 운명도 바뀌었다. 앞서 부산UN기념공원에 있는 카투사 31명은 모두 9월 2~10일 사이에 낙동강 전선에서 사망했다. 이들은 8월 25일 이후 카투사에 배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기초훈련을 받은 뒤 미 2·24·25보병사단과 미 1기갑사단에 배치되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다.

1950년 12월 6일 살아남은 미보병 7사단 31연대 병사들과 카투사들이 장진호를 떠나 흥남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1950년 12월 6일 살아남은 미보병 7사단 31연대 병사들과 카투사들이 장진호를 떠나 흥남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미 7사단에 배속된 한국군은 9월 15일에 결행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부산에서 일본으로 갔다가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김용수 일병과 이갑수 일병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들어온 카투사였다. 당시 카투사는 대부분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미 7사단과 카투사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사흘 뒤인 9월 18일 인천 앞바다. 모함과 수송선이 수십 대 떠 있다. 그중 한 대의 수송선에는 미군과 한국군이 빼곡하게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한국군은 모두 군번이나 계급장 같은 게 달려 있지 않았다. 안재철 이사장은 사진 설명을 이렇게 달았다. ‘1950년 9월 18일 인천상륙작전 때의 미육군 보병 7사단 병사들. 미육군 7사단에는 한국인 병사인 카투사의 비율이 50%를 차지했다.’

미 7사단과 함께 인천에 상륙한 카투사는 서울을 탈환하면서 북으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이어 10월 19일 평양을 해방시켰다. 11월 21일 압록강변의 혜산진과 초산까지 쳐올라가게 되었다.

부산 동해→이원항 투입 카투사도

6·25전쟁 참전 용사 이정환(79)씨는 황해도 연백 출신이다. 이씨는 1950년 8월 23일 17세로 부산에서 입대해 제1기병사단 카투사로 배속됐다. 이씨는 부산에서 대구 전선으로 갔다가 수원·서울·개성을 거쳐 운산까지 진출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의사 이용각(1924년생)은 나이 스물여섯. 경성의전을 졸업한 이용각은 이화여대 의대 강사로 있으면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용각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강 다리가 끊겨 피란을 가지 못한 채 경기도 안양의 고향 집에 숨었다. 마루 밑에 굴을 판 뒤 그곳에 동생과 함께 몸을 숨겼다. 인민군의 징집을 피하려 세상과 단절된 채 3개월간의 두더지 생활을 했다. 어느 날 만세 소리가 마루 밑 지하땅굴까지 들렸다. 미군이 들어온 것이다. 공산치하로부터 해방이었다. 이용각은 드디어 땅굴에서 나왔다. 그는 안양천에 자리 잡은 미군을 찾아갔다. 미 7사단 32연대 1대대였다.

1950년 12월 8일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서 철수하면서 병사들이 미해병·영국해병·카투사들의 시신을 임시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1950년 12월 8일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서 철수하면서 병사들이 미해병·영국해병·카투사들의 시신을 임시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용각은 공산군을 격퇴하겠다는 일념으로 종군을 희망했다. 32연대 1대대 의무장교를 찾아갔다. 1대대에는 카투사들이 있었다. 나바르 대위는 이용각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 군복과 의무마크를 달아주고 M-1소총을 주었다. 나바르 대위는 한국군 부상병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게 의사 이용각이 카투사 의무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순간이었다.

이후 이용각은 32연대 1대대와 행동을 같이했다. 안양에서 서울을 거쳐 다시 부산으로 갔다. 이용각은 부산 수영만에 정박한 미군함에서 한 달간 머물며 부상병을 치료했다. 그러던 어느날 32연대를 태운 함정은 하루 동안 항해해 함경남도 이원항에 도착했다.

이것은 당시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는 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내륙으로 진격한 경로와 부산에서 동해를 가로질러 직접 이원항으로 투입된 2개의 루트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최전선의 하나였던 장진호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자. ‘생명의 항해’와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에 기록된 장진호 전투 상황을 압축한다. 유엔군이 평양을 거쳐 북쪽 압록강을 향해 진격해오자 중국은 10개 사단 병력(약 30만명 추정)을 압록강변에 배치해놓고 있었다. 중국 공산군의 참전 명분은 항미원조(抗美援朝)였다.

11월 27일 중공군 기습 공격

미육군 7사단 31연대 생존병사들로 구성된 임시대대 병사들과 카투사들이 1950년 12월 14일 흥남항에서 상륙선을 타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미육군 7사단 31연대 생존병사들로 구성된 임시대대 병사들과 카투사들이 1950년 12월 14일 흥남항에서 상륙선을 타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장진호 주변에 배치된 미군은 미해병 1사단, 미육군 7사단 2개 대대, 영국해병 41 코만도였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하는 길은 장진호 서안과 장진호 동안을 따라 난 길뿐이었다. 미 10군단 지휘본부는 미해병 1사단은 장진호 서안으로, 미육군 7사단은 장진호 동안을 통해 각각 압록강까지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미 10군단 지휘부는 중공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을 넘어 유엔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 산악도로 주변의 산악지대에 병력을 매복시켜 놓고 있었다. 11월 27일 밤, 중공군은 미육군 7사단 32연대 1대대를 기습 공격했다. 장진호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엔군은 병력 면에서 열세, 중공군에 괴멸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엔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막아냈다. 장진호 전투는 ‘치열한’이란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한 전투였다. 당시의 전투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종군기자 덩컨이 찍은 사진이다. 미 해병대원들이 긴 파카를 입고 더부룩한 수염에 고드름을 단 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피로로 지쳐 악몽을 되새기며 걸어가는 모습이다. 덩컨 기자는 이 사진으로 1950년 최고의 사진상을 수상했다. 12월 1일 유엔군에 철수명령이 떨어졌고, 유엔군이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은 12월 3일이었다. 모든 게 불리한 상황 속에서 중공군과 싸우며 철수하는 작전이었다.

유엔군이 바람 찬 흥남부두에 도착한 것은 12월 13일. 17일간의 전투는 끝이 났다. 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 1만5000명 중 3000명(카투사 875명 포함) 이상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최소 유엔군 희생자의 10배 이상이 전사했으며 그 수는 최소 3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흥남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 북한 피란민이 무작정 따라나섰다. 흥남부두는 민간인과 군부대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흥남철수 작전 당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1만4000명을 구출한 기록은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 기록이다. 이 사실은 안재철 이사장에 의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로 시작되는 유행가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지어졌다.

카투사로 참전한 이정환씨는 6·25 전쟁에서 카투사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추적하다가 장진호 전투에서 카투사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씨는 수년간 미국의 장진호 전투 참전자 단체와 관계를 맺어왔다. 이씨는 여러 경로를 통해 장진호 전투의 카투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녹취해 ‘장진호 아리랑’(가제)이라는 원고를 완성했다. 이 원고는 현재 출판사에서 원고를 다듬고 있다. 제목을 ‘장진호 아리랑’이라고 붙인 이유는 카투사들이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철수작전을 하면서 민요 ‘아리랑’을 불렀다는 데서 착안했다.

미해병 1사단 5연대·7연대 병사들이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11월 29일 장진호 서안 유담리에서 남단 하갈우리로 철수하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미해병 1사단 5연대·7연대 병사들이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11월 29일 장진호 서안 유담리에서 남단 하갈우리로 철수하고 있다. ⓒphoto 월드피스자유연합

미국 재향군인회에는 장진호 전투 모임이 여러 개 있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장진호 해병대 모임도 따로 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인에 의해 책으로 여러 번 저술되었다. 참전 해병대원 마틴 러스가 1957년 ‘어느 해병대원의 전쟁일지’를 발표했고, 2004년에는 ‘브레이크 아웃’을 출간했다. ‘브레이크 아웃’은 나남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했다. 장진호 전투는 현재 미국에서 에릭 브레빅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2년 말 개봉 예정인 영화의 제목은 ‘혹한의 17일(17 Days of Winter)’.

한때 장진호 전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의 가장 굴욕적인 전투라는 평가가 있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혹한의 추위 속에 유엔군은 17일간 장진호 주변에서 사실상 중공군을 괴멸시켰다. 이로 인해 중공군의 중동부 전선 남하가 지연되었다. 중공군의 최종 진격 목표는 부산이었다. 그 장진호 전투에 카투사 875명이 피를 뿌렸다. 그중 열두 명의 유해가 이번에 대한민국 땅을 밟은 것이다.

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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