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로 국회 제1당의 여성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대목 중 하나는 ‘여성 대통령 시기상조론’이었다. 실제로 2006년 9월까지만 해도 한나라당 후보 경선 구도에서 박근혜 후보가 선두였지만 그해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안보위기가 고조되면서 이명박 후보에게 역전을 당한 것은 안보정국에서 ‘여성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부족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2007년 2월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서도 “많은 한국인은 여성 대통령에게 투표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 후보가 지난 4년 반 동안 여야(與野) 예비후보들의 다자(多者)대결 지지율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는 것은 ‘여성 대통령 시기상조론’이 이제는 그다지 위력이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북한발(發) 안보위기도 더 이상 박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아산정책연구원 조사에서 “북한의 급변사태라는 위기상황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후보”를 묻는 질문에 박 후보는 30%로 1위를 차지하면서 안철수 원장(13%), 문재인 민주당 상임고문(6%), 정몽준 새누리당 전 대표(5%),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4%), 김문수 경기지사(3%) 등 다른 남성 후보들을 모두 제쳤다. 우리 국민들이 여성 대통령 탄생에 큰 거부감이 없는 것도 확인된다. 지난해 3월 여의도리서치 조사에서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 ‘선호한다’(37%)가 ‘선호하지 않는다’(18%)에 비해 높았고 ‘대통령의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가 37%였다. 국민 4명 중 3명가량이 여성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다. 최근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의 발표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정치 지도자로 남성이 여성보다 나은가?”란 질문에 2005년에는 긍정적 답변이 다수(58%)였지만 2010년에는 부정적 답변이 다수(57%)로 바뀌었다.

여성 정치인에 대한 지지 상승은 유권자의 절반인 여성표(票)가 뭉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갤럽의 8월 둘째 주 조사에서 박근혜 후보와 안철수 원장의 양자(兩者)대결은 남성에선 39% 대 46%로 안 원장이 앞섰지만, 여성에선 정반대로 44% 대 34%로 박 후보가 크게 앞섰다. 안 원장이 새 책을 출간하고 TV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7월 넷째 주부터 남성 유권자에선 안 원장이 박 후보의 지지율을 추월했지만, 여성 유권자에서는 여전히 박 후보의 우세가 유지되고 있다. 최근 박 후보는 40대와 50대 이상에서는 남녀 간 지지율 차가 별로 없지만, 20·30대에선 10%포인트 이상 여성의 지지율이 남성보다 높다. 즉 20~30대에서 박 후보가 취약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주로 남성 유권자 때문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여성 광역단체장이 한 명도 탄생한 적이 없을 정도로 여성 정치인에게 벽이 높았지만 이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여성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들의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박 후보는 지난 8월 14일 새누리당 토론회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고 당당하게 밝혔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롤모델로 내세우면서 ‘여성 지도자’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날인 8·15 육영수 여사 추도식에서는 “어머니의 꿈이 제 꿈이 됐다”며 육 여사의 부드럽고 자애로운 여성 이미지를 오버랩시켰다. 요즘 그가 오히려 여성으로서 강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냉철한 ‘불통(不通) 스타일’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엘리자베스 마케팅’과 ‘육영수 마케팅’을 동시에 펼치기 시작한 박 후보가 어떤 이미지로 여성 정치의 벽을 깰 수 있을지는 올해 대선의 주요 관전 포인트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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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림 조선일보 여론조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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