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계 제일의 전자 기업이었던 소니도 국제 시장에서 급격히 힘을 잃어가며 갈라파고스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소니의 최고재무책임자(CFO) 가토 마사루가 지난 5월 소니의 마이너스 실적을 발표하며 물을 들이켜고 있다. ⓒphoto 로이터
한때 세계 제일의 전자 기업이었던 소니도 국제 시장에서 급격히 힘을 잃어가며 갈라파고스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소니의 최고재무책임자(CFO) 가토 마사루가 지난 5월 소니의 마이너스 실적을 발표하며 물을 들이켜고 있다. ⓒphoto 로이터

‘재팬+갈라파고스’을 뜻하는 합성어인 ‘잘라파고스’는 원래 좀처럼 외연을 넓히지 못하고 고립되는 일본 전자·IT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전자·IT 분야는 자동차와 더불어 일본 경제를 지탱해온 양대 축이었다. 기본적으로 기계제품인 자동차에 비해 전자·IT 분야는 변화의 속도가 빠른 편이어서 적응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은 제조업 지상주의에 빠져 전자·IT 분야에서 적응장애 현상을 보이고 있다.

옛 추억에 사는 전자업계

2000년대 이후 가시화된 일본 전자·IT 업계의 갈라파고스 현상은 최근 들어 속도를 더하는 모양새다. 스마트폰시장에서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SA에 따르면 2012년 2분기 세계 스마트폰시장 브랜드별 점유율은 삼성이 32.3%로 1위, 애플이 17.2%로 2위지만 소니는 두 기업에 한참 못 미치는 4.9%로 5위를 기록했다. 그나마도 다른 시장조사업체 IDC는 소니가 중국 기업 ZTE에 밀려 5위 안에 들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일본 기업을 통틀어도 세계시장 점유율은 8%에 불과할 것이라 추산하고 있다.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전자기업이 세계 정상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혁신적인 기술 개발 덕분이었다. 1979년 개발된 소니의 ‘워크맨’은 소니와 일본 경제를 성장케 한 원동력이었다. “시장은 없다, 다만 창조되는 것이다”는 소니의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 회장의 일성은 당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소니의 기업 분위기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 워크맨은 시장에서 사라졌다. 1999년 9340억엔에 달하던 워크맨 매출액은 2008년 4539억엔으로 반토막 났다.

전문가들은 소니의 위기, 나아가 일본 IT·전자 업계의 위기는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한다. 안병도 IT평론가는 “1970~ 1990년대 일본 IT·전자 기업의 전성기에는 선순환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튼튼한 내수시장 덕분에 기업들이 일본 내에서도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니 다양한 기술이 개발됐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검증을 거친 제품이 해외시장에 나가 성공할 가능성도 컸고, 다시 기술 개발을 촉진시킨 것이다.

영상·방송기술도 일본 방식 고집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상황은 변했다. 안정적인 내수시장에 안주하는 기업이 늘어났다. 안병도 평론가는 “발달한 기술 수준에 대한 높은 자부심도 일본의 고립을 가속화했다”고 설명했다. ‘기술 선진국’으로서 일본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그대로 수입해 쓰지 않는다. 호황기를 거쳐 다양해진 일본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동통신 방식이다. 1세대부터 국제 표준과는 다른 독자 방식을 사용했다. 1세대 HiCAP 방식이나 2세대 PDC 방식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아 일본 IT·전자 기업들은 수출용 휴대전화를 따로 만들거나 만들지 않기도 했다.

다양해진 소비자 취향에 바탕을 둔 안정적인 내수시장과 기술 수준에 대한 자부심이 맞물려 여러 분야에서 일본에서만 유행하는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니가 내리막을 걷게 된 것도 워크맨을 대체할 새로운 휴대 음악기기를 잘못 선택한 탓이 크다. 애플이 아이팟을 발표하고 MP3 플레이어가 출시되던 무렵, 소니가 힘을 쏟은 것은 MD 플레이어였다. 일본에서 유독 인기였던 MD 방식을 믿고 세계적 흐름을 외면하다가 애플에 밀리게 된 것이 소니의 패인이었다. 영상·방송기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병도 평론가는 “HD 방송기술 방식도 유럽과 미국에서 자주 쓰이는 DVB-T, ATSC 방식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ISDB-T 방식을 쓴다”고 소개하고 “DVD, 지상파 DMB 기술도 일본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세계시장에 쉽게 진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국가전략의 실패

그러나 일본 기업들이 변화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미래를 더욱 비관적으로 전망하게 한다. 얼마 전 파나소닉은 공식적으로 휴대전화시장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했다. 샤프는 창사 100주년을 맞는 올해 샤프 본사 건물까지 담보로 잡힐 지경에 처하면서 8000명이 넘는 인력을 감축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은 최근호를 통해 일본 전자·IT 기업이 모두 같은 덫에 걸려 있다며 윌리엄 사이토 IT전문 애널리스트의 말을 빌려 “새로운 제품을 만들지도 못하면서 예전의 영광만 되새김질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매출액의 변화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외부의 기술 개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세계적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도요타는 외형보다 내실을 다지는 세계 자동차업계의 흐름과는 반대의 길을 걷다가 몰락을 자초했다. 도요타는 소니가 침몰한 뒤 일본 경제를 홀로 받쳐온 기업이다. 그 중압감이 지나쳤던 탓일까, 도요타는 세계 자동차업계의 만년 1위였던 미국의 GM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된다. 1937년 창업 이래 금과옥조처럼 지켜왔던 품질지상주의를 버리고 매출 증대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이다. 결국 2008년 비원(悲願)의 세계 1위에는 등극했으나 기쁨은 잠시였다. 무리한 원가절감은 미국에서 제동장치 결함으로 인한 대규모 리콜사태를 불러왔고 도요타는 브랜드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추락했다. 올 들어 도요타는 상반기에 전 세계 판매 1위를 다시 차지했으나 회복세가 이어질지 여부는 당분간 두고봐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도요타 웨이(TOYOTA WAY)로 상징되던 2008년 이전의 도요타가 경외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도요타는 따라잡을 수 있는 자동차 회사일 뿐”이라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견해다.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서 3위로 밀려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경제의 ‘갈라파고스화’로 저성장에 허덕였고 글로벌경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낮아졌다. 이런 탓에 요즘 일본발 경제 뉴스는 좋은 뉴스가 별로 없다.

딜로이트컨설팅 김경준 대표이사는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는 국가전략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며 “일본은 건설, 금융, 유통 등은 개방하지 않고 만만한 부문만 개방하는 이중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의 폐단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예전과 달리 요즘 일본은 세계적 히트작이 없다. 일본에 가면 일본인들이 일본 제품만 쓰고 있는데 다른 나라 사람이 보면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며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는 한국이 넛크래커(nut-cracker)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박영철 차장 /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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