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스페셜 리포트]  진보진영은 왜 지젝에 환호하는가
  • kakao 플러스친구facebooktwiteryoutube
  • 검색
  1. 사회/르포
[2213호] 2012.07.02
관련 연재물

[스페셜 리포트]진보진영은 왜 지젝에 환호하는가

박용준  국제 인문학 잡지 ‘INDIGO’ 편집장 

▲ 지난 6월 28일 건국대에서 강연 중인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6박7일간의 서울 방문을 마치고 6월 30일 떠났다. 여러 대학에서 일반 학생을 만나 강의를 했고, 출국 하루 전날에는 필자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을 만나 대담을 했다. 실시간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 “이 시대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라는 수식어가 틀리지는 않다. 한 인문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2000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상가 중 맨 앞줄에 있는 이가 바로 슬라보예 지젝이다. 한국어로 된 지젝 관련 저서가 50권이 넘으니, 그는 분명 한국 지식계에서 ‘떠오르는 스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유럽의 기적”이자 “세계 최고의 석학”이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은 과연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지젝에게 열광하는가.
   
   6월 27·28일 양일에 걸쳐 열린 지젝 초청 강연장에는 1000명이 넘는 20·30대 젊은이가 자리를 가득 메웠다. 지젝의 강연이 끝난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해법, 폭력에 대한 독특한 관점, 나아가 젊은이의 소명과 의무 등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지젝과의 지난 인터뷰 경험에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그는 질문 하나하나에 성실히 대답해주었고, 답변 또한 재치 있으면서도 예리했다.
   
   ‘어려운 시절’(찰스 디킨스)일수록 따뜻한 인간적 가치가 간절히 그립기 때문인가. 취업 경쟁과 실업난으로 삶의 가장자리까지 몰린 청춘들의 질문 근저에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묻어났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해야 한다. 스스로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할 수 없는지를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시도는 고통스럽겠지만, 삶을 위한 유일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래, 인문학은 곧 인간학이고, 이는 생에 대한 모든 것이다.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는 지젝에게도 삶은 투쟁의 현장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세계 석학들의 방한이 잦아지면서 청춘들이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국이라는 국경을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 사유하고 전 지구를 삶의 무대로 삼아 꿈을 펼쳐볼 기회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만남의 순간까지도 생의 긴장을 절대 놓치지 않도록 만든다. “우리의 만남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진짜 의미는 내가 한국을 떠난 이후에 찾아올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이 인문학자 지젝이 갖는 묘한 매력 중 하나다.
   
   
   지젝의 삶과 철학
   
   지젝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1972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파리 제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사상사적 궤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예술과 문화에 대한 비평, 둘째 전 지구적 정치·경제 사안에 대한 비판, 셋째 헤겔, 라캉, 마르크스의 사상을 접목한 자신만의 독특한 순수이론철학이다. 흔히 지젝은 할리우드 영화 비평이나 이데올로기 비판 등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작업들을 지젝 스스로는 ‘부수적인 피해물(collateral damages)’로 간주한다.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 본인이 진정 하고자 하는 작업이란 헤겔과 라캉 그리고 마르크스를 거쳐 양자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고전적인 철학의 제스처를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맞게 복원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지젝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순수이론철학이라기보다 독특한 삶의 행보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고, 1990년 옛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후 슬로베니아 첫 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한 지젝. 자신을 스스로 ‘괴물’로 묘사하고 있듯, 참여적 지식인이라든가, 위대한 사상가라든가, 그 어떠한 종래의 규정도 지젝이라는 인물을 정의 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형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은 어떤 중심으로 수렴하는 법”(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다. 지젝은 시대를 진단하는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한순간도 잃지 않는다. 다시 말해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와 대중문화를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시대가 직면한 모순을 이론 투쟁의 이름으로 돌파한다. 당대가 처한 새로운 상황의 고유한 현 상태를 철저하게 사유하는 것,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세계의 실재적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 의미 있는 파열음을 남기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정신까지도 물신주의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우리 사회에서 지젝을 읽는, 또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젝은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슬로베니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보낸다. 브라질, 미국,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한국 등 그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집트 타흐리르광장부터 북한의 평양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이 지젝에게는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진다. 그렇기에 지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너’와 ‘내’가 하나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오르게 되는 묘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또한 지젝 사유의 근본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꿈꾼다. 넘쳐나는 파국과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에 흔들리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지젝은 이데올로기와 시스템의 변화뿐 아니라, 개인적 삶의 윤리와 욕망까지를 함께 아울러 말을 건넨다. “넘쳐나는 파국론을 말하는 자들의 비극적 진단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되, 그것에 현혹되어 그릇된 죄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냉정을 유지하면서, 늘 깨어 있을 것. 이것이 중요하다. 역사의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공동선을 향한 공동 투쟁
   
   지젝의 철학적 입장, 혹은 사유의 지평을 일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세계의 치명적 급소, 다시 말해 골조물의 이음새 부분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그의 치열한 이론 투쟁이 향하고 있는 하나의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의 것(the commons)’을 향한 투쟁이다.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란 제목으로 작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주코티공원에서의 한 월가 점령 시위 연설문에서 그는 “생태계 및 자연이라는 공동의 것, 지적재산권이 사유화한 공동의 것, 유전공학으로 대변되는 기술 과학이라는 공동의 것”이 바로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우리 삶의 근본 조건을 위협하는 본질적이고 거대한 문제들에 공동으로 직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의 것’은 우리의 정치적 의제로 설정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사안에 대한 어떠한 결정권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이것이 주요한 문제 지점이다. 그렇기에 지젝은 우리로 하여금 사적 영역을 침해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을 표하기 전에, 공적 영역을 박탈당한 사실에 먼저 분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한·미 FTA도, 인천공항 매각도, 한·일 군사정보협정도 모두 버젓이 비공개 밀실 통과를 거치고 있음에도 시민은 무력하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일상화가 우리에게 새로운 민주주의의 세상을 열어주었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빈 공간’(프랑스의 민주주의 이론가 클로드 르포르)을 군사독재, 언론 탄압, 부패한 시장과 권력 등에 점유당한 불행한 시대를 겪었고, 여전히 이 단계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분석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추동할 수는 있지만 이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지젝의 지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 지난 6월 28일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열린 지젝 강연회.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속한 시민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법과 질서와 정책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고 기본이다. 그렇기에 지젝이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의 사례를 빌려 말하는 ‘슬럼의 정치화’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혁명의 실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사안들에 대해 공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갖고, 근본적으로 공동의 결정을 내리며, 능동적인 협력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복원이라는 과제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결국, 실천적인 공동 투쟁의 모습이란 도덕적 다수가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정착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동선이라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번 지젝의 한국 강연 제목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한 소명’에 등장하는 공동선은 2010년부터 인디고 연구소(InK)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로서, 자본주의의 환영이 양산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즉 전근대적인 차별정책보다 더 교묘하고 은밀해진 장벽과 배제의 간극을 돌파하는 하나의 이념적 지표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좋음과 세상의 옳음이 맞닿을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보편적인 정치윤리적 질서와 만나 어떠한 사회질서와 구조를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자, 공동의 삶의 윤리와 양식을 새로이 기획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공백의 시대를 살아가기
   
   그렇다면 혁명은 언제 오는가. 이것은 혁명의 시대를 관통한 후 다시 고통의 세계를 살아가는 세계시민들의 영원한 물음이다. 2011년 우리는 튀니지에서, 이집트에서, 리비아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마주했다. 하지만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대로 우리는 또 다른 난국을 맞이하고 있다. 즉 정치와 권력 사이의 더욱 깊어지는 공백. 여기서 ‘정치’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고 또 지향하는가에 대해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의미하고, ‘권력’이란 그렇게 합의된 좋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혁명 주체의 능력(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확실성과 위기에 직면해 사실상 누구도 제대로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공백(interregnum)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지젝의 답변은 단순하다. 사유하라!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경계하고,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서 이것이 진정 문제 상황인지, 또 무엇을 위한 혁명인지를 물어야 한다. 촛불시위도, 희망버스도, 혁명적 축제의 순간은 금방 식어버리고 그 빛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핵심 과제란 혁명적 순간 ‘그 이후’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사회를, 어떤 자유를, 어떤 정부를, 어떤 행복을 원하는지 등 삶의 토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사유”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폭넓게 사유하고, 전 지구적인 시각을 가지며, 철학적으로 문제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는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칸트의 “이성의 공적 사용”의 다른 이름이다. 즉 공적 이성의 자유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정의하는 것이며, 물음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지젝의 이러한 사유가 궁극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은 사실상 부재한다. 혹자에겐 이것이 지젝 이론이 갖는 결정적 공허함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젝은 본인의 소명을 문제 상황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예언자가 아닌, 올바른 물음을 던지는 철학자로 경계 짓고 있으며, 오직 이것만이 실재의 사막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이라 단언한다.
   
   
   누가 실패한 혁명을 두려워하는가?
   
   좌파의 혁명조차 냉소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금, “좌파는 정의(定義)상 희망의 편이다”라는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말을 떠올린다. “좌파는 우리가 어떤 희망을 품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지속해야 하는 것에 책임이 있다.” 도덕적인 연대감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대보다는 분리가, 화합보다는 배제가 사회적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불행한 현실 앞에 세속적 좌파의 과업이 놓여 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미래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 즉 평범한 시민에게 권력을 쥐여 주고, 사람들 사이의 양극단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몫 없는 자들”을 정치적 영토 안으로 끌어올 수 있는 정치적인 기적은 가능할 수 있다. 불가능한 꿈의 시도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자 본연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공동의 것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시대, 신세계 질서의 붕괴도, 생태적 파국의 위협도, 다시 영점(zero-point)에서 사유돼야 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해 온 좌파가 실질적 위기가 닥쳤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함을 이미 목도하지 않았던가.
   
   지젝은 총체적 난국을 탈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새로운 집단성의 창조”를 제시한다. 결국 진정한 좌파의 기획이란 “함께 가자”고 외치는 방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나 여기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추상적 불만과 관념적 분노를 표현하는 “의례적 의사소통(phatic communication)”을 경계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공동으로 모색하는 것이 요구된다. 메시지 없는 집단적 시위나 운동은 이제 더 이상 좌파의 무기가 돼서는 안 된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좌파의 오만을 경계하고, 새로운 세속적 좌파의 탄생을 기대해야 한다는 지젝의 진단은 다시금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를 남겨 둔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Soyons ralists, demandons l’impossible!)’는 1968년의 낡은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나의 굳은 확신이자 정치적·실존적 전제다. 오늘날 진정한 유토피아는 현존하는 체계의 신중한 전환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현실주의자의 유일한 선택지는 이 체계 내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필자가 참가한 국내 최초의 슬라보예 지젝과의 인터뷰집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출판·2012)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지젝의 답변으로 논의가 귀결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우주를 여행하고, 불멸의 생명체가 되는 것도 거의 가능해졌지만, 무상급식이나 의료보험 혜택을 위해 조금의 예산을 늘리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모순. 그렇다면 과연 전문가들이 말하는 ‘불가능한 것’은 진정 불가능한 것인가?
   
   지젝은 단언한다. “정치적인 기적은 가능하다.” 30년마다 반복되는 정치적 변혁 말고, 혁명적 정치의 탄생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릴 필요가 있다. 사유의 방식을 재정의(redefine)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재사유(rethink)하는 것, 이것이 “기나긴 혁명”(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출발 지점이다.
   
   지젝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계속하라! 살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교묘히 지배당하고,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사회 속에 있지만 마치 없는 것과 같은 상태에 처한 절망적 시민에게 흉측한 세계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지젝의 메스가 제공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공유하고 있다.
   
   개인의 도덕적 진보라는 험난한 성숙 과정을 거쳐, 공동체의 윤리를 내재화한 정치적인 주체가 되는 것. 외부 주인의 필요성 자체가 기만적인 유혹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지젝에게 “공동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것은 “자유를 향한 공동 투쟁이다”라는 단 한 문장으로 답한 것의 의미일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20세기의 위험한 철학자 니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불가능해 보이는 가능성에 미래를 거는 위험 속에서만 희망은 가능하다. 희망을 계속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과제다.


   
박용준
   
   국제 인문학 잡지 ‘INDIGO’ 편집장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