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하나고의 일본어 수업 장면. ⓒphoto 조선일보 DB
서울 하나고의 일본어 수업 장면. ⓒphoto 조선일보 DB

지난 10월 30일 서울 강남구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사거리에 있는 O어학원 강의실은 바깥 날씨만큼이나 썰렁했다.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초급 일본어’ 강의에 출석한 학생은 13명. 30개가 넘어 보이는 책상 중 절반 이상이 비어 있다. 5년째 이 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는 강사 이모(36)씨는 “올해만큼 수강생이 줄어든 적은 없다”며 “반짝 줄어드는 게 아니라 일본어 자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간, 강남역 파고다어학원 건물 1층에서 11월 강의 시간표를 살펴보던 대학생 윤형석(22)씨와 김채은(23)씨는 “요즘은 영어에 제2외국어 실력도 쌓아야 한다 해서 어떤 공부를 시작할까 살펴보러 왔다”고 말했다. 둘 다 중국어 강의에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아무래도 기업에서 중국어 능통자를 우대할 것 같기 때문”이라고 중국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를 밝혔다. 일본어를 공부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일본에 갈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일본어 능력시험인 JLPT 1급 강의를 들으러 학원을 찾은 한송이(27)씨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워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지만, 차라리 다른 언어를 배웠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금융권 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는 한씨는 “요즘은 일본어를 새로 공부하려는 친구들은 없는 것 같다”며 “장래를 위해서도 다른 언어를 더 익혀둬야 하나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일본어 수강생 20~30% 감소

일본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옅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일본의 고립 현상 ‘잘라파고스 재팬’을 한국에서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새로 일본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적어지고, 일본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려는 사람도 줄어드는 동시에 일본 문화와 정치·사회·경제에 대한 관심도 약해지고 있다.

한때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를 배우는 학생 중 일본어를 선택한 학생은 80%가 넘었다. 그러나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수치가 크게 줄었다. 일본어 비중은 2008년 43만1837명이 선택해 전체 제2외국어 과목 중 63.4%를 차지했다. 이 수치는 2012년의 경우 18만1578명으로 전체의 60.5%를 차지했다. 일본어 선택자가 4년 새 25만명이 준 건, 대입제도의 변화로 수능시험에서 제2외국어 응시를 할 필요가 없게 된 탓도 있다. 하지만 고교의 전체 제2외국어 선택자 중 일본어 선택자 비율 역시 63.4%에서 2.9%포인트 떨어졌다. 일본어 선택자가 그나마 유지되는 건 학교 현장에 일본어 과목 교사가 많기 때문이라는 게 일선 교사들의 분석이다.

학원가에서는 일본어 강의 수강생이 크게 줄어 갖가지 마케팅 전략을 활용하며 학생 유치에 힘쓰는 중이다.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일본어 전문 학원 원장은 “학원마다 쉽게 인정하지 않지만 확실히 몇 년 전보다 학생 수가 20~30%는 줄어들었다”며 “재작년에 한 달 4개였던 일본어 초급 강의를 올해는 2개만 개설했다”고 밝혔다.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나는 학생들도 줄어드는 모양새다. 일본 문부성과 일본학생지원기구(JASSO)의 자료를 보면 2010년 2만202명이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은 2011년 1만7640명으로 감소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일본학생지원기구 한국사무소의 안진영씨는 “급격하진 않지만 작년 3·11 대지진 이후로 경기 불황과 중국의 부상 등 여러 영향을 받아 일본으로 떠나는 학생 수가 확실히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무언가 배워 온다는 생각으로 일본을 찾는 유학생이 많았는데, 이제는 일본을 넘어서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학생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나고야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는 김지혜(21)씨는 주간조선과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 일본에 오는 친구들은 정말 일본에 관심이 있어 공부하려는 친구들”이라며 “동아시아 지역학의 경우 전에는 일본에서 공부하려는 사람이 많았으나 요즘은 중국으로 가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일본사무소 개설 기업 절반 줄어

산업 현장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주간조선에 제공한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공단에서 주최하는 채용박람회, 취업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 기업에 취직한 사례가 줄어들었다. 전체 해외 취업자 수는 2008년 1434명에서 2011년 4057명으로 늘어났지만, 일본에서 일자리를 구한 사람은 2008년 468명에서 2011년 326명으로 오히려 줄었다. 같은 기간 중국으로 떠난 취업자는 491명에서 1078명으로 2배 넘게 늘어났다.

기업들은 일본 전문가를 구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일본보다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일본에 진출하려는 기업을 지원하는 경영 컨설팅 업체의 유모(50) 부장은 “최근 2~3년간 일본에 새로 사무소를 열겠다는 기업이 반 이하로 줄었다”며 “회사가 성장하면 일본 사무소를 차리던 예전과 달리, 사업 내용이 일본을 상대로 하는 특정 업체를 제외하면 ‘일본에 가볼까’라고 말하는 CEO는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유씨는 도쿄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부동산 업체가 4월에 사무소를 폐쇄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일본으로 들어가는 한국인이 줄어드니 한국인 대상 일본 업체들이 울상이라고 한다”고 했다.

일본 법무성 자료에 따르면 기업활동을 목적으로 일본에 머무르는 한국인은 2007년 1만1467명에서 2011년 1만684명으로 지속적인 감소 추세다. 증권회사에 근무하다 3개월간 일본으로 연수를 다녀온 김한성(34)씨는 “올해 초 일본 주재원을 모집하는 자리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그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걸로 안다”며 “대지진 이후 ‘생활하기에는 쾌적하다’는 생각도 많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최근 일본 기업들이 우리나라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장면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 9월 2일에 서울대에서 열린 ‘2012 서울대 우수인재 채용 박람회’에는 예년보다 2배 이상 많은 25개 일본 기업이 참가했다.

일본인 싫어한다 9%→16%로

독도 영유권 문제, 과거사 청산 문제 등 한·일 양국 간 역사 인식 문제가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호감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명확하다. 영국 BBC는 매년 27개국 국민이 각각의 국가에 느끼는 호감도를 조사해 발표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매년 떨어지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조사에서 일본을 ‘좋아한다’는 응답은 36%, ‘싫어한다’는 9%였는데 2011년에는 각각 33%, 11%로 부정적인 응답이 늘어났다. 올해 들어서는 일본에 부정적인 사람이 더욱 늘어나 ‘싫어한다’는 응답이 16%에 달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소 문화산업연구실 채지영 실장은 그 이유를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서 찾았다. 원래 일본 대중문화는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는데, 구하기 어려운 것을 찾아다녀 얻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매니아층이 개방 이후에는 그런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점차 관심을 잃어갔다는 것이다. 채 실장은 “거기다 일본 드라마 판권 가격이 비싸고, 한국 대중문화도 그만큼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왜색이 짙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결국 없던 일이 됐다”며 “대중문화는 국가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인데, 일본 대중문화는 오히려 영향력을 잃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 거주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일본은 점차 “더 먼 나라”로 바뀌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15년째 서울에서 살면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는 다카야마 리쿠(38)씨는 “글로벌화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안으로 점점 더 숨어드는 것 같다”며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 문화를 이해해도 ‘딱 일본에서만 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어오는 학생들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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